[아침숲길] 나는 대한민국의 복 받은 아나운서였다
중학교 때 처음으로 마이크를 잡았다.
학교행사 진행을 맡게 되었는데 손에 쥔 마이크가 신기했고 그 마이크를 통해 내 목소리가 울려 퍼지는 것이 놀라웠다. 그 후 방송에 관심이 생기게 됐고 TV에서 뉴스를 전하는 신은경 아나운서를 보고 아나운서의 꿈을 갖게 되었다. 단아한 모습으로 또박또박 뉴스를 전하는 당당한 모습이 좋아 보였다.
가끔 학교에 방송 진로 특강을 가면 아나운서가 되고 싶다는 학생을 만날 때가 있다. 이렇게 누군가의 꿈이 되고 인생의 길을 만들어 준다는 것은 무척 즐거운 일이기는 하지만 또 무거운 책임감도 느끼게 된다.
아나운서 합격 소식을 들었을 때가 생각난다. 당시에는 KBS 제1라디오 정오뉴스를 통해 합격자를 발표했는데 어머니와 함께 라디오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뉴스가 끝날 무렵 “지금부터 KBS 공개채용 합격자 명단을 발표해 드리겠습니다. 아나운서 000번 차경애”, 숨이 멎는 줄 알았다. “분명히 차경애라고 했지?” 어머니는 고개만 끄덕끄덕, 놀라서 아무 말씀도 못 하셨다. 내가 신은경과 같은 아나운서가 된 거야? 나는 정말 꿈을 이루었고 대한민국의 공영방송 KBS 아나운서가 된 것이다. 아나운서가 되면 바로 스타가 되는 줄 알았다
아나운서 연수를 받을 때 이규항 실장님은 매일 덕승재박을 말씀하셨다. 방송을 잘하는 것보다 먼저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그런데 난 예쁜 옷과 아름다운 분장, 화려한 조명에 취해 그 말은 새까맣게 잊어버리고 내가 가장 잘난 줄 알았다. 그러나 방송은 종합예술. 하나의 프로그램이 만들어지기까지 화면 뒤에서 뛰어다니는 피디와 작가 조명 음향 분장 코디 등 수많은 사람들이 함께 한다는 것을, 흔들리고 넘어지고 깨지면서 알게 되었다.
이제 다음 달이면 KBS 아나운서에서 물러난다. 15초의 콜사인에 벌벌 떨던 때부터 큐시트가 날아가도 몇 시간을 버틸 수 있는 시절까지 38년여 동안 어디 좋은 일만 있었겠는가.
수습이 끝나자마자 나갔던 ‘무엇이든 물어보세요’ 계란 실험실 현장에서 난 방송 내내 계란을 겨란이라고 말했다. 왜냐하면 우리 집에서는 겨란이라고 했으니까. “냉장고에서 겨란 좀 꺼내와라, 겨란 삶아줄까?” 그러니 나도 모르게 겨란이 입에 붙은 거다. 서울 토박이이신 어머니는 왜 경기도 방언인 겨란이라고 하셨을까? 말은 습관이라서 나도 모르게 나올 때가 많다. 그래서 말이 무서운 거다. 신입 아나운서 방송 모니터를 하시던 아나운서실 부장님들이 얼마나 황당했겠나. 그때 쏟은 눈물이 해운대 바닷물만큼 될 것이다. 난 지금도 계란을 보면 38년 전의 겨란이 생각난다.
입사 후 첫 고정 프로그램이었던 아침뉴스의 일기예보 방송을 할 때는 새벽 출근이 고역이었다. 새벽 4시에 일어나야 하니 매일 시계와의 싸움이었고 꿈자리도 사나웠다. 방송 지각하는 꿈, 원고가 백지가 되는 꿈, 목소리가 안 나오는 꿈 등.
30년 살던 고향을 떠나 낯선 곳에 정착하는 일도 쉬운 건 아니었다. 혼자 광안리 바다 백사장을 걸으며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던가. 서울로 입사했지만 서울 근무는 채 5년이 되지 않는다. 30여 년을 부산 시민과 함께했던 시간들. 부산 시장부터 소년소녀가장까지 방송을 통해 만난 부산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38년여 아나운서의 시간을 정리하면서 아쉬운 것은 조금 더 원고를 보고 조금 더 연습을 하고 조금 더 스태프를 챙기고 조금 더 출연자들에게 친절히 했더라면…. 그래도 돌이켜보면 지금까지 지내온 것 모두가 감사이고 삶을 배우는 시간이었다. 무엇보다 제 방송을 들어주시고 봐주신 부산 시민에게 감사드린다.
지난달 서울에서 만난 아나운서 선배들이 물었다. 이제 퇴직하면 고향 서울로 다시 와야지? 아니다. 앞으로 30년도 부산에서 살 거다. 지척에 산이 있고 바다가 있고 멋진 갈맷길이 있고 맛난 밀면과 미역국이 있는 곳, 난 부산이 좋다.
나는 부산으로 오길 잘한 복 받은 아나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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