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엔 택배, 밤엔 소설가… “힘들어도 주어진 삶을 살아냈죠” [마이 라이프]
‘두 개의 인생’ 어느덧 7년
여러 직업 전전하다 지인 소개로 시작
육체노동 처음이라 매일 ‘체력의 한계’
잠시 일 접었다가 다시 택배로 돌아와
‘노력의 고통’ 작은 깨달음
삶이란 어떤 의미가 아닌 열정 그 자체
채플린 말처럼 인생은 선택할 수 없어
‘나태냐 열정이냐’ 오직 해석이 있을 뿐
진상 고객 만나도 ‘평정심’
아파트 층마다 멈춰 섰던 엘리베이터
1층서 내리자마자 욕설 세례 받았지만
대뜸 “죄송합니다” 외치고 애틋함 느껴
‘삶의 도피처’가 된 글쓰기
일 마치면 씻고 바로 키보드 앞에 앉아
매일 몇장이라도 꾸준히 기계처럼 써
“난 그저 퇴근해서 연인 만나러 가는 것”
“택배 한 번 해볼 생각 없느냐.”
택배? 거제도에 사는 지인으로부터 택배를 소개받았다. 처음에는 하기 싫었다. 다양한 직업과 직장을 전전해 왔지만, 그렇다고 육체노동을 해본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소설만 써서 생계를 유지할 수 없다는 현실은 자명했다. 더구나 여러 직업을 전전하면서 수억 원대의 빚까지 떠안은 그가 아니던가.
1년여 거제도에서 택배를 한 뒤 잠깐 쉬었다가 상경해 택배를 이어갔다. 상경한 지 3개월 만에 결혼도 했다. 중간에 전업 작가가 되겠다고 잠시 그만두고 물류센터 일도 했지만, 결국 다시 택배로 돌아왔다. 어느새 7년. 그는 낮에는 ‘문밖의 사람’ 택배기사로, 저녁에는 소설가로 두 개의 인생을 살아내고 있었다.
소설가 정혁용이 소설가와 택배기사라는 두 개의 삶을 살아온 일과 그 과정에서 느낀 소회, 성찰을 정리한 에세이 ‘문밖의 사람’(마이디어북스)을 펴냈다. 책에는 소설가인 그가 택배를 하게 된 계기, 택배 노동의 실상과 애환, 생활인으로서의 고뇌, 일을 하면서 얻은 깨달음, 소설 쓰기에 대한 애정 등이 진솔한 필치에 담겼다.
극적인 성공 신화도 없고, 돈 잘 버는 이야기는 없다. 대신 낮에는 노동자로 택배를 하고 밤에는 작가로서 소설을 쓰는, 하루하루 삿된 꿈과 희망을 품었다가 좌절하기를 반복하는 한 소설가의 이야기가, 작은 깨달음이 있다.
“난 항상 의미의 뒤에 숨어 삶을 도피해왔다. 마주하고 노력하고 피를 흘릴 자신이 없어서. 의미를 찾으면 그런 고통 없이 살아질 거라고 생각했다 … 노력의 고통 없이 말이다. 결국 순수하게 의미를 찾은 게 아니라 삶을 날로 먹고 싶었을 뿐이었던 거다.”
인상적인 장면 가운데 하나는 택배를 하면서 만나게 되는 다양한 진상 고객 이야기. 이들에 맞서서 화를 내다가 화조차 내지 않게 됐다는 사연에선 아연 숙연해질 수밖에. 그러니까 어느 아파트 배송을 하고 나올 때의 일이다. 엘리베이터가 하나인 경우 문 사이에 택배를 놓고 잡아서 배송할 수밖에 없는데, 1층으로 나올 때였다. 술에 취한 삼십대 초반의 한 남자가 문이 열리자마자 말했다. 야! 이 개새끼야. 평소라면 멱살이라도 잡고 화를 냈겠지만, 그날따라 대뜸 이렇게 말했다. 죄송합니다, 피곤하실 텐데 본의 아니게 민폐를 끼쳐드렸습니다. 아니, 내가 이런 인간이 아닌데 미쳐가나 싶었다고.
“상대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어떤 감정이 들었다. 낡고 더러운 작업복, 분명 조선소에서 야간작업까지 했을 모습을 보고 있자니 뭔가 애틋했던 거다. 당신이나 나나 참, 먹고산다고 고생이 많다, 싶어서. 그때 비로소 인간에 대한 연민이 생겼다.”
―7년 전 거제도에서의 택배는 믿을 수 없을 정도다.
“일은 오전 7시부터 시작되기 때문에 6시 반에는 일어나 차를 타고 있어야 한다. 지금은 다르지만, 당시에는 분류 작업을 한 뒤, 오전 11, 12시부터 배송을 시작했다. 거제도에선 물량이 적은 대신 지역이 넓어서 새벽 2, 3시까지 일해야 했다.(하루 16~17시간 일하는 셈인데) 보통 하루 280개를 배송했다. 시간당 타수가 20개 정도 나왔는데, 280개면 거의 14시간 정도 걸린다. 분류 작업까지 포함하면 18, 19시간 일하는 셈이다.”
다행히 지금은 택배를 둘러싼 환경이 많이 개선됐다. 우선, 많은 시간이 소요된 분류 작업이 배송에서 제외되면서 노동시간이 줄었다. 그래서 회사 근처 식당에서 아침 겸 점심을 챙겨 먹는다. 물량과 담당 구역 역시 줄었다. 배송도 화 및 수요일을 제외하곤 보통 오후 6시쯤 끝난다.
―지금은 어떤가.
“보통 낮 12시쯤 되면 분류 작업이 끝난다. 분류된 물건을 차에 옮겨 정리하는 탑차 작업은 2시간 정도 걸린다. 보통 오전 9시 전에 회사에 출근해 1차로 한 번 정리하고, 근처 식당에서 아침 겸 점심을 먹은 뒤, 다시 2차로 정리한다. 오후부터 배송한다. 물량과 구역도 줄어서 화 및 수요일은 오후 9시, 10시쯤 끝나고 목 금 토요일은 오후 6시나 7시쯤 끝난다.”
―택배 노동을 하면서 특별히 기억나거나 보람찬 일이 있었는지.
“사람들과 접촉하는 일이 아니라서 특별히 보람을 느꼈던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소설에도 썼지만, 이 직업은 많은 사람을 만나지만 결국 아무도 만나지 않는다. 물건만 배송하기 때문에 인간관계가 없다. 그래도 거제도에 있을 때 다른 회사에서 택배하시는 분이 기억에 남는다. 그분은 택배를 무척 좋아하셨다. 어느 날 ‘뭐가 그리 좋아요?’라고 물었더니 이렇게 말하더라. 내 택배 받아서 기분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고, 내 가족을 건사할 수 있고, 운동도 되고, 내가 노동해 정직하게 살고 있으면 됐지,라고. 직업에 애정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에 놀랐다.”
―독자와 나누고 싶은 이야기는.
“우리는 자신을 평가하는 데 자주 남의 시선이나 사회가 보는 기준으로 평가하는 것 같다. 지금 전국에서 몇 등 노동자, 대표, 전무, 국장…. 끊임없이 남과 비교해가며 자신을 괴롭힐 필요는 없다. 힘들더라도 자신의 노동으로 밥을 먹고 산다면 품위를 가져야 된다. 남들이 나를 안 봐줘서 그렇지, 스스로 앞가림하고 사는 것 아닌가. 택배라는 업을 즐겁게 할 수 있으면 되고, 소설 쓰기라는 업을 즐겁게 하면 되지, 대표이사나 전무, 유명 소설가 등의 계급에 얽매일 필요가 전혀 없다. 에세이의 주제가 굳이 있다면 품위를 가져도 된다는 것 아닐까.”
소설가 정혁용은 소설쓰기와 택배 노동을 병행하면서 비로소 삶의 진정의 의미를 깨닫게 됐다고 말한다. 그것은 바로 삶이란 어떤 의미가 아닌 삶을 향한 열정 자체라는 것, 살아내는 것 자체라는 것을.
“원래 삶의 의미란 게 없다. 우리는 그저 삶에 던져졌을 뿐이다. 어디서 왔는지 어디로 가는지 아무도 모른다. 그러니 삶의 의미를 묻는 건 질문이 잘못된 거다. 알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야 채플린의 말이 맞는 것을 느낀다. 인생은 선택할 수 없다. 인간은 매일 매 순간 주어진 삶을 살아낼 수 있을 뿐이다. 오직 해석이 있을 뿐이다. 나태로 삶을 사느냐, 열정으로 사느냐. 다만 삶을 해석하는 방식이 달라질 것이다.”
서점 구석에 놓여 있던 책 한 권을 펴들었다. 첫 문장부터 확 빨려 들어갔다. 문장과 유머, 문체 모두 그동안 읽었던 소설과는 달랐다. 뭐 이런 작가가 다 있지. 책 표지를 다시 보니 레이먼드 챈들러(Raymond Thornton Chandler)의 책이었다.
대학원 시절 어느 날 오후, 그는 울산 시내 한 서점에서 레이먼드 챈들러의 책 ‘안녕 내 사랑(Farewell, My Lovely)’을 사서 그 자리에서 다 읽었다. 이렇게 쓰는 작가가 있다니. 나도 이런 작가처럼 글을 쓰고 싶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건설회사 직원, 건설업체 사장, 보험 설계사, 술집 주인, 막노동 등 여러 직업과 직장을 전전하는 사이, 글을 쓰고 싶다는, 작가가 되고 싶다는 생각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보험 설계사로 일하던 어느 여름날. 회사에 나가기 싫었던 그는 어머니에게 출근한다고 말한 뒤 집을 나섰지만, 그가 간 곳은 회사가 아닌 피시방이었다. 문득 글을, 소설을 쓰고 싶어했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래, 단편소설을 한 편 써보자.
10시간 넘게 피시방에서 글을 쓴 끝에 그는 단편소설 한 편을 써낼 수 있었다.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신문사 신춘문예는 너무 멀리 있었다. 그나마 응모가 가까운 것은 ‘계간 미스터리’. 그런데 문제는 그날 쓴 단편은 미스터리가 아니었다. 다음 날, 그는 다시 피시방으로 출근해 전날 쓴 소설을 미스터리로 바꿔 썼다. ‘계간 미스터리’에 응모했고, 그해 겨울 당선 통보를 받았다. 소설가 정혁용의 원점이었다.
“정말 도피처가 없어서 글을 쓰게 됐습니다. 하는 일마다 아무것도 안 되니까, 마지막으로 내가 좋아했던 일이라도 하나 해보자 해서 글을 썼던 거예요.”
1972년 울산에서 나고 자란 정혁용은 2009년 겨울 단편소설 ‘죽는 자를 위한 기도’가 ‘계간 미스터리’ 겨울호에 당선되면서 등단했다. 이때 그의 나이 서른일곱. 이후 장편소설 ‘침입자들’, ‘파괴자들’ 등을 펴냈다. 한국추리문학상 황금펜상 우수상 등을 수상했다. ‘침입자들’은 남미에서 번역 출간돼 화제가 되기도.
―일상이나 글쓰기 루틴은 어떤지.
“택배 일을 하면서 아침에 쓸 수가 없어 저녁에 쓴다. 귀가해 씻고 바로 쓴다. 양을 많이 쓰지 못하고 에이포(A4) 한 장 정도 쓴다. 다른 작가들은 문장을 다듬고 플롯을 다듬지만, 저는 일단 기계처럼 매일 몇장이라도 꾸준히 쓴다. 반면 잘 써지더라도 일정량 이상은 또 안 쓴다. 왜냐하면 다음 날 쓸 게 없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 실마리를 남겨두고 실타래 뽑듯이 딱 그 정도만 쓰면 술 먹고 잔다.”
그 힘든 택배 일을 하면서 소설을 쓰다니. 지인들은 택배를 하면서 소설을 쓰는 그의 모습을 보고 놀라워한다. 그럴 때마다 그는 천연스럽게 대답한다. “나는 그저 퇴근해서 사랑하는 연인을 만나러 간 것일 뿐이야.”
어김없이 택배를 마친 그날 밤, 정혁용은 또다시 사랑하는 연인을 찾아 나선다. 태평양의 심연에 놓여 있던 키보드를 건지고, 안데스산맥의 어디쯤 놓여 있던 책상을 가져와 앉은 뒤에. 탁, 탁, 탁탁. 자판을 두드린다. 세 번째 소설의 첫 문장을 쓰기 시작한다. 소설이 시작되고, 삶도 지속된다.
“먼 후일, 생의 마지막에 다다랐을 때, 마흐무드가 가장 먼저 떠올린 것은 파티마나 자신이 죽인 사람들의 얼굴이 아닌 할아버지의 굽은 등이 보이는 뒷모습이었다. 유난히 길었던 겨울이 지나고 막 봄이 찾아온 들판에서 할아버지가 양을 잡고 있는 모습으로, 불어오는 바람에는 작으나마 온기가 섞여 있었고….”
김용출 선임기자 kimgija@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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