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사람들 삶에 드리운 ‘폭풍우’… 그 순간을 영원으로 담다
체호프·모파상·조이스 잇는 ‘작가들의 작가’
말년에 창작한 10편 단편소설 국내 출간
남편과 친구 불륜 고통 겪은 출판사 관계자
천재 소년 제자로 받아들인 피아노 선생 등
인물 각자 삶의 결정적 순간 예리하게 포착
완성도 높은 문장·관조 시선으로 풀어내
트레버 “단편소설은 순간 포착하는 예술
진실의 폭발 장면 담는 인상파 그림 같아”
“미스 나이팅게일에게 첫 레슨을 받고 있는 소년은 아무 말이 없었다. 하지만 조용한 메트로놈을 바라보며, 그 조용함이 기쁨을 주기라도 하듯 살짝 미소를 머금었다. 그러더니 피아노 건반을 누르기 시작했고, 첫 음들이 울렸을 때 미스 나이팅게일은 자신이 천재와 함께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평생 독신으로 산 오십대 초반의 여성 미스 나이팅게일은, 아버지에게 유산으로 물려받은 집에서 아이들에게 피아노를 가르치며 산다. 어느 날 천재적인 소년이 그의 제자로 들어오고, 소년의 연주는 나이팅게일을 파라다이스로 이끈다.
“미스 나이팅게일은 그를 바라보며 전에는 알지 못했던 걸 깨달았다. 그 미스터리 자체가 경이였다. 그녀는 거기서 아무런 권리가 없었다. 인간의 나약함이 사랑과, 혹은 천재가 가져다주는 아름다움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 이해하는 데만 너무 골몰했으니까. 균형은 이루어졌고, 그것으로 충분했다.”
아일랜드 출신의 작가 트레버가 말년에 창작한 열 편의 단편소설을 묶은 유작 소설집 ‘마지막 이야기들’(문학동네)이 최근 번역 출간됐다. 이번 소설집에도, 그의 이전 소설들처럼, 영웅이 아닌 평범해 보이는 소시민이나 인물들이 주인공이다. 천재 소년을 제자로 받아들인 피아노 선생(‘피아노 선생의 제자’), 칠장이들에 의해 희미하게 죽음이 알려지는 장애인(‘장애인’), 남편과 친구의 불륜으로 사랑과 우정을 동시에 잃은 출판사 관계자(‘다리아 카페에서’), 환경미화원에게 시신으로 발견된 중년 부인(‘크래스소프 부인’), 기억 장애에 시달리며 거리를 헤매는 그림 복원가(‘조토의 천사들’)….
2016년 여든여덟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트레버가 마지막 소설집에서 그린 인간과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 그의 문학적 여정은 어떠했을까. 유작 소설집과 그의 문학적 여정을 살펴봤다.
‘장애인’은 농장에서 함께 살던 오십대 여성 마티나와 먼 친척뻘인 장애인 남자의 이야기다. 영어가 서툴러 의사소통이 자유롭지 못한 떠돌이 칠장이 형제는 어느 날 장애인과 농장의 집을 페인트칠하기로 합의한다. 페인트칠은 한동안 중단됐다가 비가 그치면서 재개되지만, 다리가 불편한 장애인은 더 이상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함께 살던 여성이 서둘러 집을 떠나고 장애인이 숨진 것으로 보이지만, 칠장이 형제는 페인트칠을 마저 끝낸다.
‘다리아 카페에서’의 주인공은 남편이 자신의 절친과 불륜을 저질러 사랑과 우정을 한꺼번에 잃은 작고 가냘픈 여성 애니타 라이드다. 인기 댄스 그룹 멤버였던 애니타는 열아홉 살에 사랑에 빠져 결혼하지만 남편이 친구 클레어와 불륜을 맺으면서 사랑과 우정을 모두 잃는다. 이후 긴 시간이 흐르면서 중년에 접어든 애니타는 출판사 원고 검토자로 만족스럽게 살아간다. 어느 날 클레어가 다리아 카페에 있는 그녀를 찾아와 남편의 부고를 알린다. 애니타의 삶에 다시 파문이 일지만, 더 이상 그녀를 흔들어 놓진 못한다. 그리하여 그녀는 사랑 이전의 우정을 떠올리게 되는데.
“애니타는 늘 앉는 자리에서 폭력 범죄와 힘겨운 사랑, 인간의 나약함과 구원, 고통과 치유에 대한 글들을 읽는다. 가끔 고개를 들면 돌아온 클레어가 보인다. 다른 사람이 될 때까지 잠시 클레어가 거기 있다 … 집을 판다는 표지판은 치워졌다. 다른 사람들이 그 집에 산다. 클레어가 쓸쓸한 고독 속에 고이 간직하고 있는 것, 그걸 애니타는 지금 뒤늦게 쓸쓸한 고독 속에 받아들인다. 사랑이 오기 전, 우정이 더 나은 것이었을 때 있었던 모든 것을.”
사랑하는 아내와 다툰 뒤 화가 나서 과속운전을 하다가 사고를 일으켜 아내를 죽게 만든 레이븐스우드씨의 죄책감과 그를 유혹하여 돈을 뜯어내려는 젊은 은행원 로잰을 그린 ‘레이븐스우드씨 붙잡기’, 돈을 보고 결혼한 늙은 남편이 죽자 과부의 삶을 즐기기로 결심한 크래스소프 부인이 맞이한 파국을 묘파한 ‘크래스소프 부인’, 길거리에서 우연히 만난 여자를 짝사랑하면서 중년의 위기를 겪게 된 비니콤씨의 이야기를 담은 ‘대화를 이어가기 위해’….
1928년 아일랜드 코크 카운티의 미첼스 타운에서 태어난 그는 1958년 소설 ‘행동의 표준’에 이어서, 1964년 두 번째 소설 ‘동창생들’로 호손덴 문학상을 받으며 작품 활동을 본격화했다. 이후 수백 편의 단편소설과 18권의 장편소설을 발표했다. 장편소설로 ‘딘머스의 아이들’, ‘운명의 장난감’, ‘펠리시아의 여정’, ‘여름에 죽다’, ‘루시 골트 이야기’, ‘여름의 끝’ 등이, 단편소설집으론 ‘우리가 케이크를 먹고 취한 날’, ‘비 온 뒤’, ‘카드놀이 속임수’ 등이 있다. 휘트브레드상(Whitbread Prize, 현재 코스타상)을 세 번 수상했고, 오헨리상을 네 번 수상했다. 부커상 후보에 5번이나 올랐고, 노벨 문학상 후보로도 여러 차례 거론됐다. 무라카미 하루키, 조이스 캐럴 오츠,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등이 그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단편소설 작가라는 사실에 자긍심을 가졌던 트레버는 1989년 ‘파리 리뷰’와의 인터뷰에서 단편소설을 “순간을 포착하는 예술(art of the glimpse)”이라고 정의했다. 장편소설이 복잡한 르네상스 시대 그림이라면, 단편소설은 화가에게 깊은 인상을 준 찰나의 장면을 포착해 주관적인 방식으로 화폭에 담는 인상파 그림이라고. 진실이 폭발하는 순간을 포착해 영원을 만드는 것이라고.
“나는 그것(단편소설)이 순간을 포착하는 예술이라고 생각합니다. (장편)소설이 복잡한 르네상스 시대 그림과 같다면, 단편소설은 인상파 그림입니다. 그것은 진실의 폭발이어야 하죠. 그것의 힘은 넣는 것만큼이나 빼는 것에 있어요. 그것은 무의미함을 완전히 배제하는 것과 관련이 있지요. 인생은 대부분 시간이 무의미합니다. 소설은 그러한 인생을 모방하지만, 단편소설은 앙상하고 방황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필수적인 예술입니다.”
1964년 ‘동창생들’로 호손덴 문학상을 받은 이후 전업했고 1971년 영국의 시골 마을 데번으로 이사한 이래, 트레버는 죽기 직전까지 쓰고 또 썼다. 처음 새벽 4시쯤 일어나 아침 식사 시간까지 마치 형벌을 받듯 쓰다가, 나중에는 오전 8시에서 낮 12시까지. 타자기로 쓴 글을 자주 리필했고, 글을 다 쓰면 타자된 글을 가위로 잘라냈다. 삶의 균형이 무너지는 어떤 순간을 포착하기 위하여. 포착된 순간을 어떤 인상으로 창조하기 위하여. 그 인상들로 수많은 사람과 소통하기 위하여….
김용출 선임기자 kimgija@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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