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강이까지만 물 차도…시각장애인에겐 집이 새로운 미로”
방에서 현관 동선 외웠지만
침수로 물건 떠다니면 지뢰밭
높은 화장실 등 침수에 취약
집 ‘3분의 2’가 지하 아니라
서울시 대책 조사서 제외
바우처 사업도 전달 누락
지난해 8월8일 폭우로 서울 관악구 신림동의 반지하가구에 물이 들어차 발달장애인 일가족이 사망했다. 빗물이 들어오자 탈출을 시도했지만, 현관문은 수압 때문에 열리지 않았다. 방범창이 부착된 창문은 좀처럼 뜯기지 않고 빗물만 안으로 쏟아냈다. 어려운 경제적 형편에 선택한 좁은 보금자리는 작은 감옥이 되었다.
그로부터 1년이 지났다. 중증장애인 김정식씨(47·가명)는 반지하에 산다. 정부가 내놓은 반지하 대책은 김씨를 이리저리 비켜 갔다. 김씨는 8일 “신림동에서 장애인 가족이 사망한 이후로 비만 오면 불안하고 무섭다”고 했다.
김씨는 1급 시각장애인이다. 의료 관련 전공으로 대학을 졸업하고 첫 직장에 들어간 20대 초반만 해도 장애가 생길 거라곤 상상하지 못했다. 그러나 피로감이 밀려들고 시력이 점점 떨어졌다. 김씨는 “장애가 있다고 인정하기까지 오래 걸렸다”면서 “처음엔 장애 등급 5급을 받았는데 지금은 1급을 받은 상태”라고 했다.
김씨에게 세상은 안개가 짙게 낀 것처럼 보인다. 툭툭 튀어나온 물건들은 지뢰와 같다. 김씨가 3년 전 현재 반지하로 이사 온 뒤 가장 먼저 한 것도 방에서 현관문까지의 동선에서 짐을 치우고, 각 위치를 외우는 일이었다. 김씨는 흉터로 가득한 정강이를 보여주었다. 그는 “이사 초기엔 구조를 못 외워 많이 다쳤다”고 했다.
김씨가 비를 무서워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정강이 높이까지만 물이 차도 물건이 둥둥 떠다닐 수 있다. 김씨는 “완전히 새로운 미로에 갇히는 것”이라고 했다. 탈출하기도 어렵다. 김씨 집에서 지상으로 올라가려면 화장실 앞을 지나, 신발장 턱을 넘은 뒤, 현관문을 밀고 20㎝ 높이 계단 여섯 개를 올라 공동 현관으로 나가야 한다. 김씨는 “장애인은 민첩하게 움직이지 못해 더 위험하다”고 했다.
김씨 집은 옆집과 달리 창문에 물막이판이 달려 있지 않았다. 가장 큰 문제는 높은 화장실이다. 김씨 집 화장실 변기는 영화 <기생충> 속 반지하집 변기처럼 허리 높이에 설치되어 있다. 비가 많이 오는 날이면 변기가 오물을 울컥울컥 뱉어내는 탓에 지난해 한 차례 집이 잠긴 적이 있다고 한다.
김씨는 “올해 비가 많이 오면 화장실이 또 범람할까 두려워 하수구 점검을 해달라고 집주인에게 요청했다”며 “(집주인은) 아직 침수가 일어나지 않았으니 점검해줄 수 없다고 한다”고 했다.
서울시는 지난해 참사 이후 김씨처럼 반지하에 거주하는 중증장애인을 위해 여러 대책을 내놓았다. 가장 처음 한 일은 전체 높이 중 3분의 2 이상이 지하에 묻혀 있는 중증장애인 거주지를 조사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김씨의 집은 절반만 묻혀 있어 최초 조사 대상에 포함되지 않았다.
김씨는 서울시가 진행한 ‘반지하 특정바우처’ 사업도 몰랐다. 반지하 특정바우처는 중증장애인이 반지하에서 지상층으로 이주하고자 할 경우 최장 2년간 월 20만원을 지원하는 정책이다. 서울시는 이 사업을 알리기 위해 대상 장애인들을 방문하고 우편을 보냈다고 했다. 그러나 김씨는 매일 직장으로 출근하는 탓에 공무원 방문 사실을 알지 못했다. 우편 역시 글을 읽지 못해 무의미했다. 서울시 관계자는 “많은 인원이 작년부터 연초까지 투입되다 보니 제대로 정책 안내가 안 된 것 같다”면서 “특히 (김씨가) 시각장애인이라 전달에 어려움이 있었다”고 말했다.
김씨는 “위험한 반지하에 살고 싶은 중증장애인이 어디 있겠느냐”면서 “장애인 스스로 반지하를 벗어날 만큼 경제적 여건을 마련하기 힘드니 정부에서 신경을 써줬으면 좋겠다. 정책을 전달할 때도 장애 특성을 고려해줄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이홍근 기자 redroot@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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