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희진의 낯선 사이] 북극곰과 나의 공통점, ‘지구를 구할 수 없다’

기자 2023. 8. 8. 2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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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준열 배우가 전하는 ‘그린피스’의 목소리다. “나는 북극곰입니다. 나는 기후 변화가 신경 쓰이지 않습니다. 뽀얀 털을 갖고 있어서, 귀여운 까만 코를 갖고 있어서, 당신은 나를 걱정하고 안타까워 하지만 당신이 걱정해야 하는 건 내가 아닙니다. 이미 당신에게 계절은 의미가 없어졌고, 이상기온은 더 이상 이상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나의 문제가 아니라 당신의 문제입니다. 하지만 지금, 여러분은 할 수 있는 일이 있습니다. 그리고 나, 북극곰은 할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지금 북극곰과 우리 지구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 끔찍한 변화를 멈춰주세요.”

정희진 월간 오디오매거진 <정희진의 공부> 편집장

이 공익광고는 기후 위기를 기존과는 다른 관점에서 접근한다. 환경 운동은 미래 세대를 위한, 지구를 지키기 위한, 동물을 살리기 위한 과제가 아니다. ‘환경(環境)’은 “인간을 둘러싼”이라는 의미에서 이미 인간 위주의 단어다. “나를 둘러싼 무엇을 위해서”라는 발상. 주체(인간)와 대상(지구)의 이분법을 버리지 않은 한, 답은 없다. 지구 위기는 인간이 만든 것이므로 해결도 인간만이 할 수 있다. 북극곰은 피해가 없다는 의미가 아니라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얘기다.

이 광고를 보고 내가 바로 북극곰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기후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나 같은 ‘문과’가 할 수 있는 일은 일상의 정치 외에는 근본적으로는, 없다. 동물과 나의 공통점은 지구 성원권이 없다는 사실. 근본적인 해법은 이공계 전문가들의 의식에 달려 있다.

문과 vs 이과보다 관점이 더 중요

얼마 전 유시민 작가와 ‘문과’와 ‘이과’의 만남을 주제로 대담을 했다. 그의 신간 <문과 남자의 과학 공부>가 계기가 되었다. 나는 그가 공부한 과학 이야기보다 나이 듦에 대한 소회가 좋았다. 이것이 원래 의미의 에세이, 수상록(隨想錄)이다. 작가가 난무하는 시대지만, 본디 작가(作家)는 평생 집을 짓는 예술가이다. 나이 듦에 대한 그의 생각을 알고 싶었다.

모든 학문(學問)은 질문(質問)이다. 일본은 근대화 시기 영어를 번환(飜換)하는 데 많은 고민을 했는데, “사이언스”를 “학술(學術)”로 번역했다. 사이언스는 자연과학에 국한되지 않는다. 영어도 그렇다. 한국어의 ‘생활과학대학’ ‘사회과학대학’처럼 모든 학문은 사이언스다.

나는 문과와 이과를 나누고 둘 다 공부해야 한다는 식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럴 필요도, 시간도, 능력도 없다. 각자 필요한 공부를 할 뿐이다. 나는 한국 현대사를 탈식민주의 관점에서 재해석하고 싶다. 그러려면 일본어, 중국어, 영어 같은 외국어는 물론이고 관련 분야 서적을 읽기에도 평생이 모자란다.

어딜 가나 융합, 통섭(trans-)을 외친다. 통섭(統攝)이 아니라 통섭(通攝)이라고 그렇게 주장했건만(?) 여전히 통섭(統攝)은 완강하다. 이처럼 동음이의어가 반대말이 되는 경우도 드물 것이다. 어떻게 모든 지식을 ‘통(統, unification)’할 수 있겠는가. 문과와 이과를 같이 공부하는 시기는 필요하다. 초·중·고 교육이 그것이다. 이때 중요한 것은 ‘국영수’가 아니라 가치관, 체육, 환경, 성 교육을 포함한 건강 교육, 정치 교육이다. 정치 교육은 민주주의와 인권 개념의 역사, 보편성과 당파성을 동시에 배우는 것이다.

문과와 이과를 불문, 시민의 기본 생활을 배우는 것이 10대 시기의 공교육이다(이어야 한다). 호칭과 지칭의 구별, 내가 사는 지역의 역사, 타인과 나의 몸의 차이 등이 그것이다. 수학의 기하는 공간 감각을 위해 필요하다. 산수는 기본이다. 크기가 두 배일 때 부피는 세 배가 되므로 수박은 큰 것을 골라야 한다. 이 정도만 알아도 “아오리는 언제 빨간 사과가 되나요?”라고 묻는 대통령은 등장하지 않는다.

그나마 수박 사는 데 필요한 산수조차 쓸모가 예전 같지 않다. 소분된 제품이 더 비싼 자본주의 앞에서 공부의 의미는 달라진다. 화학의 기호는 환원주의의 좋은 예로, 인문학의 환원주의와는 다르다. 하지만 후자가 전자보다 득세할 때, 화학자 프리모 레비처럼 인종 환원주의에 의해 홀로코스트의 희생자가 된다. 한편 그가 “이것이 인간인가”라고 물었을 때 그 인간은 백인 남성이다. “이것이 여성인가?” “이것이 흑인인가”라는 말은 이상하다.

지구에서 가장 힘이 센 물질은 물이다. 물은 모든 곳에 스며들고 파괴할 수 있다. 수압으로 다이아몬드도 쪼갤 수 있으니 피라미드의 돌을 물이 재단(裁斷)한 것은 당연하다. 그러니 지구 표면의 70% 이상을 차지하는 바다의 오염 상태는 지구 멸망의 길을 보여준다. 물(H2O)에 대한 이공계의 전문성과 ‘물과 사회’를 아는 것은 대립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메타 인지 능력이다.

문과와 이과. 사안의 성격은 다르지만 관련된 쟁점은 다음과 같다. 첫째, 비슷한 학력(學歷) 상태에서 자연과학자의 인문서 진입 장벽은 그 반대의 경우보다 훨씬 낮다. 문과의 ‘패배’는 예정된 것이다. 푸코를 읽는 이공계와 (아인슈타인의 수학 선생이자 친구였던) 괴델을 읽는 문과생의 수는 같지 않다. 문과와 이과의 대화는 불공평하다. 한국인과 미국인이 영어로 대화하는 상황과 같다. 유시민 작가와 나의 대화가 풍요로운 언설이 되기에는 주제 자체가 난센스였고, 나는 논쟁 구도를 바꾸지 못했다.

둘째, 인문학 위기론은 IT 자본주의 이후 필연적 현상이다. 인문학의 위기는 두 가지다. 문과생의 취업 어려움, 로컬 지식을 생산하지 못하는 한국 사회. 우리 현장에 필요한 언어를 생산할 수 있는 인문학자가 있다면, 인문학은 그 어떤 지식보다 도움이 될 것이다. 인문학은 질문 방법과 가치관을 배우는 공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사회는 자신만의 문제의식이 있거나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을 싫어한다. 질문을 “트러블”로 생각한다.

셋째, 문과와 이과는 구분의 대상도 융합의 대상도 아니다. 둘 다 학술일 뿐이다. 자연과학자의 사고는 특정 사회의 역사적 맥락에서 자유로울 수 없으며, 인문학은 자연과학의 발달로 인해 가능했다. 해부학의 발전은 보편적 인권 개념을 가져왔고, (엥겔스의) 유물론은 당대 독일 자연과학의 급진적 발달에 크게 영향받았다. 생로병사의 원리는 문과와 이과를 아우른다. 죽음은 유물론의 옳음을 가장 잘 증명하는 사건이자, 생로병사 과정은 과학에 의존한다.

분야의 차이보다 중요한 것은 가치관과 관점이다. 관점 없는 공부는 문과와 이과 모두에게 재앙이다. 아니, 관점 없는 지식은 없다. 공부는 자신의 사회적 위치성에 기반한 가치관의 구성과 변화를 의미한다. 사람마다 젠더, 계급, 지역 등에 따른 ‘편견’이 있다. 없는 경우는 통념(지배 이데올로기)을 그대로 흡수한 경우다.

생태주의, 여성주의, 마르크스주의를 지향하거나 지역 문제에 관심이 있는 자연과학자가 있고, 관념론과 신자유주의적 사유로 뭉친 인문학자도 많다. 문과와 이과를 나누고 모두 공부해야 한다는 발상보다 자신의 계급, 젠더 등이 어떻게 가치관에 영향을 미쳤는가를 아는 것이 더 근본적이다.

지구는 ‘이과’에 달려 있어

넷째, 절실한 결론. 글로벌 자본주의 이후 자본주의는 노동과 소비가 아니라 ‘라이더와 그 외 노동자’로 나뉘었다. 자본주의의 질주, 즉 기후 위기는 이과의 파워다. 일상 용품부터 IT, 무기까지 기술이 자본주의를 견인한다. 지구의 생사는 온전히 자연과학자들에게 달려 있다. 북극곰처럼 문과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문과는 전문 영역에 개입할 수 없다.

기후 위기를 해결할 수 있는 이들은 ‘사회를 아는’ 자연과학자들이다. 이공계 대학생들을 위해 ‘과학과 사회’ 관련 과목을 전체 학점의 20% 이상 개설하고 수강하도록 해야 한다.

자연과학자에게 지구 위기의 책임이 있다는 뜻이 아니다. 그들만이 할 수 있다. 이과는 지구 위기와 자본주의의 원리를 안다. 한국 정치는 법조인과 사회과학 전공자들이 장악하고 있다. 문과 출신들은 능력도 없으면서 영향력은 과도하다. 이과 출신 관료가 많아져야 하고, 이공계 내부에서 차이가 만들어져야 한다. 후쿠시마 오염수에 논쟁에 ‘동원’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거버넌스에 포진해 있어야 한다. 언제나 중요한 것은 분야가 아니라 관점이다.

문과가 이과를 공부한 내용을 독자에게 ‘번역’하는 것은 첫걸음이지, 지향이 아니다. 그나마 자기계발서와 수험서의 홍수 속에서 인문서가 떠내려가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정희진 월간 오디오매거진 <정희진의 공부>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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