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적]잼버리가 국채보상운동인가
1997년 11월21일 오후 10시쯤 임창열 경제부총리가 굳은 얼굴로 “국제통화기금(IMF)에 200억달러 구제금융을 요청하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12월3일, 정부는 경제주권을 포기하는 합의문에 서명했고, IMF는 김대중·이회창·이인제 대선 후보에게까지 굴욕적인 협정 준수 각서를 들이밀었다. ‘경제신탁통치’라는 국난 회오리가 일상에도 몰아쳤다. 하지만 한숨만 쉴 시민들이 아니었다. 장롱에 숨겨둔 돌반지나 우승 메달을 내놓았다. 1998년 1~4월 석 달간 미국 자유의 여신상 무게와 같은 225t의 금이 걷혔다.
이 금모으기 운동은 구한말 국채보상운동의 ‘시즌2’로 평가받았다. 강요된 애국심이 없었다고 할 순 없지만, 위안부 피해 할머니·아이들·노숙인까지 나선 그 마음은 자발적 애국심이 채웠다. 반면 부유층 참여는 저조했다. 정부는 ‘국민의 과소비’를 외환위기 원인으로 지목했고, 교과서에도 그렇게 실었다. 국가 차원의 ‘장밋빛 경제’ 부도와 재벌 대기업의 탐욕이 일으킨 국난 책임은 슬그머니 사라졌다.
비극의 묵시록은 반복되는 걸까. ‘2023 새만금 잼버리’가 정부의 부실한 준비·운영 탓에 대형 참사로 전락했다. 윤석열 정부는 잼버리가 엉망진창되자 전 정부 책임론만 반복하고 있다. 이 와중에 금모으기 운동이 소환됐다. 박대출 국민의힘 정책위의장은 지난 7일 “금반지 정신으로 돌아가면 못할 게 없다”고 했다. 잼버리 참사가 국민 탓인가. 아니면 국가가 목표를 정하면 따르라는 권위주의 국가관이 미덕이라고 믿는 건가. 정부 무책임과 무능을 회피하는 것도 문제지만, 시민들의 자발성을 경시하고 모욕하는 건 더 큰 문제다.
망언은 계속됐다. 성일종 국민의힘 의원은 8일 “무너진 국격을 회복하기 위해 방탄소년단(BTS)이 잼버리 K팝 콘서트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국방부에 요청했다. 어이없다. 정작 사고는 정부가 쳐놓고, 잼버리 뒷수습은 ‘K팝’이 하라는 건가. “BTS가 모란봉악단이냐”는 젊은 세대 분노가 들리지 않는가. 세계인 속에 우뚝 선 K컬처를 관변단체로 치부하는 것 자체가 국가주의 틀을 벗지 못한 후진적 발상이고, 국격을 깎아내리는 일이다. 부끄러움과 참담함은 왜 늘 시민의 몫이어야 하나. 구혜영 논설위원
구혜영 논설위원 koohy@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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