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차별 범죄와 경찰 장갑차
[한겨레 프리즘][무차별 범죄]
[전국 프리즘] 이정하 | 전국부 기자
일상이 무너졌다. 지난달 21일 빠듯한 가정형편에 생활비를 아끼려고 값싼 원룸을 둘러보러 서울시 관악구 신림동을 방문했던 스물두살 청년은 일면식도 없던 조선(33)이 휘두른 흉기에 숨졌다. 그의 무차별 공격에 30대 남성 3명도 크게 다쳤다.
지난 3일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서현역 근처에서 남편과 함께 저녁식사를 하려고 집을 나선 64살 여성은 인도를 걷던 중 뒤에서 돌진한 승용차에 치여 중상을 입었다. 가족들은 실낱같은 희망으로 간절하게 기도했지만, 이를 뒤로한 채 사건 발생 3일 만에 숨을 거뒀다. 차량 돌진에 이어 근처 백화점에 뛰어들어 흉기 난동을 벌인 최원종(22)의 소행이었다. 그의 범행으로 1명이 숨지고 13명이 상처를 입었다.
10여일 사이 벌어진 두 사건의 피해자들은 하필 그날 그 시간 그 자리에 있었다는 이유로, 2000년대 초 이웃나라 일본에서나 등장했던 ‘거리의 악마’를 만나 무차별 범죄의 희생양이 됐다.
처지를 비관한 증오범죄를 저지른 조선이나, 사회가 나를 헤치려 한다는 피해망상에 사로잡힌 최원종의 범행에 우리 사회는 몸서리치고 있다. 대상을 특정하지 않고, 범행 동기도 구체적이지 않은 불특정 다수를 향한 무차별 범죄인데다 온라인에서 이를 모방한 ‘살인 예고’ 글까지 확산했기 때문이다.
세계에서 손꼽히는 치안 강국이라고 자부했던 대한민국은 이제 ‘국민 누구나 범죄의 표적이 될 수 있다’는 공포와 충격에 휩싸이고 말았다. ‘살인 예고’ 글 신고 건수만 7일 집계 기준 194건에 달했다. 검거된 67명 가운데 절반(34명)은 10대였다. 형사처벌을 받지 않는 만 14살 미만 촉법소년도 여럿 포함됐다. 10대들 사이에서 장난삼아 유행처럼 번지는 모양새다.
오죽하면, 지난 6일 저녁 8시30분께 지하철 9호선에서 방탄소년단(BTS) 영상을 보던 외국인들의 환호성에 놀란 승객들이 황급히 대피하는 소동이 벌어졌고, 대피 과정에서 다친 시민도 있었다. 흉악 범죄 등으로 오인한 112신고가 20여건 접수돼 경찰까지 출동했다. 길 가다 뒤가 서늘해 자꾸만 돌아보게 된다는 이들도 늘어나고 있다.
일상이 무너진 지금, 우리 사회의 안전 현주소를 보여주는 단적인 한 장면이다. ‘간접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평범한 시민들의 모습이다.
이런 사이 도심 한복판에는 소총과 권총으로 무장한 경찰특공대 전술요원(SWAT)과 장갑차가 등장했다. 경찰은 범죄 분위기를 조기에 진압하겠다며 지난 4일 사상 처음으로 ‘특별치안활동’을 선포했다. 통상적인 일상치안활동으로는 치안 유지가 어렵다고 판단한 것이다. 윤희근 경찰청장은 흉기 소지 의심자와 이상행동자 검문검색(불심검문) 및 총기 사용 등 정당한 경찰 물리력을 주저하지 말고 사용하라고 일선에 지시했다. 아울러 서울 강남역 등 43곳에 무장 경찰특공대 107명을 배치하고, 경기 수원역 등 11곳에는 장갑차까지 투입했다. 테러와 총기 난사, 인질극, 폭발물 처리 등과 같은 특수중범죄를 다루는 대테러 최정예 특수부대까지 동원된 것이다.
가능한 방법을 모두 동원해 무차별 범죄를 차단하는 것은 칭찬할 만하다. 국민 불안을 잠재우려고 강경 대응한 점을 참작하더라도, 흉기 난동을 예방하겠다며 총기와 장갑차로 중무장한 특수부대까지 투입하는 것이 적절했는지 의문이다. ‘참새 잡는데 대포 쏘는 격’ 아니냐는 지적이다. 강력한 총기 규제 국가에서 총기로 완전 무장한 공권력의 투입은 오히려 국민 불안을 자극하고, 위압감을 주지는 않을까 우려된다는 것이다.
경찰은 보여주기식 전시 행정을 지양하고, 경찰의 ‘과잉 대응’이 웬만한 사안은 놀이나 유행으로 여기는 10대들의 심리를 더욱 자극할 수 있다는 전문가들의 경고에도 주목해야 한다. 특수부대가 긴급 출동해야 할 상황에 제때 투입되지 않으면, 또 다른 치안 불안을 불러올 수 있다는 점도 간과해선 안 된다.
jungha98@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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