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허 속 살아남은 유일한 아파트, 생존자들은…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
현실적이라 누구나 공감할 이야기
‘매매가 7억원 24평형 구축 아파트’ 설정
어느 추운 겨울, 대지진이 온 세상을 집어삼킨다. 전기도 통신도 모두 끊긴 폐허 서울에 오직 한 건물, ‘황궁 아파트’만이 살아남는다. 생존자들은 살기 위해 이 아파트로 모여들고, 주민들의 신경은 날카로워진다. 구조대가 언제 올지 기약이 없는 가운데 주민들은 대표 영탁(이병헌)을 중심으로 뭉친다. 곧이어 ‘방역’이 시작된다. “아파트는 주민의 것”이므로.
9일 개봉하는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대지진 이후 황궁 아파트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재난 드라마·블랙코미디다. 지난 7일 서울 종로구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엄태화 감독은 “현실적이고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라고 소개했다.
엄 감독은 청년세대의 잉여 문화와 인정 투쟁을 다룬 <잉투기>(2012)로 주목받으며 데뷔했다. 배우 강동원 주연의 판타지 장르물 <가려진 시간>(2016)으로 첫 상업 영화에 도전했고, 7년 만에 세 번째 작품 <콘크리트 유토피아>를 내놨다. 그는 배우 엄태구의 형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영화는 웹툰 <유쾌한 왕따>의 2부인 <유쾌한 이웃>을 원작으로 한다. 1부가 대지진으로 무너진 학교 지하실에 중학생들이 갇히며 벌어지는 이야기라면 2부는 이들이 탈출에 성공해 황궁 아파트로 오며 펼쳐진다.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이들이 아파트로 오기 전, 재난 직후의 상황을 그린다. 정확히는 2부의 프리퀄인 셈이다.
엄 감독은 배경이 아파트라는 점에서 원작에 끌렸다. “아파트는 한국 사회를 보여주기 좋은 배경입니다. 저도 아파트에 살았고, 한국인 절반이 아파트에 사니까 쉽게 공감할 수 있는 현실적인 이야기가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영화의 제목은 박해천 동양대 교수가 쓴 동명의 저서(2011)에서 따왔다. 원작과 구별되는 개성을 드러내는 대목이기도 하다. “웹툰은 아파트가 배경일 뿐이라면 영화에서는 핵심적인 키워드예요. 살아남은 아파트가 처음엔 유토피아처럼 보이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바깥보다 더 디스토피아적인 곳으로 변해가거든요. 이 과정을 보여주기에 이만한 제목이 또 있을까 싶었습니다.”
아파트가 또 다른 주연인 영화인 만큼 아파트의 시각적 구현은 가장 신경을 많이 쓴 부분 중 하나다. 영화 속 황궁 아파트의 모습은 1970~1980년대 지어진 복도식 아파트의 전형이다. 엄 감독은 ‘매매가 7억원쯤 되는 24평형(80㎡) 구축 아파트’로 설정했다. 한국의 어느 도시에서나 쉽게 볼 수 있을 법한 외관의 아파트를 위해 실제 재개발 단지에 버려진 문짝이나 우편함, 화단 같은 소품을 가져왔다. “실제 아파트에서 찍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어요. CG(컴퓨터그래픽)를 하더라도 판타지처럼 보이지 않게, 여기가 한국이라는 실제감을 주려고 애를 많이 썼죠.”
한국 아파트의 역사를 보여주는 영화의 오프닝은 영화에 실재감을 불어넣는다. 엄 감독은 KBS의 아카이브 프로젝트 다큐멘터리 <모던코리아>팀의 도움을 받아 첫 장면을 완성했다. “한국에 처음 아파트가 들어서고 지금의 브랜드 아파트가 생기기까지 과정이 이 영화의 세계관이라고 봤어요. 그걸 관객이 짧게나마 경험한 뒤 영화를 보면 훨씬 재밌을 것이라고 생각했죠.”
‘바퀴벌레’ 같았던 외부인들을 쫓아낸 황궁 아파트 주민들은 자신만의 유토피아를 만들어나간다. 인근 브랜드 아파트 ‘드림 팰리스’에 열등감을 느꼈던 주민들의 얼굴은 이제‘우리 아파트는 선택받았다’는 자부심으로 상기된다. “살인범이나 목사님이나 지금 똑같애. 이제는 위아래 없어요. 다 평등해진거라고. 리셋된 거지.” 영화는 부녀회장 금애(김선영)를 비롯한 등장인물들의 입과 행동을 통해 관객에게 쓴웃음을 선사하는 한편 ‘아파트란 무엇인가’를 묻는다. 관객들은 자연스레 집값 문제나 부실 공사, ‘평등하지 않은 세상’을 꿈꾼다는 강남의 한 아파트 광고 같은 관련 이슈를 떠올린다.
한국 사회 속 아파트의 의미, 인간의 이기심 등 묵직한 이야깃거리가 풍성한 영화지만 엄 감독의 제1목표는 오직 ‘재미있는 영화’를 만드는 것이었다.
“어떤 주제나 메시지를 던지기보다 ‘재밌어서 시간 가는 줄 몰랐다’는 말을 가장 듣고 싶어요. 특정 인물에 이입해 그가 겪는 사건을 같이 경험하고 선택하고 고민하는 게 재미이자 몰입이죠. 그러지 않으면 극장을 나와 ‘누구는 싫고 누구는 이해되더라’는 이야기도 안 하게 되니까요.”
엄 감독은 극한의 한파가 배경인 <콘크리트 유토피아>로의 ‘피서’를 권했다. “외피만 보면 버석하고 답답할 것 같지만 시원한 영화입니다(웃음).”
러닝타임은 130분. 15세 이상 관람가.
최민지 기자 ming@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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