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경춘추] 몰라야만 보이는
1970~1980년대 어린 시절을 보낸 독자라면 '게임북'이라 불리던 이야기 책을 기억할 것이다. 게임북은 작가가 정한 경로를 그대로 따르는 대신 독자가 주인공이 되어 여러 갈래의 사건 경로 중 하나를 골라 과정부터 결과까지 직접 결정하는 게임적 구조로 전 세계 어린이 독자들에게 큰 사랑을 받았다. '당신의 모험을 선택하세요'는 작가 에드워드 패커드(E Packard)와 출판인 몽고메리(R A Montgomery)가 만든 최초의 아동용 게임북 시리즈다. 패커드의 초고는 1969년 완성되었는데, 그는 문학 전공자도 전문 작가도 아닌, 퇴근 후 자녀들과 책 읽기를 즐기는 변호사이자 다둥이 아빠였다. 다만 그는 아이들이 이야기에 몰입하면 작가의 글을 벗어나 제 상상대로 인물과 사건을 만든다는 것을 관찰과 경험을 통해 발견한 사람이었다. 그는 아이들에게 책은 놀이 세계로 진입하는 문이라고 생각했고, 아이들이 노는 방식 그대로를 서사 구조로 만들어 첫 에피소드를 창작했다.
하지만 출판계 반응은 냉담했다. 경험 많은 이들은 서툰 아마추어 작가의 원고를 거절하며 이야기의 선택권은 작가에게 있고, 출판은 작가가 완성시킨 이야기를 책으로 만드는 것이라는 조언을 보탰다. 패커드의 원고는 무려 5년이 지나, 문제적 작품의 가치를 알아본 출판가 몽고메리에 의해 비로소 세상에 소개될 수 있었다. 업계 관점에서 보면 몽고메리도 뭘 모르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는 혁신적인 아동 콘텐츠 개발을 목표로 하는 신생 출판사의 대표였지만, 1960년대부터 창업 직전까지 비디오 게임 연구개발자로 일했고, 출판이나 문학과 관련한 경험은 없는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문학계와 출판계의 굴러온 돌은, 박힌 돌이 이해 못할 모험을 시작했다. 두 사람에게 이야기 놀이의 주인공인 아이들에게 이야기를 이끌어 갈 주도권이 없다는 것은 당연한 게 아니라, 이상한 일이었다. 그들은 뭘 잘 몰랐다. 뭘 잘 몰랐기 때문에 어린이 독자들이 제대로 보였다. 어린이들에게 이야기는 침묵의 독서보다 신나는 놀이였고, 책은 장난감이라는 사실을 인정했다. 둘은 몰라야만 보이는 눈으로 서로를 알아보았다. 두 사람의 게임북은 출판과 동시에 세계적 베스트셀러 반열에 올랐고 비디오 게임, 인터랙티브 픽션 등 다양한 디지털 서사의 원형적 형식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이해 못할 낡은 관행들이 있다. 처음에는 합당한 이유가 있었겠지만 이제는 전부터 그래서라는 답만 남아, 결국 위험한 부메랑이 될 것들. 무감각한 반복은 일의 핵심을 가리고 진짜 문제, 이유, 주인공을 놓치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을 제대로 보려면, 몰라야 보이는 눈을 떠야 한다. 어린이들에게 집중했고, 어린이들이 사랑하는 이야기와 놀이까지 어린이들의 눈으로 사랑한, 뭘 몰랐던 두 사람처럼 말이다. 패커드와 몽고메리는 책과 작가가 이야기 세계를 자유롭게 탐험하는 어린이들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몰랐다. 익숙한 눈을 의심하자. 익숙한 눈부터 의심하자. 몰라야만 보이는 눈은 감고, 보는 데 방해만 되는 안경을 쓰고 있는 누군가가 보일 것이다.
[권보연 인터랙티브 스토리 디자이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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