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현덕칼럼] 폭염, 태풍 그리고 잼버리
응원과 화합의 축제로
반전시킬 수도 있었는데…
상상력 부족이 아쉽다
새만금 잼버리에 비난과 조소가 쏟아지고 있다. 청소년들이 난민 체험을 방불케 하는 생활을 한다고 비난하고 K드라마 '오징어 게임'에 빗대 '생존 게임'이란 조소로 대한민국을 희화화한다. 급기야 태풍이 온다며 텐트를 접고 뿔뿔이 흩어지는 스카우트 대원들. 오비이락인가. 폐영식에 참석하기로 했던 안제이 두다 폴란드 대통령의 방한 계획 취소까지.
수백 가지 잘못과 준비 부족을 들춰내고 관계자들의 비위와 모럴해저드를 파헤치며 국가 시스템이 마비된 정황과 증거를 밝히는 언론들의 대공세가 이어졌다. 늘 그렇듯이 결론은 하나로 수렴된다. "위험을 경고했는데도 이를 무시한 예고된 인재(人災)였다"고.
부인할 순 없으나 듣기 거북하다. 이렇게 될 줄 미리 알았다고 잘난 체하는 게 얄밉고, 정말로 미래를 내다보는 혜안이 있었다면 그걸 막기 위한 책임 있는 행동은 왜 없었느냐고 되묻지 않을 수 없다. 위선이고 무책임이다.
내가 아쉬워하는 대목은 다른 데 있다. 이른바 최선의 수비는 최선의 공격. 아예 최악의 환경을 전제하고 이를 정면 돌파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점이다. "청소년 여러분! 이곳 새만금은 바닷물을 막아 만든 간척지입니다. 여러분이 머무는 동안 날씨는 몹시 덥고 습할 겁니다. 태풍이 올지도 모릅니다. 오히려 우리 모두 인류 공동의 이슈인 기후변화에 적응하는 해법을 모색하면 어떨까요?" 이렇게 호소했으면 말이다. 그게 스카우트 본연의 도전과 협동정신에도 부합되는 거 아닐까.
더위는 이제 참고 견디면 되는 상황이 아니다. 폭염을 자연재난으로 포함시킨 2018년 이후 행정안전부가 집계한 통계에 확연히 나타난다. 4년간 폭염으로 인한 인명 피해는 총 146명으로, 폭설·호우·태풍 등을 합친 숫자의 두 배나 된다. 5년 전 에릭 클라이넨버그는 이 분야의 고전으로 알려진 '폭염사회'란 저서에서 이렇게 고발한다. "사람들은 TV 화면을 통해 볼거리를 제공하는 재난에만 관심을 기울인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합해도 폭염의 위험을 넘어서지 못한다. 폭염은 소리 없이 다가오는 죽음의 사신"이라고.
기후변화와 관련해 우리는 온실가스를 줄여야 한다(mitigation)는 얘기만 하지 폭염사회에 적응(adaptation)하기 위한 구체적인 조치들에 대해선 둔감하다. 예를 들어 이런 것이다. 폭염으로 인한 열사병을 예방하는 가장 기본적인 요소는 물, 그늘, 휴식이다. 상식이다. 그런데도 이번 잼버리에서 폭염 사고 예방을 위한 과학적이고 구체적인 액션플랜은 없었다. 또 우리는 대부분 수은주가 가리키는 온도를 지표로 삼는다. 그러나 기온보다 더 중요한 건 습도. 물에 적신 천으로 감싼 온도계로 측정하는 소위 습구온도(Tw)라는 게 온열질환엔 직격탄이다. 습구온도 35도는 생존의 한계온도다. 하나 더 있다. 복사열과 관련된 흑구온도(Tg). 이 역시 가중치가 보통의 온도계로 측정하는 건구온도(Td)보다 높다. 이렇게 세 가지를 합쳐 개발한 게 온열지수(WBGT). 미국 국방부가 병사들의 야외훈련을 위해 고안한 지표다. 새만금에 이런 기후 과학은 없었다.
100년이 넘는 역사를 지닌 세계 잼버리 대회. 국가와 민족, 이념을 초월해 전 세계 청소년들이 협력하고 우애를 다지는 야영 행사가 이렇게 마무리되는 게 안타깝다. 비난과 조소를 응원과 화합으로 대전환할 수도 있었는데. 지구촌 젊은이들이 기성세대를 향해 "우리는 폭염과 태풍을 극복했다"고 외칠 수도 있었는데. 왜 그런 상상력은 없었을까?
오늘도 광화문 한복판에 38초 분량의 새만금 잼버리 홍보 영상이 돌아간다. "짜릿한 모험, 새로운 도전, 희망 그리고 꿈. 전 세계 청소년이 하나 되는 축제." 그 홍보 영상이 부끄럽다. 나 역시 부끄럽다. 위선적이고 무책임하다는 비난에서 자유롭지 못한 줄 알면서도 이런 글을 내보내는 게.
[손현덕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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