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KT 새로운 대장’ 송영진 감독, 고진감래 선수 생활···감독 생활은?

최서진 2023. 8. 8.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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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프볼=최서진 기자] 수원 KT가 새 출발에 나섰다. KT는 지난해 KBL컵 우승으로 상쾌하게 출발했지만 정작 정규리그 후에는 힘을 쓰지 못했다. 결과는 정규리그 8위. 플레이오프 탈락의 성적표를 들어야만 했다. 자고로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하는 법. 체질 개선을 원한 KT는 새 감독 선임에 나섰고 송영진 수석코치를 새 감독으로 선임했다. 감독으로서 새 출발선에 선 그는 어떻게 준비하고 있을까? (인터뷰는 7월 6일에 진행됐습니다.)

※본 기사는 농구전문 매거진 점프볼 8월호에 게재됐습니다.

苦盡甘來: 고진감래

송영진 감독은 중앙대 선수 시절 DB 김주성 감독과 트윈타워로 무적 시대를 열었다. 대학 시절의 활약을 바탕으로 2001 드래프트 1라운드 1순위의 영예를 안고 창원 LG 유니폼을 입었다. 그러나 프로에서는 시련뿐이었다. 맞지 않는 옷을 입었고, 고비의 연속이었다. 2005년 KT로 이적한 뒤에야 희망이 보였다. 기량발전상(2005-2006시즌)을 받고, 국가대표에 차출되면서 대기만성했다. 고진감래와 같은 선수 생활이었다.

오프시즌을 어떻게 보내고 있나?
이제 5주 차다. 몸만들기가 끝나면 전지훈련을 가서 볼 훈련도 시작하려고 했는데, 일정이 여의치 않아서 여기서 훈련하고 있다. 대신 일주일에 두 번 트랙에 나가서 체력 훈련하고, 웨이트 트레이닝도 하고, 오후에 볼 운동하는 식으로 진행하고 있다.

트랙 훈련 때 쓴 대장 모자는 어떻게 쓰게 됐나?
휘문고 제자들이 생일에 선물해줬다. 받았을 때 웃겼다. 처음 트랙 훈련을 나갈 때 쓰고 나갔다. 힘든 거 아니까 한 번이라도 웃고 뛰라는 의미였다. 선수들도 막 웃더라.

감독이 된 과정을 설명한다면?
여러 후보군에 내가 포함됐었던 것 같고, 위에서 좋게 평가해 주셔서 선택받은 것 같다.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고, 이에 보답하기 위해서 열심히는 당연하고 좋은 성적을 내야 한다. KT 소속으로 선수 생활을 오래 했지만, 챔피언은 해보지 못했다. 정규리그 1위, 2위까지는 해봤으나 플레이오프 우승은 없기에 아픔을 씻어내고자 한다.

감독 제의를 받고 든 생각은 무엇이었나?
사실 이야기를 듣기 전까지 기다림이 길어서 답답한 심정이었다. 되고 나니 어떻게 팀을 꾸릴 것인지만 생각했다. 코치 선임부터 FA(자유계약선수), 외국선수까지 생각할 것이 많았다.

중앙대 무적 시대 열었던 DB 김주성 감독과 같은 해에 감독이 됐다. 연락을 나눴나?
서로 축하한다, 앞으로 잘해보자고 연락을 나눴었다. 둘 다 처음 감독을 맡았기에 잘해야 한다는 대화를 했었다. 종종 만나기도 하지만 고민을 나누지는 않는다(웃음). 이제 적절한 거리가 필요하다.

김주성 감독과 함께했던 중앙대 트윈 타워 시절은 어땠나?
그때는 서울에서 모든 경기를 했었는데 자신감이 넘쳤다. 결승전을 치러야 하는 상황이면 아예 짐을 다 싸 들고 올라갔다. 이기고 바로 회식하고 특별휴가까지 생각한 그림이었다. 아무도 다시 안성으로 내려간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웃음). 당시 (김)주성이와 나는 서로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코치이자 라이벌이었다. 그런 관계와 함께하는 과정이 좋았다. 프로에 와서는 주성이가 독보적으로 잘했기에 시기와 질투가 나기도 했지만, 장점을 배우려고 했었다.

1라운드 1순위로 창원 LG에 입단했는데, LG는 어땠나?
팀에서 벌크업하기를 원했다. 나도 마른 몸이 싫었다. 훈련 중간 간식을 챙겨 먹으며 벌크업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과부하가 와서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팀은 좋았지만, 개인적으로 힘든 시기였던 것 같다.

살이 잘 찌지 않는 체질인가?
맞다. 식욕도 없다. 마른 사람들 특징 있지 않나. 모든 영양소를 섭취할 수 있는 알약 하나가 있었으면 하고 바랄 정도였다(웃음). 약 하나 먹고 땡 하면 얼마나 좋을까 라는 생각을 선수 시절에 정말 많이 했었다.

2004-2005시즌 중반 두 번이나 맹장 수술을 받았다고 알고 있다.
스스로 전환점을 만들려고 했고 출전 시간도 많았다. 그러나 시즌 중에 맹장 수술을 받게 됐다. 수술이 잘됐다고 하길래 ‘감사합니다’ 하며 빨리 퇴원할 수 있게 해달라고 얘기했다. 다른 사람은 3, 4일 만에 퇴원하는데 나는 계속 아프더라. 재수술도 하고, 항생제도 많이 맞으니 10kg가량이 순식간에 빠지더라. 우여곡절 끝에 퇴원하고 집에서 쉬고 있는데, 외국선수가 부상을 당했다고 빨리 올라오라는 전화를 받았다. 2, 3경기 뛰었나. 빠지는 게 나을 것 같다고 판단했고, 당시 코치님도 그러라고 하셔서 시즌을 먼저 마쳤다.

힘든 순간에 버틸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이었나?
부모님이다. 계속 선수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뒷바라지를 다 해주셨다. 그러나 내가 힘들 때 어머니께 잘 해드리지 못했다. 그때는 못난 아들이었다. 감독이 되고 나서 어머니가 좋아하셨다. 근데 바로 조언이 들어오더라(웃음). ‘이렇게 하면 안 된다, 저렇게 하면 안 된다’고 하시니 나는 ‘예. 알겠습니다’라고 답했다.

2005-2006시즌을 앞두고 현주엽의 보상 선수로 부산 KTF(현 수원 KT)로 가게 됐다.
전 시즌을 잘 마무리하지 못했기에 마음도 안 좋았고, 몸도 안 좋았다. 그렇게 휴가를 보내고 있는데 추일승 감독님의 전화를 받았다. 목소리를 듣는 순간 미소가 지어졌다. 나에게는 변화가 간절하게 필요했던 순간이었기에 정말 감사했다. 새로운 마음으로 다시 시작했다. KT의 분위기가 굉장히 좋았던 걸로 기억한다. 뭔가 모두 하나로 모이는 느낌이었다. 형들도 정말 잘해줬다. 내 마음가짐도 달랐고, 팀 분위기도 물 흐르듯 좋아서 좋은 성적을 내기도 했다.
선수 시절 3차례 등번호를 바꾼 이유는 무엇인가?
이것도 변화의 한 종류다. 원래 23번을 계속 달았는데, 2003년에 마이클 조던이 은퇴했다. 농담으로 ‘조던이 은퇴해서 잘 안 풀리나?’라는 생각이 들더라. KT 이적 후 다른 번호를 찾았다. 3번이 앨런 아이버슨이고 8번이 코비 브라이언트라 합쳤다. 마침 삼팔광땡이라 38번을 달았다. 계속 번호를 유지하려 했는데, 전창진 감독님과 김승기 감독님이 코치로 오셨다. 코치님이 내 번호가 너무 무겁다고 하시더라. 그래서 또 고민했다. 결혼도 했고, 아이도 있었는데 관련해서 2가 들어가더라. 그래서 2번으로 바꿨다. 덕분인지 빨리 재활도 마쳤고, 정규리그 2위도 했다(웃음).

‘송영진호’ 출발!
송영진 감독은 은퇴 후 KT 코치로 지도자 생활을 시작해 연세대 코치, 휘문고 코치를 거쳐 지난 시즌 다시 KT 코치로 돌아왔다. 조동현 감독과 했던 지도자 첫걸음은 좋지 못했다. 코칭스태프가 전부 초보여서 좋은 성적을 낼 수 없었다. 초보 감독이 된 지금, 그를 기다리는 건 쓴맛일까 아님 단맛일까. 송영진호가 KT 첫 챔피언을 위해 닻을 올린다.

계약 1년을 남기고 은퇴해 KT에서 코치로 지도자 생활을 시작했다.
고민하다가 조동현 감독님과 같이 시작하게 됐다. 좋은 성적을 내지는 못했지만, 선수들과 소통이 굉장히 중요하다는 것도 배우고 직원들의 이야기도 귀 기울 필요가 있다는 걸 배웠다.

KT 코치 이후 미국으로 갔는데?
연수라기보다는 경험이었다. 쉬는 기간에 여러 농구 스타일도 접해보고, 가족과 시간을 보내려고 갔다. 지인 통해서 고등학교, 대학교, 프로 경기도 다 봤다. 내린 결론은 그전과 똑같았다. 농구를 잘 가르치는 것도 중요하지만, 감독이라면 선수를 확 집중시킬 수 있는 카리스마와 보듬을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이후 연세대와 휘문고 코치를 거쳤는데?
휘문고 코치는 1월 1일에 합류한 터라 시기가 늦어 전지훈련도 못 갔다. 체육관에서 훈련하고 있는데 갑자기 코로나19가 터졌다. 3인 이상 사적모임 금지였을 때는 시간을 나눠 훈련했다. 아침부터 밤 7시까지 개인 교습을 했다(웃음). 결국 대회 한 번 못 나갔다. 다음 해는 추계 대회지만, 우승하기도 했다.

지난 시즌 KT 코치로 돌아와서 하윤기의 성장을 만들었다.
터프하게 스타일도 바꾸고 슛도 교정했다. 개인 운동할 때 꽤 힘들었을 거다. 진짜 안 좋으면 얘기하라고 했는데(웃음) 쉬지도 않고 열심히 따라왔다. 능력이 있고 착실하게 했으니 성장한 것 같다. 시즌을 치르며
늘었다는 평가를 들으니 더 열심히 하더라.

사자가 하는 선택
송영진 감독이 가진 가치관은 이렇다. 따끔하게 야단치고 소리 지를 수는 있지만, 인신공격과 비교를 하지 않는 감독. 코치의 이야기와 사무국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감독. 결단을 내리는 위치인 만큼 신중하게 선택하는 감독. 지금도 송영진 감독은 외국선수를 선택하기 위해 하루에도 몇 번씩 코치들에게 찾아가 A가 나은지, B가 나은지, C가 나은지 물어본다. 또한 사자 모양에 ‘CHOICE’라 적힌 작은 동상을 컴퓨터 앞에 두고 옳은 판단인지 고민한다.

김영환 코치랑 선배-후배, 코치-선수, 감독-코치까지 관계의 변화가 많았다. 김영환 코치가 후배였을 때 “과묵하고, 포스가 있어서 무서웠다”고 말한 적 있다.
다들 무서워하더라. 눈이 나빠서 항상 인상을 쓰고 다녔다. 나는 눈이 안 좋은 줄도 몰랐다. 이후 라섹을 했지만 분위기가 굳어진 상태였다. 또 주장이고 선배다 보니 잔소리도 많이 했다. (김)영환이가 그런 모습을 봐서 무섭다고 느끼지 않았을까(웃음). 근데 지내다 보면 그렇게까지 무서운 사람은 아닌데(웃음). 영환이는 신인, 고참, 지금까지 큰 변화가 없다. 꾸준하고 성실하게 잘하는 친구다.

감독으로서 선수들을 다시 만났을 때 어떤 이야기를 했나?
훈련 마치고도 이야기 잘 안 할 건데, 처음이니 한마디만 하겠다며 운을 뗐다. ‘큰 조직이든, 작은 조직이든 보이지 않는 룰은 존재한다. 룰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자’고 말했다. 음주나 도박 이런 것은 물론이고 농구선수로서 돈을 벌고 있으니 예의를 지키라고 했다. 코트 위에서 설렁설렁 다니고, 팬에게 잘못하는 것도 다 농구의 이미지를 망치는 거니 그러지 말라고 했다.

선수 송영진, 코치 송영진, 감독 송영진은 각각 어떤 느낌이었나?
선수 때는 항상 최선을 다했다. 엄격한 선배 같은 느낌이었지만 괴롭히거나 때리지는 않았다. 코치 때는 선수의 얘기를 많이 듣고, 보듬으려고 노력했다. 물론 야단을 치긴 했지만. 감독은 이제 시작이니 표현하기가 어렵다. 잘 이끌고, 좋은 성적을 받아서 선수들이 인정하는, 잘 따르고 싶은 감독이 되도록 노력할 거다.

# 사진_점프볼 DB(박상혁 기자), 수원 KT 유튜브 캡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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