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대 혐의 내용 다 빼라더니…국방부 “초급 간부 혐의 따져야” 뒤늦은 항변
군 이첩보고서 양식엔 ‘죄명’ 적시하게 돼 있어
국방부 대변인 “혐의 인과관계 없으면 안 써도 돼”
사단장 ‘과실치사’ 정황 보도되자 ‘초급 간부 보호’로 선회?
국방부는 채수근 해병대 상병 순직 사건에 대한 해병대 수사단(군사경찰)의 수사보고서에서 책임자와 혐의 사실을 제외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실제 보고서 양식에는 이런 내용을 적는 칸이 있는 것으로 8일 확인됐다. 국방부는 이날 “사람과 혐의 사실 사이에 상당한 인과관계가 없으면 범죄 혐의를 적시하지 않아야 한다”며 초급 간부들에게 과실치사 혐의를 적용할 수 있는지 따져봐야 한다고 새롭게 주장했다.
전하규 국방부 대변인은 이날 정례 브리핑에서 “훈령상 (경찰에) 사건을 이첩할 때 일정한 양식에 의해서 (보고서를 작성)하게 돼있다”며 “그런데 범죄 혐의를 적시할 때는 상당하고 직접적인 혐의가 입장돼야 한다.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해당 인원도, 그 해당 인원에 대한 범죄 혐의도 적시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다.
국방부 ‘법원이 재판권을 가지는 군인 등의 범죄에 대한 수사절차 등에 관한 훈령’에는 군검사 혹은 군사경찰이 사건을 이첩할 때 작성해야 하는 인지통보서 양식이 첨부돼 있다. 피의자와 죄명, 범죄 사실 등을 적는 공간이 양식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그동안 국방부는 해병대 수사단의 보고서에서 혐의 사실 관련 내용을 삭제해야 한다는 게 법적 검토 결과라는 입장이었다. 혐의 내용 삭제 지시의 제도적 근거가 무엇이냐는 지적이 이어지자 이날 ‘사람과 혐의 사이의 인과관계’라는 새로운 쟁점을 공개적으로제시한 것이다. 혐의 사실을 전부 삭제해야 한다는 기존 주장을 뒤집고 혐의가 불명확한 경우만 삭제해야 한다는 취지로 읽힌다.
혐의 사실이 불명확한 사람은 초급 간부라는 주장도 공개 석상에서 처음 등장했다. 전 대변인은 “말씀드리는 게 적절한지 모르겠지만 (적시된 인원) 거의 절반이 하급 간부 또는 초급 간부들”이라며 “그 현장의 작전을 같이 했던 초급 간부들이 범죄 혐의자로 적시돼 있다. 그들의 업무상에 어떤 과실이 있었는지 모르겠으나 국방부 법무관리관실은 그것이 범죄 혐의와 상당하고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지를 따져봐야 한다는 것”이라고 했다.
이는 군 안팎에서 제기된 그간의 주장과는 상반된다는 지적이 나온다. 해병대 수사단 보고서에는 해병대 1사단장을 비롯해 총 8명의 과실치사 혐의가 담겨있는데 복수의 군 관계자는 국방부 혹은 그 ‘윗선’에서 사단장과 같은 고위 직급은 제외해야 한다는 인식을 갖고 있었다고 주장했다. 이와 관련한 언론 보도도 일주일 넘게 이어져 왔다. 국방부가 이날 브리핑에서 뒤늦게 초급 간부의 처우를 주장했다는 지적에 국방부 관계자는 “직위고하를 막론하고 혐의 사실을 따져봐야 한다는 입장에 변함이 없다”고 반박했다.
전 대변인은 “경찰이 완벽하게 수사할 것이고 사건 기록에 대해 경찰이 수사를 할 것”이라고 했다. 혐의 사실을 적시하면 경찰 수사에 영향을 줄 수 있으므로 모두 빼야 한다던 입장과도 다소 결이 다르다.
매일 조금씩 바뀌는 국방부의 해명에 신빙성이 부족하다는 지적은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국방부의 기존 주장처럼 보고서에서 혐의 사실만 빼면 되는 일이라면 군 검찰이 민간경찰에서 사건을 회수한 지 일주일이 되도록 경찰에 재이첩하지 않는 이유가 설명되지 않는다. 전날 전 대변인은 “추가적으로 법적 검토를 해야 할 사항이 남아있기 때문”이라고 밝혔고, ‘남은 검토 쟁점이 무엇이냐’는 질문에는 “나중에 말씀드릴 기회가 있을 것”이라고 즉답을 피했다. 그러나 이날 갑자기 ‘사람과 혐의의 인과관계’를 강조하면서 초급 간부를 보호해야 한다는 취지의 입장을 취했다. 언론에서 1사단장의 과실치사 혐의를 입증하는 정황이 다수 보도되자 국방부가 초급 간부를 보호하는 입장으로 급선회한 것 아니냐는 의혹도 제기된다.
민간경찰로부터 사건을 회수한 국방부 검찰단은 해당 사건을 국방부 조사본부, 즉 군사경찰로 넘기는 방안도 검토 중이다. 조사본부로 넘어가면 해병대 군사경찰이 수사한 사안을 국방부 군사경찰이 다시 넘겨받는 모양새가 된다. 다만 국방부는 군 검찰이 전 대변인은 “결정된 건 없다. 아직 장관에게 보고되지 않았다”고 했다. 경북경찰청에 이첩하는 시기가 이번 주를 넘기지는 않을 것이라던 국방부 기존 입장과는 달리 시기가 많이 늦어질 가능성이 있다.
해병대는 국방부의 경찰 이첩 보류 지시를 어겼다는 이유로 보직 해임된 해병대 수사단장 A 대령에 대한 보직해임심사위원회를 이날 열고 A 대령의 보직 해임을 의결했다.
앞서 해병대 수사단은 지난달 30일 이종섭 국방부 장관에게 수사 결과 보고서를 보고해 결재를 받았다. 1사단장 등 8명의 과실치사 혐의가 적시됐다. 이튿날인 31일 이 장관은 해병대 측에 수사 결과 이첩 보류를 지시하고 국외 출장을 떠났다. 국방부 법무관리관실이 지난 1일 보고서에서 모든 혐의 사실을 삭제하라고 요구했다는 것이 A 대령 측 주장이다. A 대령 측은 이 장관의 이첩 보류 명령이 담긴 문서가 존재하지 않고 혐의 사실 삭제는 이 장관 명령이 아니어서 지난 2일 민간경찰에 사건을 이첩했다. 국방부 검찰단은 이를 군기 위반으로 보고 같은 날 경찰로부터 사건을 회수했고, 해병대사령관은 A 대령을 보직 해임했다. 국방부 검찰단은 A 대령을 ‘집단항명 수괴’ 혐의로 입건하고, 해병대 수사단을 압수수색했다.
유새슬 기자 yoos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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