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L 최초 득점‧3점슛‧리바운드, 이상범의 도전은 계속된다
'덕장과 맹장의 모습이 공존하는 지도자', 이상범(54‧184cm) 전 원주 DB 감독을 가리키는 수식어다. '찐빵맨'이라는 애칭에서도 알 수 있듯이 둥글둥글 편안한 외모에 사람 좋은 웃음을 짓고 있는 얼굴을 보고 있노라면 마냥 성격 좋은 삼촌같다. 하지만 그렇기만 했다면 농구인 이상범은 정글과도 같은 농구판에서 지금까지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기본적으로 ‘좋은게 좋은거다’는 마인드를 가지고 있는 그이지만 본인이 아니다 싶을 때는 뚝심도 장난 아니며 감춰두었던 열혈남아의 카리스마를 뿜어내기도 한다. 2003년 안양 SBS 코치 시절 심판진과의 마찰 이후 선수들을 코트에 내보내지 않아 몰수패를 선언 당했던 사건이 대표적이다. 당시 사건은 여러 가지 파장을 불러일으키며 지금까지도 아찔했던 순간으로 기억되고 있다.
이상범하면 떠오르는 또다른 것은 유달리 ‘첫번째’와 인연이 깊다는 부분이다. 다른 이들 같으면 하나도 있을까 말까한 것들을 꽤 많이 가지고 있다. 이상범은 현역 시절 이른바 스타플레이어와는 거리가 멀었다. 무난한 실력을 갖춘 선수로 나름 제몫은 해주었지만 공격, 수비 어느 한쪽에서도 눈에 확 띌 만큼 대단한 행보를 보이지는 못했다.
하지만 상당수 기록의 중심에 그의 이름이 선명히 남아있다. 가장 유명한 것은 역시 KBL 최초 득점자 기록이다. 프로 원년 개막전 인천 대우증권 제우스와의 경기에서 3점슛을 성공시키며 최초 득점, 3점슛 기록을 동시에 썼다. 거기에 최초 리바운드 기록까지 가지고 있다. 1호의 상징성을 감안했을 때 프로농구가 존재하는한 두고두고 회자될 기록이다.
”운이 참 좋았습니다. 어찌보면 별로 대단하지도 않은 선수였는데 때마침 그때 찬스가 나서 슛을 던졌고 1호 기록으로 남을 수 있었다는 것이 지금 생각해도 신기합니다. 덕분에 두툼한 훈장을 하나 달 수 있었습니다. 오랜시간 지도자 생활을 하면서 잠시 잊고 살았는데, 다시금 언급해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개인적으로도 정말 좋은 추억이라고 할 수 있죠“
잘 알려져 있다시피 이상범은 대전 토박이다. 대전에서 태어나 초중고를 모두 대전에서 다녔다. 당시 대전중‧고 출신을 농구계에서 보기 힘들던 시절이다. 이상범은 연세대까지 진학하며 이른바 길을 만들어내고 김훈, 조상현, 조동현 등 후배들의 행보에도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줬다. 대전고 출신중 프로팀 지도자, 국가대표 감독 등을 역임한 이는 이상범이 최초다.
그 외에도 이상범의 1호, 최초 기록은 더 있다. KBL 최초 프랜차이즈 출신 지도자다. 이상범은 안양 SBS에서만 선수 생활을 했으며 이후 자신이 현역 시절을 보낸 팀에서 코치, 수석코치, 감독대행, 감독 모두를 경험했다. 코로나 19로 인해 조기종료된 2019~20시즌에는 SK와 공동 1위를 기록했는데 이는 KBL 최초이자 유일한 사례로 남아있다.
지난 시즌 도중에 DB 사령탑을 자진사퇴한 그는 잠깐의 야인 생활 이후 새로운 무대에 도전한다. 일본 B2.리그행이 그것으로 이상범은 고베 스토크스에서 지도자 커리어를 이어나가게 된다. 1984년생 젊은 사령탑 모리야마 토모히로 감독이 지휘봉을 잡고 있는 고베는 경험이 풍부한 코치를 필요로 하여 영입 의사를 제안했고 이상범은 고심 끝에 이를 받아들였다. 국내 남자 농구인이 일본리그에 지도자로 진출하는 사례는 이상범이 최초다.
◆ 이상범 정규리그 통산기록 ☞ 통산 66경기 출전 평균 4.5득점, 0.9리바운드, 1.1어시스트, 0.5스틸
⁕ 정규리그 한경기 최다기록: 득점 ☞ 1997년 3월 21일 대전 현대전 = 19득점 / 3점슛 성공 ☞ 1997년 3월 21일 대전 현대전 = 5개 / 어시스트 ☞ 1997년 2월 23일 수원 삼성전 = 6개 / 리바운드 ☞ 1997년 2월 23일 수원 삼성전 = 5개 / 스틸 ☞ 1997년 3월 29일 광주 나산전 = 4개
“과거 경력은 싹 잊고 새로 도전한다는 마음으로 시작할 생각입니다”
Q.요즘 어떻게 지내세요?
언론을 통해 알려진 것처럼 일본에 코치로 가게 됐잖아요. 비자문제 등 이것저것 준비하고 있어요. 몇 달 쉬었으니 다시금 마음 다잡고 열심히 한번 해봐야죠. 제가 필요해서 불렀을 것 아니에요. 한국 지도자들에게는 아직까지 생소한 무대이니만큼 살짝 긴장도 되고 그럽니다. 나중에 한국 지도자들은 어떻다 저떻다 얘기가 나올 수도 있는데 적어도 저로 인해 이미지가 나빠지는 일은 없도록 해야하지 않겠어요. 더불어 최근에는 외국인선수 건으로 미국 라스베이거스에 갔다 왔습니다.
Q.외국인선수건요? 일본팀에서 뛸 외국인선수를 보러 갔나요?
아니요. 그런 것은 아니고요. 그냥 요즘은 어떤 새로운 선수들이 있고 폼이 좋은 선수는 누가 있나 등 그런 부분을 보러간 것이에요. 저같은 경우 직접 눈으로 본 외국인선수를 선호하거든요. 그래야 확실하잖아요. 코로나로 인해 한동안 못나가서 아쉬웠는데 지난 시즌부터 다시 보러 다니고 있습니다. 이게 제가 현재 지도자로 있건 없건 훗날을 위해서도 꼭 필요한 것 같더라고요. 한타임을 놓치면 전체적인 흐름까지 잘 볼 수 없게 되요. 당장은 꼭 갈 필요까지는 없었지만 제가 궁금해서 사비로 갔다왔습니다.
Q.김성철 코치가 감독님 영향을 많이 받았나봐요. 쉬고있는 상황에서도 해외리그도 보러 다니는 등 이런저런 공부를 많이 하는 것 같더라고요.
김코치같은 경우 저랑 같이 나오기는 했지만 능력도 좋고 뭔가를 배우려는 열정도 대단한 친구라고 생각합니다. 선수 시절부터도 늘 그랬어요. 지금도 미국에서 공부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현재에 만족하지 않고 늘 노력하는 스타일입니다. 제가 나이는 더 많지만 역으로 배울 점도 많습니다. 꽉 막혀있는 것이 아닌 다른이들의 의견을 경청하고, 상대가 누구든 맞다 싶은 부분은 받아들이려는 자세가 좋아보여요. 언젠가 기회가 닿아서 감독 등을 하면 참 잘할 것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Q.그나저나 약주를 요새 너무 많이 드시는 것 아니세요?
잉? 아! 하하핫…, 그러게요. 인터뷰건으로 몇차례 연락할 때마다 제가 어젯밤에 술을 마셔서 숙취로 컨디션이 안 좋다고 했었죠. 맞아요. 저 같아도 충분히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어요. 확실히 야인으로 돌아와서 시간이 좀 나다보니 감독으로 있을 때와 비교해서 많이 마시기는 했죠. 하지만 걱정할 만큼은 아니에요. 딱 과음한 다음날만 연락을 주셔서 타이밍이 묘하게 맞은 부분도 있고요. 쉬는 동안 평소에 자주 못보던 지인들도 봤고요. 요새는 일적으로 사람들을 만나고 있는데요. 뭐, 한국 사람들이 그렇잖아요. 그냥 커피만 한잔하고 헤어지기는 아쉬운? 좀 깊은 얘기를 하려면 술 한잔 마시면서…, 그러다보니 술먹는 날이 확실히 많아지기는 했습니다.
Q.이번에 일본리그로 가시는 것을 떠나서 일본하고는 쭉 인연이 있었던 듯 싶어요.
예전에 인삼공사 시절부터 전지훈련 등을 가서 이런저런 사람들과 안면을 트는 등 꾸준히 인연이 만들어졌던 듯 싶어요. 그러다가 인삼공사에서 나온 후 여행겸해서 간적이 있어요. 제가 일본 음식을 좋아해서인지 나름 편하게 느껴지더라고요. 거기서 우연치않게 오호리 고등학교에 가서 레슨을 하게됐는데 그 일을 계기로 점점 인연의 폭이 늘어갔다고 할까요. 처음에는 페이를 받고 레슨을 했는데 나중에는 정이 들다보니까 선생님, 관계자, 학생들이 궁금해져서 아무 일이 없어도 몇 달에 한번씩 보러가고는 했던 기억이 납니다. 더불어 B.리그 가와사키 브레이브 썬더스하고도 꾸준하게 좋은 인연을 가져가고 있어요. 현재 단장이 저보다 3살 어린데 과거 그 친구가 감독하던 시절부터 서로 알고 지내서 지금도 종종 연락하면서 지내고 있습니다.
Q.고베 스토크스도 그러한 인연의 연장선으로 가게됐나요?
사실 저는 혹시나 일본에서 지도자 생활을 이어가게 되면 1부리그 팀으로 가고 싶었어요. 어디가 높고 낮고가 아닌 익숙함 때문이에요. 앞서서 외국인선수 이야기할 때도 언급했지만 저는 직접 눈으로 보고 경험한 것을 선호한다고 말씀드렸잖아요. 같은 맥락이에요. 1부리그 팀들은 이전부터 종종 접해보고 경험해봤지만 2부리그는 다소 생소하거든요. 1부리그도 잘 안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그래도 조금이라도 접해본 쪽이 낫다는 생각을 했던 거죠. 그러다가 생각을 바꾼게 일본에서 마케팅과 에이전트 등으로 사업을 하고 있는 '윌(WILL)' 스포츠 정용기 대표 때문이었어요. 20년 넘게 인연을 이어오고 친구인데 현지 말도 제대로 할줄 모르는 제가 일본을 자주 오가면서 많은 인연을 쌓을 수 있었던 데에는 정대표 덕이 컸죠. 고베 스토크스에서 정대표를 통해 연락이 왔더라고요. 저와 함께 일하고 싶다고. 2부리그 팀이라 망설여지는 부분이 있었는데, 정대표가 조언을 했고 그 말이 맞다 싶었습니다.
Q.조언요?
특별할 것은 없었어요. 일본에서의 첫걸음인데 한번에 껑충 뛰는 것보다 하나씩 배워나가면서 경험을 쌓는 것이 좋지 않겠냐는 말이었죠. 누구나 할 수 있는 말이었지만 신뢰하고 있던 정대표의 말이라 더 깊이 들어오더라고요. 생각해보니 그 말이 맞는 것 같기도 했고요. 이후 고베 단장, 감독과 만나서 많은 얘기를 나눴고 그러한 가운데 수석코치로 가기로 결정을 하게 됐습니다. 중간에서 정대표가 통역 등 여러 가지 역할을 해줘서 이런저런 면에서 편하게 소통하고 향후 행보에 대해서도 결정을 빨리 내릴 수 있었죠. 모리야마 토모히로라고 고베 감독님이 상당히 젊어요. 만으로 39살인가 될거에요. 그러다 보니까 저의 연륜? 경험 그런 부분이 필요했던가 봐요.
Q.하지만 일본 무대는 아직 익숙치 않아서 연륜 등을 발휘하려면 시간이 좀 필요할 듯 싶어요.
맞아요. 꽤 오래전부터 일본을 오갔다고는 하지만 현장에서 지도자로 있는 것은 조금 다른 문제잖아요. 그동안은 기본적인 것만 알면 됐지만 이제는 속 깊은 것까지 세세하게 알 필요가 있어요. 당연히 아직은 그게 안되고요. 나이도 있고 지도자 경력도 좀 있어서 현재 감독님보다 경험 등은 나을지 몰라도 당장 범위를 일본으로 좁히면 오히려 제가 배워야 될 판이죠. 뭘 알아야 노련미든 뭐든 발휘할 것 아니에요. 외국인선수 제도 또한 3명 보유에 2명 출전 등 우리와는 다르거든요. 당장 그런 부분에서부터 차이가 클테니까요.
Q.일본어는 좀 하시나요?
아뇨. 그게 문제네요. 오래전부터 일본을 오갔다고는 하지만 꼭 언어를 배워야 될 만큼 불편하고 그런 일은 없었거든요. 하지만 이제는 달라졌죠. 최근 들어 히라가나, 가타카나부터 배우고 있는데 나이먹고 뭔가 새로운 언어와 글씨를 배우려고 하니까 쉽지 않네요. 그래도 공부는 멈추지 않고 쭉 해야겠지만 진작에 해둘걸 후회도 살짝 되고 그럽니다. 현지에서 열심히 손짓발짓으로 소통하고 그러다보면 생활 일본어라도 늘어가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모를수록 아쉬워지는 것은 저일테니까요.
“자진사퇴, 구단과 팬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컸습니다”
Q.차근차근 단계를 밟아가다보면 금세 적응할 수 있을 것 같아요.
하핫…, 저도 그렇게 되면 좋겠습니다. 노력해야죠. 그나저나 단계를 밟아간다는 말 참 좋네요. 지도자 생활을 하면서 많이 느끼는 부분이에요. 잘 모르거나 부족하다고 느낄 때는 점프를 해서 몇계단씩 뛰어오르거나, 모르는데도 계속 올라가지 말고 멈춰서서 이해를 하고 가는것도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때로는 뒤로가서 배우고 다시 가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봐요. 제가 예전에 남자농구 국가대표팀 감독을 했을 때 런던올림픽 예선을 베네수엘라에서 한적이 있어요. 그때 도미니카랑 경기를 해서 접전 끝에 아쉽게 패했어요. 막판까지 엎치락뒤치락했을 정도로 박빙이었는데 간발의 차이로 지다보니까 정말 아쉽고 후회스럽더라고요. 대표팀 감독을 바로 하지않고 코치를 먼저해서 경험을 쌓았더라면 이런 선수들을 데리고 좀더 운영을 잘해서 당시같은 경기를 잡아내지 않았을까 싶었습니다. 그래서 (유)재학이 형에게, 만약 형이 감독을 하면 저를 코치로 써줄 수 있냐고 부탁을 했죠. 그랬더니 재학이 형이 대표팀 감독 출신인데 어떻게 코치를 하냐?고 반문하더라고요. 하지만 저는 상관없다. 지금은 배우는게 중요하다. 이런저런 경험을 쌓고 느끼다보면 더 나아지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대답했던 기억이 납니다. 이후 재학이형 밑에서 코치로 아시안게임까지 2년 동안 코치로 함께 했고요.
Q.그런 점에서 스타 플레이어 출신들이 코치 생활 등을 하지않고 바로 감독부터 시작하고 그런 것은 좋지 않을 수도 있겠네요?
아니요. 그런 것은 전혀 관계없습니다. 사람마다 자신만의 능력이나 스타일이 다 다르니까요. 스타 플레이어 출신이든 아니든 본인이 능력이 되고 뭔가를 빠르게 배우고 응용하는 머리가 탁월한 사람이라면 감독으로 바로 시작해도 나쁠 것 없겠죠. 저같은 경우는 천천히 성장하는 유형이라서 단계를 밟아가는 과정이 꼭 필요했던 것이고요. 이 부분은 개인마다 천차만별인지라 뭐가 좋다 나쁘다는 말할 수 없는 부분같아요.
Q.안양 시절에는 이런저런 사유로 인해 경질을 당한 것으로 알고있는데 DB에서는 자진사퇴를 하셨어요. 스트레스가 많으셨을 듯 싶어요.
스트레스같은 경우 모든 감독들이 매게임 적지않게 받고 있다고 보는게 맞죠. 저도 그랬고요. 이기는 날은 이기는 대로 스트레스받고, 지는 날은 지는 대로 스트레스받고…, 매번 그렇지 않나 싶어요. 사실 DB구단과 팬들에게는 항상 감사하고 죄송한 마음뿐이에요. 구단에서는 처음 저를 데려올 때부터 꾸준히 잘해주고 계속 믿어줬습니다. 팬분들 또한 응원을 아끼지 않으셨고요. 그것만큼 고마운게 없죠. 정말 원주와 DB에서 원없이 행복농구했다고 생각합니다. DB같이 좋은 구단과 열렬한 팬분들을 가진 곳에서 감독을 했다는 자체가 저에게는 큰 복이었죠.
Q.하지만 프로의 세계는 승패, 성적에 따라 희비가 갈릴 수밖에 없잖아요.
그렇죠. 저또한 시간이 갈수록 성적에 대한 압박감이 너무 크게 느껴지더라고요. 구단에서도 잘해주고 팬들도 이렇게 응원을 보내주시는데 승리로 보답해야겠다는 마음은 굴뚝같았거든요. 하지만 그게 뜻대로 안되는 순간에는 모든게 제 탓인 것만 같아서 이런저런 복잡한 감정이 들었습니다. 그런 마음이 쌓여갈수록 조바심이 날 수밖에 없었고요. 사실 그럴수록 멘탈을 꽉잡고 냉정하게 상황을 바라보는게 최상이겠지만 감정을 가진 사람인 이상 쉽지가 않아집니다. 결국 이대로는 안되겠다 싶어서 그만두겠다고 구단에 말씀을 드리게된거죠. 팀에서는 끝까지 믿어주고 함께 가지고 그랬어요. 하지만 제가 너무 미안했고 그래서 스스로 나오게된 것입니다. 앞으로도 DB같이 모든 면에서 그렇게 배려해주고 신경 써주는 구단을 또 만날까 싶네요. 그만큼 다시 생각해봐도 고마운 팀입니다.
Q.사퇴하는 과정에서 농구 해설하시는 분들에게 아쉬움을 토로하기도 했어요.
해설하시는 분들 입장에서는 안타깝고 아쉽고 그래서 더 잘됐으면 싶은 마음에 이런저런 쓴소리도 하고 지적도 하셨을거에요. 전부는 아니겠지만 그 마음 저도 상당 부분 이해할 것 같습니다. 본인들도 농구인 출신이니까 각자의 시각에서 다양한 모습이 보일 수도 있겠고요. 다만 아쉬웠던 것은 각 팀은 처한 상황이나 이런저런 부분에서 모두 다를 수밖에 없잖아요. 그런 것 들을 와서 한번 물어봐 주시고 어느 정도 아시는 상태에서 해설을 하시면 더 좋은 얘기가 나오지 않을까 싶거든요. 그렇지않고 때로는 심증이나 추측으로 얘기를 해버리면 서로간에 오해가 생길 수도 있다고 봅니다.
Q.그런 부분에서 이규섭 해설위원을 칭찬하신 것일까요?
그렇죠. 경기전 라커룸까지 찾아와서 이런저런 것을 물어보고 알려고 하는 것이 좋아 보였습니다. 이전까지 다른 해설자 분들께는 보지 못했던 모습인지라 개인적으로도 신선하고, 저게 맞다는 생각이 들었던거죠. 이위원같이 하다보면 더 디테일한 해설이 가능하면서도 혹시나 있을 오해의 소지도 최대한 줄일 수 있다고봅니다.
“급할수록 돌아가지 못했습니다”
Q.안양 시절도 그렇고 원주에서도 그렇고, 좋았을 때는 확 좋았다가 아닐 때는 뚝 떨어지는 등 성적의 기복이 심했어요. 이른바 중간이 없더라고요?
그랬죠.(웃음) 인정합니다. 잘할 때는 우승을 다투는 위치까지 팍팍 치고 올라갔죠. 그리고 못할 때는 이른바 땅파고 들어간다고 표현할 정도로 아쉬움이 컸고요. 꾸준하게 일정 성적을 유지하는 것도 중요한데 참 어렵더라고요. 멤버에 따라서도 그렇고 분위기도 영향이 있고…, 매 시즌 성적과의 전쟁을 하다보면 제 예상이나 기대치하고 빗나가게 상황이 돌아갈 때도 많은 것 같습니다. 장기 레이스이다 보니까 원하지 않아도 시즌중 업다운이 있을 수밖에 없어요. 올라갈 때 기세를 오래 유지하고 반대로 떨어졌을 때 최대한 빨리 수습해서 좋은 쪽으로 전환을 시키는게 중요하죠. 그러기 위해서는 감독의 역량도, 선수단의 의지도 모두 필요합니다. 감독의 운영력이 조금 떨어질 때는 선수단이 으쌰으쌰하면서 받쳐주고, 선수단이 쳐졌을 때는 감독이 독려하면서 일으켜 세워주고요. 그렇게 주고받는 과정이 원활하게 잘 돌아갈수록 팀도 잘되는 거죠.
Q.전력과 더불어 분위기 싸움이라는 부분에서 공감이 갑니다.
팀 스포츠니까요. 인삼공사 때는 리빌딩 때문에 성적 기복이 심할 수밖에 없었던 부분도 있지만 DB에서는 이러이러한 부분은 좀 더 잘했어야 되는대라는 후회스러운 마음도 적지 않았습니다. 분위기가 좋을 때 그것을 길게 끌고 가고 반대로 다운되었을 때 전환을 시키는 부분에서 아쉬움이 남죠. 서로간의 공감대 형성에도 좀 더 신경써야 됐다는 생각도 들고요. 이게 현장에서 떠나 한걸음 뒤로 물러서서 보면 잘 보이거든요. 한데 현장에 있을 때는 잘 안보일 때가 있어요. 당장의 성적이 급할 때가 많다보니 이른바 여유가 없어지는 거죠. 세상 모든 일이 그렇잖아요. 잘 나갈 때는 서로 칭찬하기 바쁜데, 반대로 상황이 돌아가다 보면 서로를 책망하기 일쑤인…, 그런게 이른바 악순환이라고 봅니다. 지도자 입장에서는 그런 부분을 놓치지않아야되고 저 역시도 잘 알고 있는데 그렇게 못할 때도 많았습니다.
Q.그런 점에서 코로나로 인해 리그가 중단된 시즌이 정말 아쉬웠을 듯 싶어요.
많이 아쉽죠. DB에서 지도자 생활을 하면서 가장 아쉬웠던 시즌이 아닐까 싶어요. 그때 멤버가 정말 좋았어요. 외국인선수도 좋았고요. (두)경민이도 제대했고, (허)웅이도 한단계 성장한듯한 모습을 보이는 등 핵심 선수들이 전체적으로 고점을 찍고 있었거든요. 시즌을 운영하다보면 촉이라는게 확 올 때가 있어요. 그때가 딱 그랬어요. ‘아! 이번 시즌은 통합우승이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코로나로 인해 거기서 멈추고 말았죠. 정규시즌 성적은 SK와 공동 1위였지만 팍팍 치고 나가던 상승세를 생각했을 때 거기서 멈춘게 너무 아까웠죠. 만약 그때 통합우승을 차지했더라면 이후 시즌을 이끌어가는데 여유가 많이 생기지 않았을까 싶어요. 하지만 어느 분야든 ‘만약’이라는 것은 의미가 없잖아요. 이른바 변수라는게 있기에 미래를 알 수 없는 것이고요. 그래도 당시 시즌에서 배운 것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차피 지난일, 뒤만 보고 아쉬워할 수는 없잖아요. 앞을 보고 가야죠. 저는 선수들에게 왜 뒤를 보냐? 앞을 보라고 얘기했는데 저는 정작 자꾸 뒤를 보지않았나싶어요.(웃음)
Q.둥글둥글 사람 좋아보이는 인상과 달리 한번씩 피가 뜨거운 모습도 보이셨어요. 안양 코치 시절 몰수게임패 때도 그랬고요.
아휴…, 그때는 제가 경험도 적고 철없는 코치 시절이었죠. 그 뒤로는 감정에 휘둘리지 않으려고 노력하는데 잘 안될 때도 많더라고요. 계속 느끼는 것이지만 시즌을 좋게 끌어가기 위해서는 분위기를 잘 조성해야 되거든요. 급할수록 돌아가라고 안된다 싶을 때도 여유를 가질 필요가 있고요.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선수들보다 제가 더 조급하지 않았나 싶어요. 성적이 안 좋으면 선수들도 부담을 많이 느끼고 그러잖아요. 옆에서 농담도 하면서 소통을 더 잘했어야 하는데 언제부터인가 그게 안되더라고요. 마지막 두 시즌 정도가 특히 그랬죠. 더불어 제가 신념처럼 가지고 있는 것 중 하나가 기분이 태도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에요. 좋은 말이기는한데 너무 거기에 꽂히다 보니까 외려 그런 부분으로 오해도 생겼던 것 같고요. 그런 점에서는 팀과 선수들에게 모두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Q.처음에는 많이 웃으셨는데 갈수록 웃음을 잃어가는 것 같다고 말하는 DB팬들도 많았어요.
그러게요. 본래 사람이라는 것이 경험이 쌓일수록 더 노련해지면서 여유가 생겨야 맞잖아요. 저도 감독 생활을 오래할 수록 그렇게될 줄 알았어요. 하지만 정말 쉽지가 않더라고요. 오히려 연차가 쌓일수록 여유가 없어지는 기분까지 들더라고요. 머리는 그렇게 하라고 시키는데 가슴이 안 따른다고나 할까요. 성적에 대한 압박감 때문인지라 언제부터인가 코트에 들어서면 불안 초조증이 생기더라고요. 그렇게 하면 안되는 것인데 한시즌 성적이 안나면 다음 시즌 성적을 내야 된다는 마음이 너무 강해졌던 것 같아요. 누가 막 쪼여서 그런게 아니라 스스로가 그렇게 느끼는 것이죠.
Q.그런 점에서는 가끔 휴식이 약이 될 수도 있을 듯 싶어요.
맞아요. 한번 씩은 자신을 돌아볼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아니 저는 그게 필요한 사람이라고 표현하는게 맞을 듯 싶네요. 정말 멘탈이 좋고 관리를 잘하시는 분들도 있겠지만 저는 제가 그런 부분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았고 여유의 필요성도 절실히 느끼는 중입니다. 배움과 경험을 쌓는데 있어서 나이는 필요 없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분들은 일본 2부 리그 감독도 아니고 코치면 좀 그렇지않느냐고 말씀하시는데 저는 오히려 잘됐다는 생각이 듭니다. 새로운 무대, 새로운 환경에서 코치부터 다시 시작해서 차근차근 경험을 쌓다보면 여러 가지 부분에서 더 공부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Q.DB가 가지고 있는 경쟁력중 하나가 강상재, 김종규라는 좋은 토종 빅맨을 둘을 가지고있다는 부분이잖아요. 강상재는 슛이 좋고, 김종규는 운동능력과 순발력이 좋아서 외국인선수까지해서 트리플포스트가 기대되는데 아쉽게도 아직까지는 완성이 되지 않고 있어요.
저도 감독 시절에 자꾸 시도했고 현재 김감독도 대행 시절부터 이 부분에 신경을 많이 쓰는 것 같더라고요. 트리플포스트라는 시스템의 호불호를 떠나서 팀내에 그 정도로 좋은 토종 빅맨진이 구성이 되어있으면 자꾸 시도해보는게 맞다고 생각해요. DB만의 색깔이 될 수도 있으니까요. 개인적으로 올해는 성공하지 않을까 싶어요. 김감독은 선수시절부터 이른바 ‘높이 농구’쪽으로는 전문가였잖아요. 본인이 가장 잘했던 부분이니만큼 김감독만의 노하우를 금세 만들어낼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DB만의 좋은 무기가 기대됩니다. 그렇게되면 성적도 잘 나올 것 같고요.
“운이 많이 따랐던 만큼 더 노력할 생각입니다”
Q.농구는 어떻게 시작하게 되었나요?
특별한 계기랄 것도 없어요. 초등학교 6학년때 놀듯이 농구공을 잡아봤고 제대로 하게된 것은 중학교 1학년 때부터였어요. 전국적으로 눈에 띌만큼 잘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대전 쪽에서는 나쁘지 않게 했고 그 결과 운좋게 연세대까지 가게 됐습니다. 전국랭킹 따지던 특급 선수들 입장에서는 당연한 수순 정도로 여길지 모르겠지만 저로서는 나름 뿌듯 했습니다. 대전고 출신 중에서는 농구로 연세대 간 사람은 제가 최초거든요. 그뒤 김훈, 조상현‧동현 쌍둥이 형제 등이 뒤를 이었죠. 제 학창시절 및 프로시절을 돌아보면 뭘 임팩트하게 잘하지는 못했고 그냥 말 그대로 무난했던 것 같아요. 안양시절 이충기 단장님, 김호겸 사무국장님, DB시절 김정남 부회장님, 신해용 전 단장님, 권순철 현 단장님 같은 분들을 만나게 된 것도 큰 복이었고요. 인터뷰때마다 자주하는 얘기지만 저는 운이 참 좋은 사람입니다.
Q.운은 모르겠지만요. 유달리 ‘첫번째’라는 단어와 자주 연관이 되시는 것을 보면 뭔가 특별한 것이 있어 보이기는 해요.
하하핫…, 그게 운이 아닐까 싶어요. KBL 최초 득점, 3점슛, 리바운드 등 커리어와는 별개로 뜻밖의 기록에 이름이 올라간 것부터 신기하기만 합니다. 무엇보다 대전고 출신으로서 연세대 진학, 프로지도자, 국가대표 사령탑 등을 한 것이 저는 무척 자랑스러워요. 연세대에서 보면 저는 많은 졸업생중 한명일지도 몰라요. 워낙 기라성같은 선수와 지도자를 배출했으니까요. 하지만 대전고에서 보면 좀 다를 수 있겠네요. 하나하나가 학교의 역사가 되었으니까요. 고향을 떠나있을수록 애향심, 애교심이 늘어나는 기분이에요.(웃음)
Q.선수와 지도자로 활동하면서 본 가장 인상적인 외국인선수로는 누가 있을까요?
기량적으로야 잘하는 선수가 워낙 많아서 누구를 콕 찍기가 어렵지만 선수로서의 자세, 본인을 돌아보는 마인드, 팀에 융화되려는 노력 등 프로의식까지 포함하면 저는 칼렙 그린이 가장 먼저 떠올라요. 오랄 로버츠 대학교 출신의 파워포워드로 신장은 2m정도 되었어요. 유럽까지 가서 보고 직접 데려온 선수인데 같이 있는 동안 정말 만족했습니다. 마지막 은퇴를 국내리그 DB에서 했다는 점에서 더욱 의미가 깊은 선수죠. 한창 뛰다가 코로나로 시즌이 중단되고 말아서 안타까웠던 기억이 납니다. 우승을 차지하고 환호하면서 은퇴했으면 더욱 좋았을텐데요. 프로의식이 정말 투철했던 선수였던지라 옆에서 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지게 만들었어요. 치나누 오누아쿠도 옆에서 그린에게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을 겁니다. 멘토로서의 역할도 정말 잘해줬거든요. 제가 이제껏 본 외국인선수중 프로로서의 자세는 그린이 단연 최고입니다.
Q.이전에 인터뷰했던 최인선, 김진 감독님도 그렇고 오늘의 주인공 이상범 감독님까지, 외국인선수 관련 얘기를 하면 대단한 성적을 남긴 케이스보다 성실하고 자기관리 잘했던 선수들을 1번으로 기억하는 것 같아요.
그럼요. 아무래도 농구는 단체 스포츠니까 외국인선수가 그런 프로의식을 보이면 다른 선수들에게까지 좋은 영향력을 끼쳐요. 전체를 봐야하는 감독 입장에서도 고마울 수밖에 없죠. 외국인선수같은 경우 워낙 많은 리그를 돌아다니다 보니까 개인기록이나 그런 쪽에 민감한 케이스가 대부분이에요. 팀을 생각하면서 플레이하고 코트 밖에서도 모범적으로 행동하는 선수는 많지않아요. 그린같은 선수를 잊어버릴 수 없는 이유죠.
Q.아무래도 감독님하면 디온테 버튼을 가장 먼저 떠올리는 팬들도 많아요.
하하핫…, 버튼요. 그럴 수도 있겠네요. 워낙에 짧고 굵직한 임팩트를 남기고 떠나갔죠. 제가 어린 선수들을 좋아해요. 코트에서도 열정적이고 가르쳐주는대로 흡수하면서 성장해나가는 모습을 종종 봤었으니까요. 버튼같은 경우도 농구에 대한 열의가 대단했던 친구에요. 자기가 잘 안되는 플레이가 있으면 이른 새벽에도 체육관에 나가서 연습하는 한편 자기몸도 자기가 알아서 잘 만들었죠. 프로 정신이 상당했죠. 그러니까 그만큼 농구를 잘할 수 있지 않았나 싶어요. 그래서 저도 버튼 재계약에 적극적이었고 집에까지 찾아갔었죠. 재계약 서류에 사인까지 마친 상태였고요. 이후 NBA로 가는 길이 열리면서 포기할 수밖에 없었지만요.
Q.마지막으로 이상범에게 농구란 무엇일까요?
오랜시간 많은 것을 함께했던 동반자같은 존재라고 생각됩니다. 특별히 잘난 구석 없는 사람이지만 그래도 농구를 했기에 쟁쟁한 선수들을 가르치는 위치에도 서보고, 많은 팬들에게 응원도 받을 수 있지않았나 싶어요. 농구를 안했으면 대전에서 뭐하고 있었을까라는 생각도 가끔 들더라고요. 농구를 했기에 더 넓은 세상에서 소통하고 외국도 다니고 그랬죠. 그런 점에서는 돌아볼수록 고마운 것 투성이입니다. 더불어 즐거운 때에도 함께 했고, 힘들고 괴로웠던 순간에도 옆을 떠나지 않았던 친구죠. 어느 모 광고 문구처럼 ‘또 하나의 가족’이다고 봐도 무방할 것 같아요. 일본에 가서도 함께 고생해야죠.(웃음)
#글_김종수 칼럼니스트
#사진_KBL 제공, 이청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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