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헌 『중화유기』, 근대 한국인의 첫 ‘20세기 초 중국’ 여행기…김태희, 박천홍 등 ‘집단지성’으로 번역본 펴내
[OSEN=홍윤표 선임기자] 일찍이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 1737-1805)이 1780년 여름에 중국 청나라 건륭제의 칠순 축하사절단의 일원으로 성경(선양)과 연경(북경), 열하(熱河. 하북성 북쪽 강) 일대 여행담을 갈무리한 것이 열하일기(熱河日記. 1783년)다.
그로부터 140년 남짓 지난 시점에 한 말과 일제강점기에 살았던 유교개혁 사상가 진암(眞菴) 이병헌(李炳憲. 1870-1940)이 1914년부터 1925년까지 근대화의 몸살을 앓고 있던 중국을 탐방, 그 충실한 기록물인 『중화유기(中華遊記)』를 남겼다.
한문으로 쓰여있어 그동안 일반인들이 접근하기 어려웠던 이 『중화유기』(빈빈冊방 발행)가 최근 다산연구소 소장을 지낸 김태희를 비롯해 『매혹의 질주 근대의 횡단』, 『악령이 출몰하던 조선의 바다』, 『활자와 근대』의 지은이인 박천홍 현담문고 학예실장, 경향신문 베이징 특파원, 논설위원을 거친 조운찬, 간찰 역주서인 『오래된 편지를 엿보다』를 쓴 최병규, 고문서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한재기 등 5명이 ‘합작’해 제대로 된 번역본으로 나왔다.
경남 함양에서 태어난 유학자 이병헌은 44세 때인 1914년부터 55세가 되던 1925년까지 모두 5차례 중국을 여행했다. 『중화유기』는 바로 이병헌의 중국 여행기다.
역자를 대표해 이 책을 해설한 조운찬은 “이병헌은 여행의 견문을 하나도 빠트리지 않는다는 자세로 여정을 시간의 흐름에 따라 충실하게 기록했다.”면서 “그러나 『중화유기』는 일기 형식으로 쓴 단순한 여행기가 아니다. 여행 중에 자기 생각을 글로 담아냈고, 그것은 일제 강점기 한국인의 자의식이기도 하고, 개혁유학자의 세계관으로 표출됐다”고 설명했다.
『중화유기』는 시대 변화 속에서 인간의 삶과 가치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을 담은 책이다. 이 책은 이병헌의 여정과 그를 둘러싼 시대적 배경을 생생하게 묘사하면서, 동시에 그의 철학적 사색과 개혁에 대한 노력을 보여준다.
“아, 나는 풍파 속에서 살아온 사람이다. 집에 있으면 근심만 깊어지니 어떻게 하면 마음을 가눌 수 있을까 생각했다. 하루아침에 몸을 떨치고 일어나 중국으로 유람을 떠났다. 다녀온 여정이 수만 리에 이른다.”(21쪽)
이병헌은 근대화의 바람이 거세게 부는 시대에 전통적인 가치와 현대의 새로운 가치 사이에서 고민하며 자기 길을 찾아 나섰다. 중국에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중국의 문화와 역사를 체험하면서 사고와 철학에 큰 영향을 받는다. 그 과정에서 그는 전통적인 가치를 존중하는 한편, 새로운 시대에 적응하고 개혁하는 방법을 모색한다.
이 책은 이병헌의 개인적인 여정을 통해 당시 조선과 중국 사이의 문화 및 정치의 상호작용을 이해하는 데 귀중한 통찰을 제공한다. 저자는 중국을 여행하며 겪은 경험을 통해 당시 조선이 겪고 있던 정치적, 사회적 변화에 대한 그의 시각을 보여준다. “신라부터 고려와 조선왕조에 이르기까지 중국의 문화를 부러워해 중화를 받들고 오랑캐를 배척하는 헛된 인습에 빠졌다. 이것은 사대주의에 의존하는 마음에서 나왔을 뿐만 아니라, 참으로 여러 종족이 모두 중국 문화에 동화되어야 한다는 데서 비롯된 것”이라는 비판적 인식이 이병헌의 중국 여행의 참된 동기였다.
이른바 ‘집단지성’으로 이 책을 재탄생시킨 역자들은 오랜 시간과 정성을 기울여 『중화유기』를 현대 한국어로 옮겼다. 번역 과정에서 한문의 정교함과 시적 표현을 살리는 데 큰 노력을 기울였으며, 원작의 아름다움과 깊이를 최대한 살리려 애썼다.
역자들은 한문 읽기를 위해 10년 전부터 ‘공부’를 함께하면서 그 모임의 이름을 ‘사야(史野)’라고 붙였다. 『논어』에서 따온 ‘사야’는 ‘안과 밖, 내용과 형식이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뜻이다. 역자들은 『중화유기』를 읽어나가는 도중에 코로나 역병으로 1년 가까이 모임을 중단하는 등 ‘애로’를 딛고 기어코 번역을 성사해냈다. ‘근대 중국의 탐구’서인 『중화유기』는 식민 치하에서 암중모색하던 한 유학자의 ‘한국 근대화의 길 찾기’ 여정으로도 읽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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