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죽인 일상 속에 움트는 '연대'…차별 넘어 광장으로 나선 학생들
아이 위해 저절로 인권 운동가가 된 부모들
(서울=뉴스1) 이기범 김예원 김기성 홍유진 기자 = 주변화된 일상은 삶을 바깥으로 내몬다. 사상과 정체성을 따져 묻는 건 한국 사회의 비근한 일이지만, 존재 자체로 증명해야 하는 삶이 있다.
"주변 학생들 사이에서 색출하려 하기도 하고, 다 잡아내야 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니까 더욱 용기를 내서 앞에 나오기 어려운 환경이었다."
서울국제고에 재학 중인 A양(17)은 연애와 학업에 대해 고민하는 평범한 학생이다. 1학기 기말고사에서 망친 과목에 대해 걱정하다가도 친구들과 함께 동아리 활동을 하며 축제 부스를 차린 일에 대해 자랑스럽게 말한다. 영어를 좋아해 외국인 친구들과도 스스럼없이 사귄다. 여느 학생들처럼 대학 진학에 대한 불안감이 가장 큰 고민이다.
차이가 있다면 남들보다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 더 깊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를 향한 주변의 시선이다. 차이가 차별화될수록 시선은 단단히 꽂혔고, 차별의 시선이 가시화될수록 일상은 비가시화됐다.
"저를 알지도 못하면서 부정적인 선입견을 가지고 저를 보는 친구들이 있다는 사실이 제일 고통스러웠다."
하지만 사회적 시선이 만드는 원심력은 동시에 구심력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A양은 광장으로 나섰다. 그리고 올해 서울퀴어문화축제에 학내 성소수자 인권동아리 부장으로 참석해 다른 학교 학생들과 함께 부스를 차렸다.
◇"핫스팟까지 동원된 혐오…연대가 힘이 됐다"
동아리는 익명제로 운영된다. 서로가 서로를 모르는 방식이다. 원하는 경우 함께 오프라인 활동을 하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카톡 오픈 채팅방을 통해 익명으로 활동한다. 그만큼 정체성을 드러내는 일은 조심스럽다. 차별의 시선이 공고한 탓이다.
같은 동아리에 활동 중인 B양(17)은 "말하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은 느낌"이라며 "모든 미디어나 일상적인 대화 안에서 제3의 정체성이나 지향성은 고려하지 않는 부분이 있다"고 말했다.
존재가 움츠러들수록 혐오의 발언은 세졌다. 성소수자가 자신의 주변에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강당에 전교생이 모일 때면 스마트폰 핫스팟 이름을 통해 부모 욕을 포함한 혐오 발언이 공개적으로 쏟아지기도 했다.
B양은 자신이 속한 동아리에 대해 "학교나 학교 밖에서 성소수자임을 토로하고, 성소수자로서 겪는 어려움이나 개인적 경험을 말할 곳이 부족하다"며 "성소수자끼리 고충을 나눌 장소와 사람들이 있다는 것 자체가 비주류인 사람들에겐 위로와 힘이 된다"고 말했다.
연대는 학교 바깥으로 확장됐다. 퀴어 축제에 다른 학교 성소수자들과 함께 부스를 차린 일은 자신을 더욱 단단히 하는 경험이 됐다.
B양은 "이전에 퀴어 퍼레이드에 참석했을 때도 눈에 보이는 무지개가 더 많다는 걸 광장에서 마주하면서 처음으로 소수자가 아닌 위치에 선 거 같아 벅차올랐다"며 "이번에는 부스를 차리고 가서 세상에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한 사람의 성소수자로서 성장할 수 있었다. 다른 성소수자들과 연대하면서 좀 더 영향력을 가진 느낌이다"고 밝혔다.
◇자조모임에서 인권 단체가 된 '부모모임'
"운이 좋았다. 부모님 두 분 모두 지지해 주신다."
이들의 삶을 주변부로 밀려나지 않도록 잡아주는 건 부모님과의 관계다. 두 사람은 모두 부모와의 큰 갈등 없이 정체성을 지지받았다. 그러나 대개는 부모와의 관계 속에서 성소수자의 삶은 흔들리기 시작한다.
이는 부모 입장에서도 마찬가지다.
20대 동성애자 아들을 둔 김진이 성소수자부모모임 활동가는 "아들이 16살 때 처음 알게 됐다. 어느 날 갑자기 이유를 말하지 않고 미국으로 보내달라고 해서 친구와 메시지를 주고받은 걸 보다가 알게 됐다"며 당시 자녀와의 갈등 상황을 회상했다.
또 "애는 너무 당황해서 왜 그걸 봤냐고 화내고 며칠 동안 학교도 안 나갔다"며 "상담사 자격증도 있는데 당시만 해도 너무 멍해서 이걸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고 당시 심정을 토로했다.
이후 김진이 활동가는 자신과 같은 처지의 학부모를 만나기 시작했다.
"40대 성소수자 아들을 둔 분을 만나게 됐는데 본인 아들은 파트너와 6년째 잘살고 있다고 하더라. 그 말을 듣는데 이상하게 안심이 되면서 눈물이 나오고 마음이 편해졌다. 애가 불행하게 살 거라고 생각했는데 잘 살아가는 사람이 있구나 싶었다."
그렇게 시작한 모임은 성소수자 자녀를 둔 부모들의 자조모임에서 나아가 인권 단체가 됐다.
"우리가 왜 불행할 거라고 생각했을까? 교육의 부재가 문제가 아닐까? 하고 생각하게 됐다. 다른 나라는 다양하게 교육하는데 우리는 그런 게 전혀 없으니까. 그다음은 너무나 차별적인 행동을 많이 하니 차별금지법도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게 됐다."
김 활동가의 표현에 따르면 부모들은 저절로 '인권 운동가'가 됐다. 성소수자 자녀들이 마주한 현실이 피부로 와닿은 탓이다.
◇"우린 당신 옆에 잘 살고 있어요"
권명보 성소수자부모모임 활동가는 "(미성년자들은) 부모님께 감정, 물질, 경제적 지원 등 여러 지원을 받고 있는 상태라 조심스러운 게 있다"며 "따라서 경제적 독립이 가능한 나이가 되면 부모님께 커밍아웃을 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대학생이 된 권명보 활동가의 자녀는 편지로 트랜스젠더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알렸다.
권 활동가는 "본인이 얘기하면 평화로운 가정, 날 사랑하는 엄마 아빠가 다 깨지는 거 아니냐고 무서워했다"며 "자기 몸과 현재 상황이 너무 싫어서 내가 괴물인가 생각했다는 내용이 편지에 담겼다"고 덤덤하게 말했다.
성소수자 자녀를 둔 부모는 △충격(상상하지 못했던 일에 대한 놀람) △부정(우리 애는 아닐 거야) △분노(어떻게 나한테 이런 일이) △죄책감(이게 나 때문인가) △감정표출(밤새 화냈다 울었다) △결단(용인하든가 내치든가) 등의 단계를 겪는다.
결단을 내린 뒤에도 부모는 자녀와 함께 끊임없는 정체성을 증명하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 특히 트랜스젠더의 경우 법적 성별 정정 과정에서 여성 혹은 남성으로서 사회적 시선에 부합하는 모습을 증명해야 한다.
권 활동가는 "법원에 갈 때 트랜스젠더 여성들은 생전에 안 신는 구두를 신는다. 우리 애도 청바지에 티만 입고, 화장도 싫어하는데 블라우스를 입고 가장 여성스럽게 갔다"며 "성별 정정을 받기 위해 판사가 좋아하는 말만 하고, 사회에서 요구하는 여성성, 남성성을 증명해야 한다"고 말했다.
트랜스젠더 자녀를 둔 오은지 성소수자부모모임 운영위원은 성별 정정 이후 자녀가 일상을 찾았다고 말했다. 그러나 끝없는 증명을 요구하는 사회적 시선은 현재 진행형이다.
오 위원은 "성소수자들에게 불편함은 항상 있다. 취직할 때도 성소수자를 이해하는 직장이어야 하고, 아무리 가족이 지지하지만 사회 전반적인 인식이 달라야, 어느 정도 달라지느냐, 어떤 사람을 만나느냐에 따라 불편의 정도도 다를 것"이라고 말했다.
그럼에도 이들은 당신 주변에 성소수자가 있다는 점을 끊임없이 알리고 보여주면 세계가 바뀔 거라고 믿는다.
"안 보인다고, 자꾸 없다고 한다. 성소수자는 본 적 없고, 트랜스젠더는 아예 없다고 한다. 여기 당신 옆에 잘 살아가고 있다는 걸 자꾸 보여주려 한다. 우리가 활동하는 이유다."
Ktiger@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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