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부차기 ‘악!’… 누구도 상상 못한 美 축구 여제의 마지막
연장전 전·후반까지 120분을 그라운드에서 내달린 선수들의 표정엔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6일(현지 시각) 2023 호주-뉴질랜드 여자월드컵 16강전에서 맞붙은 미국과 스웨덴의 경기는 세계 랭킹 1위이자 2015·2019 월드컵 우승팀인 미국이 손쉽게 승리를 거머쥐리라는 예측과 달리 팽팽하게 진행됐고 승부차기까지 이어졌다. 미 대표팀 진영에서 한 선수가 나오자 경기장의 함성은 폭발적으로 거세졌다. 민트색 쇼트커트 머리를 한 등번호 15번, 미국 축구 영웅 메건 라피노(38)였다. 라피노가 등장하자 뉴욕타임스(NYT)는 홈페이지에 실시간으로 “(라피노가) 칼을 휘두르기 위해 나오고 있다”며 흥분 섞인 속보를 올렸다.
호루라기가 울리자 크게 심호흡을 한 라피노는 자신감 있게 공을 찼다. 하지만 발끝을 떠난 공은 오른쪽 골대 위를 크게 벗어나 넘어가 버리고 말았다. 미국 측 응원석에선 잠깐의 정적에 이어 탄식이 흘러나왔고 라피노는 고개를 떨어뜨리고 쓴웃음을 씹으며 걸었다. 경기는 5대4 스웨덴의 신승(辛勝)으로 끝났다.
이날 라피노의 승부차기 실축은 이번 월드컵의 가장 충격적인 장면으로 남을 가능성이 크다. 골대를 스치지도 못한 라피노의 ‘뻥 슛’은 지난 두 차례 월드컵 우승팀인 미국이 16강 문턱에서 좌절하게 된 결정적 계기가 됐다. 팬들은 이번 경기가 미 여자 축구의 지금을 만든 주역인 라피노의 마지막 국가대표 무대였다는 점을 더욱 아쉬워하고 있다.
이번 월드컵이 열리기 전 그는 “이번 시즌을 끝으로 은퇴하겠다”고 밝혔다. 역사상 처음으로 월드컵 3연패를 달성하고 멋지게 무대에서 내려오려던 그의 바람은 이날 실축으로 물거품이 됐다. 허공을 가른 승부차기는 그가 국가대표로서 찬 마지막 슛으로 기록됐다.
미드필더와 윙어 역할을 소화하는 라피노는 미 스포츠 무대의 ‘수퍼 히어로’ 같은 존재다. 축구 불모지 미국에 축구 열풍을 불러온 주인공이기도 하다.
역설적이게도 라피노는 2011년 독일 월드컵 8강 때 승부차기를 이끌어내며 미국에 여자축구 붐을 일으켰다. 강호 브라질과의 경기에서 동점 헤딩골로 이어진 라피노의 정확한 어시스트는 지금도 ‘월드컵 최고의 명장면’으로 꼽힌다. 이 골은 여자축구 월드컵 역사상 가장 늦게(122분) 들어간 골이라는 기록도 가지고 있다. 미 축구팀은 결국 결승까지 진출한 후 일본에 패해 준우승을 했지만, 이 월드컵을 계기로 기세가 상승해 이후 월드컵 2연속 우승을 달성했다.
라피노의 현란한 플레이는 2019년 프랑스 월드컵 때 정점을 찍었다. 자신이 레즈비언인 사실을 공개적으로 알린 라피노는 당시 남녀 국가대표 축구팀의 출전료를 동등하게 맞추라고 미 축구협회를 압박하며 보수파인 도널드 트럼프 당시 대통령과 각을 세우고 있었다. 트럼프는 라피노를 ‘말만 하지 말고 실력으로 증명하라’고 몰아세웠다. 그러자 라피노의 실력이 폭발했다. 홈팀 프랑스를 2대1로 꺾은 경기에선 두 골을 모두 라피노가 넣었고 네덜란드와의 결승전에선 페널티킥에 성공하며 우승을 견인했다. 6골을 넣어 최다 득점자에게 주어지는 ‘골든 부트’와 대회 MVP에게 주는 ‘골든 볼’을 동시에 수상했다. FIFA가 그해 최고의 선수에게 주는 ‘발롱도르’ 여자 선수 부문 수상까지 했는데 그해 남자 선수 중엔 ‘축구 신화’ 리오넬 메시(아르헨티나)가 수상자였다.
이런 수퍼스타의 마지막 무대에 대해 뉴욕타임스는 “라피노조차 상상하지 못한 결말일 것”이라고 평가했다. 미국 팀이 탈락한 6일, 미 축구 팬과 동료 선수는 그라운드를 떠나는 라피노에게 감사의 박수를 쏟았다. 라피노는 눈물을 흘리면서도 기자들에게 농담조로 이런 말을 남기고 경기장을 떠났다. “저는 이제 서른여덟이고 치료도 받는 신세입니다. 말하자면 이런 게 인생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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