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자 한조각에 13년전 범인 잡혀… 연쇄살인범 멸종 시대
미국에서 13년 동안 미제 상태였던 연쇄살인의 유력한 용의자가 지난달 체포된 과정이 하나둘 드러나면서 한때 사회를 공포로 몰아넣은 연쇄살인이 쇠퇴기에 접어들었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이른바 ‘길고(Gilgo) 해변 연쇄살인 사건’의 용의자가 검거된 과정을 보면 과거 연쇄살인범들이 검거를 피하려고 즐겨 쓰던 ‘대포폰(허위 명의 전화)’, 증거인멸, 잠적 등의 기법이 최첨단 과학 수사로 점점 무력화되고 있음이 드러난다는 것이다. 온라인 활동의 일거수일투족을 손바닥처럼 들여다보는 ‘빅브러더’와 비슷한 디지털 현실도 연쇄살인범 멸종의 원인 중 하나다.
뉴욕타임스(NYT)는 6일(현지시각) “한때 때때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주도면밀한 연쇄살인 사건이 최근 자취를 감췄다”며 “과학 수사 기법이 획기적으로 발전한 데다 시민들의 안전 의식이 높아지면서 연쇄살인 사건이 쇠퇴기(twilight)에 접어들었다”고 전했다. 다만 총기 난사 등 무차별 폭력 범죄는 오히려 늘고 있어 범죄가 줄었다기보다 범죄의 양상이 시대에 따라 달라졌다는 분석도 나온다.
뉴욕 수사 당국은 지난달 ‘길고 해변 연쇄살인 사건’의 용의자 렉스 휴어먼을 체포했다. 2010년 뉴욕주 롱아일랜드 사우스쇼어에 있는 길고 해변 일대에서 시신 16구가 발견된 이 사건은 진범을 잡지 못해 장기간 미제로 남았다. 그러다 수사 당국이 지난해 1월 재수사를 시작했고 추적 끝에 그를 맨해튼 사무실에서 지난달 체포했다. 길고 해변 인근에 살면서 맨해튼에서 건축 컨설턴트로 일해온 휴어먼은 일단 여성 세 명을 살해한 혐의로 기소됐다. 그는 추가 혐의에 대해서도 수사받고 있으며, 연쇄살인 희생자로 추정되는 여성 시신만 최소 10구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혐의가 늘어날 가능성이 크다.
사건 해결엔 지난 10여 년 사이 획기적으로 발전한 수사 기술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 유나바머, 찰스 맨슨 같은 악명 높은 연쇄살인범이 활동했던 20세기엔 상상도 못 할 최첨단 기법이 용의자를 찾아냈다. 예를 들어, 휴어먼은 종적을 감추고자 대포폰을 써서 피해자들과 연락했다. 뉴욕경찰은 그러나 피해 여성의 휴대폰에 남은 디지털 증거를 활용해 해당 대포폰 번호의 소유자가 맨해튼에서 (휴어먼의 거주지인)롱아일랜드로 출퇴근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같은 방식으로 여러 피해자가 통화한 대포폰 기록을 추적한 결과 수사 당국은 ‘수상한 집’을 수백 채 정도로 좁힐 수 있었다. NYT는 “기술의 엄청난 발달로 10여 년 전의 위치 기록도 수사 당국은 추적 가능했다”고 했다.
자신도 모르게 온라인에 남기는 디지털 흔적도 연쇄살인범에겐 치명적이다. 용의자의 범위를 좁힌 검찰은 인터넷 검색 기록을 뒤졌다. 휴어먼은 흔적을 숨기려 익명의 계정을 만들어 썼지만 경찰은 용의자 그룹의 검색 기록까지 샅샅이 뒤질 수 있었다. 휴어먼은 ‘롱아일랜드 연쇄살인범의 통화를 왜 수사 당국은 추적하지 못할까’ 같은 수상한 검색을 했다가 덜미가 잡혔다. 존제이대 애덤 스콧 완트 교수는 “‘완전범죄’라는 개념은 이제 말 그대로 개념으로만 존재한다. 사람들은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디지털 흔적을 남기고 있다”고 말했다. 나날이 발전하는 유전자 감식 기술도 도움이 됐다. 경찰은 지난 4월 휴어먼이 사무실 쓰레기통에 버린 피자 상자에서 그의 DNA를 채취했고, 살인 현장에 남은 DNA와 대조해 일치하는 것을 확인했다.
이런 기술 발달과 더불어 소셜미디어로 유통되는 범죄 정보를 토대로 시민들이 타인에 대한 경계심을 높여가면서 연쇄살인은 점점 줄어드는 상황이다. 낯선 이에 대한 사회적 경각심 때문에 범죄에 노출되기 쉬운 히치하이킹 등을 하는 이가 줄었고, 자가용으로 자녀 등·하교를 시키는 등 타인과의 접촉을 자제해 위험 노출을 줄였다는 것이다. 미 래드퍼드대학 등이 집계한 연쇄살인 통계에 따르면, 미국 연쇄살인범은 1980년대 823명(첫 살인 발생 기준), 1990년대 724명에 달했지만 2010년대엔 201명으로 줄었고 2020년대 들어선 3명으로 감소했다. 세계적으론 1980~1990년대 1000여 명에 달한 연쇄살인범이 2010년대엔 약 370명, 2020년대엔 7명으로 줄었다.
치밀한 연쇄살인은 줄었지만 총기 난사 등 공공장소에서 한 번에 다수의 피해자를 내는 범죄는 증가하는 추세다. 미국의 총기 난사(대규모 총격) 사건은 2014년 273건, 2018년 336건, 지난해 647건으로 계속 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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