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15년 만에 바뀐 아들의 ‘프사’
아들의 카톡 프로필 사진(프사)이 바뀌었습니다. 15년 만의 일입니다. 아들은 없고, 아들이 찍은 제주도 바다 풍경뿐인 프사이지만 제게는 기적 같은 일입니다.
38세 아들의 카톡 프사는 그동안 가슴과 얼굴의 윤곽만 있는 눈사람 모양의 카톡 자체 프사였습니다. 본인 사진을 올리지 않았으니 당연합니다. 아들은 그 카톡 프사처럼 입도 귀도 눈도 없는 것처럼 살아왔습니다.
19년 전 아들은 고3이었습니다. 3월 어느 날 “엄마 서점 가서 수능 참고서 사야 해요”라며 날 닮아 잘 생기고 뽀얀 피부의 건강한 아들이 손을 내밀 때만 해도 전 행복했습니다.
불과 1년 후 아들은 너무도 달라졌습니다. 눈빛은 늘 불안했고, 망상에 빠지는 날이 늘어갔습니다. 가족과도 동떨어져 낯선 세계에 사는 듯한 모습은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 아니었습니다. 저는 그것이 병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고, 애꿎게 아들만 나무랐습니다. 아들은 대학 2학년 때 결국 학업을 포기했습니다. 아들의 삶을 송두리째 짓밟고, 저를 오랜 세월 가슴앓이하게 한 조현병의 시작이었습니다.
아들은 10년 넘게 입퇴원을 반복했습니다. 입원 치료 후 집에 돌아오면 곧 재발했습니다. 불규칙한 생활에, 약 부작용인 공황장애까지 겹쳐 약을 제대로 먹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재발하면 의사와 상담해 응급입원시키곤 했는데 아들은 그런 가족이 싫다며 한 번은 가출해 고시원에서 지내다 열흘 만에 돌아온 적도 있습니다.
그랬던 아들이 정신장애인 재활시설인 송국클럽하우스의 프로그램 참여에 이어 다니던 정신과병원에서 운영하는 그룹홈에 지난해 9월 입주하면서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반년가량 기다린 끝에 1인실에 입주했는데 그곳 생활에 아주 만족해합니다. 프사의 사진도 3주 전 그룹홈의 동료 8명과 시설장, 사회복지사, 정신과병원 원장과 간호사 등이 함께 한 1박 2일 제주도 여행의 기분 좋은 기억입니다.
아들은 낮에는 병원 치료를 받고 저녁에는 그룹홈에서 생활합니다. 곧잘 웃고, 말수도 많아졌습니다. 얼마 전에는 들뜬 목소리로 “엄마, 오늘은 내가 저녁 식사 당번이야. 김치찌개는 고기를 언제 넣는 거야. 동생들보다 맛있게 할 수 있을까”라며 전화로 묻기도 했습니다.
또 하나의 변화는 사람과의 만남 자체를 기피하던 아들이 일을 하겠다고 나선 것입니다. 그룹홈 동료들이 모두 직장을 다니는 것에 자극받고, 정신과병원 원장님이 자신의 병원에서 쉬운 일부터 하루 2시간이라도 근무하라고 적극 권한 것이 도움이 된 것 같습니다. 아들은 일을 시작하면 월급과 기초수급비로 적금을 들겠다고 합니다. 너무 대견해 눈물이 날 지경입니다.
요즘도 간혹 범죄 뉴스에서 조현병이 등장할 때마다 아들이 떠오르면서 아쉬움을 느끼는 부분이 있습니다. 전환시설이나 정신장애인 그룹홈(공동생활가정) 문제입니다. 전환시설은 입원 치료를 마친 정신장애인이 곧바로 집으로 가지 않고 최장 6개월가량 머무는 적응 공간입니다. 복지사들이 생활지도를 하기 때문에 집으로 돌아가도 재발 가능성이 낮습니다. 그래서 수도권에서는 정신과 퇴원 시 전환시설 입소를 권하고, 그룹홈 등에서도 입주 상담 시 먼저 전환시설을 거칠 것을 안내합니다. 그런데 부산에는 전환시설이 한 곳도 없습니다.
또 공동생활가정은 어느 정도 자립생활이 가능한 정신장애인이 일정 비용을 지불하고 생활하는 곳입니다. 부산은 특히 남성 공동생활가정이 1, 2곳에 불과해 입주 문의는 많지만 장기간 대기해야 합니다. 최근 부산의 정신장애인 가족 모임인 가디언스클럽과 정신장애인시설 관계자들이 부산시의원을 만나 관련 조례 제정을 촉구한 것도 이 때문입니다. 조현병 장애인들이 조금이라도 일찍 전환시설이나 그룹홈에서 생활할 수 있었더라면 좋았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삶이 고단한 순간순간 시인 김인권 님의 ‘여뀌 피다’가 위안이 되었습니다. ‘마른 세상 깨우며 / 한여름 들판을 한숨에 달려왔다 / 홀로 일어서는 힘, 네 빛나는 고독이여 / 불볕 더위로 온 몸 찔러 상처의 꽃 피우며…’
환하게 웃는 아들의 얼굴을 프사로 보게 될 날을 기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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