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장고에서 찾아낸 유물이야기] <66> 동래패총 출토 왜계 토기
전체 맥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본문 보기를 권장합니다.
지난 5월 기준 부산에 거주하는 외국인은 4만 5000명에 이른다.
1993년 부산박물관이 발굴 조사한 동래패총에서 가야인이 사용한 그릇과 함께 왜인들이 고향에서 가져온 각종 그릇 30여 점이 출토됐다.
기장군 고촌유적과 강서구 분절패총에서도 왜인이 쓴 토기가 출토된 것으로 보아 일본에서 부산으로 향하는 왜인들의 뱃길은 끊임없이 이어졌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지난 5월 기준 부산에 거주하는 외국인은 4만 5000명에 이른다. 부산 시민 75명 중 1명꼴로, 외국인은 우리와 더불어 살아가는 이웃이다.

그렇다면 삼국시대에도 부산에 외국인이 살았을까? 기록으로 전하지는 않지만, 땅속에 잠들어 있던 ‘외래계 유물’을 통해 부산에 머문 외국인을 짐작할 수 있다. 삼국시대 부산지역에서 출토된 외래계 유물은 복천동 고분군에서 출토된 중국제 청자 잔 1점을 제외하면 모두 일본에서 건너온 것이다. 당시 철을 생산할 수 없었던 왜인들은 철과 선진문물을 입수하기 위해 한반도로 향하였다. 바다를 사이에 두고 일본과 마주한 부산의 지정학적 위치를 고려한다면, 삼국시대 부산에서 마주친 외국인 대부분은 ‘왜인’이었다. 당시 왜인이 거주한 곳은 어디였을까. 부산을 이끌던 최고 지배자들이 묻힌 복천동 고분군 아래, 국가사적으로 지정된 동래패총이 위치한 동래구 수안동·낙민동 일대로 추정된다. 현재 이곳은 수영만에서 직선거리로 6㎞가량 떨어진 내륙에 위치하지만, 조개무지를 뜻하는 유적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 삼국시대에는 이 일대까지 바닷물이 들어와 배가 드나들던 포구마을이었다.
1993년 부산박물관이 발굴 조사한 동래패총에서 가야인이 사용한 그릇과 함께 왜인들이 고향에서 가져온 각종 그릇 30여 점이 출토됐다. 대부분 파편이지만, 일본 ‘고훈시대(古墳時代)’에 생활용 토기로 쓴 ‘하지키(土師器)’이다. 하지키는 고운 흙을 빚어 기형을 만들고 그릇 내외면을 좁다란 나무판으로 긁어 매끄럽게 다듬은 것이 특징이다. 가야 사람들이 만든 생활용 토기와 비슷해 보이지만, 가야토기는 무늬를 새긴 나무판으로 두들겨 형태를 만든 흔적이 표면에 남아있어 하지키와 구별된다.
동래패총에서 출토된 이 항아리는 일본 산인(山陰)지방(현재 시마네현과 돗토리현 일대)에서 제작된 하지키이다. 갈색을 띠는 토기 본연의 빛깔을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몸체에는 그을음이 가득 묻었다. 아가리 안쪽에는 음식물이 타서 눌어붙어 있다. 아마도 일본 산인지방 출신의 왜인이 오래 이곳에 머무르며 밥을 짓고 반찬을 조리할 때마다 사용한 그릇이지 않았을까.
이 외에도 동래패총에서는 일본 규슈(九州)와 호쿠리쿠(北陸) 지방에서 만든 하지키가 확인됐다. 기장군 고촌유적과 강서구 분절패총에서도 왜인이 쓴 토기가 출토된 것으로 보아 일본에서 부산으로 향하는 왜인들의 뱃길은 끊임없이 이어졌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일본 각지에서 출발한 왜인들은 거센 파도를 헤치고 부산에 도착했다. 그들은 부산에 머물며 선적한 물품을 내리고 필요한 물품을 배에 실어 고향으로 향했다. 그렇게 부산은 고대부터 국제교역항의 면모를 서서히 갖추어 나갔다.
Copyright © 국제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