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 최초 슈투트가르트 입단·발레 오스카상… 발레 새 역사 쓴 ‘못난 발’
“이렇게 될 때까지 어떻게 참은 겁니까? 다시는 무대에 설 수 없을지도 몰라요.”
의사는 참 딱하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눈앞 사진 속 왼쪽 정강이뼈에 금이 가 있었다. 1999년, 당시 서른두 살의 독일 슈투트가르트 발레단 수석 무용수 강수진은 아시아인 최초로 ‘세계 무용의 오스카’라는 ‘브누아 드 라당스’ 최고 여성 무용수상을 받은 참이었다. 그런데 수상 뒤 첫 공연 ‘지젤’을 연습하던 중, 도저히 참을 수 없는 통증이 왼쪽 다리에서 온몸을 타고 올라왔다. 진단명은 스트레스성 골절. 무대 위에서 깃털처럼 가볍게 날아오르는 몸의 충격을 감당하느라 부러져 버린 뼈 조직은 속으로 곪아 있었다. 발레리나에겐 치명적 부상. 중학생 때 낯선 유럽으로 건너와 말로 다 못할 고생을 하며 수많은 고비를 넘었는데. 이제야 세계의 주목을 받으며 쏟아지는 러브콜과 꽉 찬 공연 스케줄, 약속된 영광의 자리에 섰는데, 그 모든 것이 한순간에 허물어질지도 몰랐다.
“벌써 한 5년쯤 전부터 아프다는 건 알고 있었어요. 하지만 쉬는 대신 계속 춤추기를 선택했어요. 멈춰 서면 안 될 것 같았거든요. 새로 부러진 게 아니라 오래 묵혀왔던 탓에 쉽게 낫지 않으리라는 것도 알았어요. 회복된다 해도 재활 과정이 쉬울 리 없고, 끝내 다시 춤을 출 수 있으리라는 보장 역시 아무도 할 수 없다는 것도.”
지난 3일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에서 만난 국립발레단 강수진(56) 단장은 “그런데 병상에 누워 아무리 생각해봐도 내게 발레 이상으로 기쁨과 흥분을 주는 일은 없더라”고 했다. 그때 평생 처음 머리카락을 아주 짧게 잘랐다. 다들 그를 위로하려고만 했지만,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의 동료 무용수이자 연인이던 지금의 남편 툰츠 쇼크만은 “포기하지 말라”고, “다시 춤출 수 있다”고 용기를 북돋웠다. “남편과 저는 지금도 서로를 ‘샤츠(schatz)’라고 불러요. 독일어로 ‘보물’이라는 뜻이에요.” 그리고 강수진은 1년 여 만에 다시 무대에 섰다. 거짓말 같은 부활이었다. 사람들은 그에게 ‘강철 나비’라는 별명을 붙였다. 강수진은 “그 뒤로도 딴 데는 다 깨져도 왼쪽 다리는 안 깨졌다. 내 몸에서 가장 튼튼한 부분”이라며 “그때 쉴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그 덕에 더 먼 길을 갈 수 있었다”고 했다. 그는 어쩌면 그 자신이 우리 현대사의 보물이다.
한국 최초 ‘발레 오스카상’ 브누아 드 라당스 수상
강수진은 발레를 배운 지 2년여 만인 1981년 중학생 때 모나코 왕립 발레학교 장학생이 돼 발레 유학을 떠났다. 발레는 만화 속 유럽 사람 춤인 줄 알던 시절이었다. 1985년엔 세계 최고 콩쿠르 중 하나인 스위스 로잔 콩쿠르에서 입상했다. 역시 한국인 최초였다. 그 직후 독일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에 역대 최연소 단원(만 18세)으로 입단 심사를 통과했고, 1986년 한국인으로 처음 입단했다.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은 전설적 드라마 발레 안무가 존 크랑코(1927~1973)가 세계적 무용단으로 키워낸 곳. 거기서 1997년 수석 무용수가 됐고, 1999년 ‘브누아 드 라당스’를 받았다.
강수진이 걸은 길은 곧 우리 발레의 역사였다. 수많은 후배가 그가 먼저 걸어 열어 놓은 길을 뒤따라 걸었다. 강수진 이후 이제 우리는 ‘브누아 드 라당스’ 수상자만 김주원(전 국립발레단 수석 무용수) 전 성신여대 교수, 김기민(러시아 마린스키 발레), 박세은(파리 오페라 발레), 올해의 강미선(유니버설발레단)까지 5명을 갖게 됐고, 전 세계 최고 발레단에 주역 무용수를 수두룩하게 내보낸 세계적 발레 강국이 됐다.
”다음 ‘줄리엣’은 너야” 물려받은 옷과 반지
강수진은 “내게 전부와 같은 발레를 빼앗길 것 같은 시련의 시간을 나는 ‘블랙홀’이라고 부른다”고 말한다. 첫 블랙홀은 1986년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에 들어간 뒤 찾아왔다. 발목 부상이었다. 다른 신입 단원들이 조금이라도 눈에 띄기 위해 목숨을 걸듯 절박하게 춤출 때 그 모습을 지켜봐야만 했다. “극장 옥상에 올라가면 저 아래로 뛰어내려 버릴까 하는 충동에 몸서리치던 시절”이었다.
발목이 낫자 강수진은 다시 발레에 자신을 던져 넣었다. 매일 15시간 연습하며 하루 네 켤레씩 토슈즈를 써서 극장 물품 담당자에게 ‘아껴서 써 달라’는 핀잔을 듣기도 했다. 코르 드 발레(군무 무용수)이던 1993년, 드라마 발레의 전설적 발레리나로 발레단 예술감독이 된 마르시아 하이데(86)가 그를 부르더니 말했다. “수진, 다음 ‘로미오와 줄리엣’의 ‘줄리엣’을 맡아.”
강수진 감독은 “하이데는 ‘줄리엣’을 연기할 때 입었던 의상도 내게 물려주더라”고 했다. “그때 저는 군무 중에서도 맨 뒷줄 무용수였거든요. 그런데도 즐겁게 춤추는 모습이 맘에 들었나 봐요. 지금도 저는 무용수들에게 자신 있게 말해요. ‘네가 무대 위 어디에 있어도 정말 즐거워서, 마음에서 우러나서 추면 알아볼 수 있다’고.” 하이데는 슈투트가르트 전 예술감독 존 크랑코에게 물려받은 반지도 이 즈음 강수진에게 물려줬다. 마치 불교의 선승(禪僧)이 제자에게 법(法)을 물려줄 때 그 상징으로 자기가 입던 가사(袈裟)와 공양 그릇 등 ‘의발(衣鉢)’을 물려주는 것처럼. 강 감독은 “지금도 평소보다 큰 에너지와 행운이 필요한 순간엔 이 반지를 낀다”며 웃었다. 강수진에게 힘을 주는 ‘절대 반지’다.
이후 유럽에서 강수진의 명성은 조금씩 높아졌다. 1997년 수석 무용수가 됐고, 1998년엔 독일 난(蘭) 재배협회가 신품종 난에 강 단장 이름을 붙여 헌정했다. ‘팔레노프시스 수진 강’이었다.
한국 일으켜 세운 ‘세상 가장 못난 발’
하루에도 수천 번 토슈즈 발끝으로 서면 발은 땀에 절어 물집이 생기고 피부가 허물어지고 발톱은 예사로 빠졌다. “압박 반창고를 붙이거나 휴지를 말아 넣고, 쇠고기를 발가락 사이에 끼워보기도 해요. 그래도 계속 굳은살이 생기면 잘라내야 하죠. 벗겨져서 피가 나고 다시 굳은살이 생기고, 또 굳고.”
발가락 관절이 튀어나오고 굳은살과 근육이 도드라지는 강수진의 발 사진은 남편이 1990년대 초 “이런 희귀한 발은 사진으로 남겨둬야 한다”며 찍어 집 안에 걸어뒀던 것. 2001년 한 방송 다큐멘터리에 나온 뒤 이 사진이 세상에 알려졌다. 외환 위기의 고통을 딛고 다시 뛰기 시작하던 시기, 사람들은 그 발에 담긴 고통, 고난을 노력으로 극복해낸 용기, 그 발 주인이 성취한 희망에 감동했다. 고3 교실에, 고시생의 책상 앞에 ‘세상에서 가장 못난 발’ 사진이 붙었고, 무용 평론가 장광열은 책 ‘당신의 발에 입 맞추고 싶습니다’를 쓰기도 했다. 강수진은 “기본은 변하지 않는다. 벼락치기로 되는 일은 없고, 거저 주는 떡도 없다”며 웃었다.
소품으로 쓰인 초상화... 한국 발레의 선장
그에게 ‘의발’을 전수한 슈투트가르트의 전설 마르시아 하이데처럼 강수진 역시 드라마 발레에 강했다. ‘로미오와 줄리엣’ ‘오네긴’과 함께 ‘카멜리아 레이디’는 강수진의 대표작이다. ‘카멜리아 레이디’는 오페라 ‘라트라비아타’처럼 일본 번역 제목 ‘춘희(椿姫)’로 우리나라에도 널리 알려진 알렉상드르 뒤마 피스(1824~1895)의 1848년 작 소설 ‘동백꽃(Camellia)을 든 여인’을 원작으로 하는 발레. 함부르크 발레단 예술감독을 지낸 세계 최고 수준의 안무가 존 노이마이어(84)가 안무했다. 2016년 강수진이 ‘오네긴’ 고별 무대에 선 뒤, 슈투트가르트 발레단 무용수와 스태프 모두는 ‘카멜리아 레이디’ 도입부의 소파 위에 소품으로 놓였던 주인공 역 강수진의 초상화를 그에게 선물했다. 액자 뒤에는 단원 한 사람 한 사람 모두 서명을 했다.
국립발레단에서 네 번째 3년 임기를 맞은 강수진 감독은 무엇보다 이제 더 자주 해외 공연을 통해 우리 국립발레단의 작품과 실력을 세계에 알리고 싶다. 지난 5월 독일 비스바덴의 100년 전통 축제인 5월 음악제 초청과 스위스 공연을 시작으로 2025년까지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북미 등에서 공연할 계획. 임기가 끝나기 전 그에게 큰 의미가 있는 ‘카멜리아 레이디’를 존 노이마이어와 함께 무대에 올릴 생각도 하고 있다. 노이마이어는 무용수와 발레단의 역량을 직접 보고 영감을 받아야만 배역을 맡기기로 유명하다.
“세대와 시대가 달라지고 있어요. 우리 국립발레단 실력은 충분하고 계속 향상되고 있습니다. 흐름에 뒤처지지 않도록 끌고 밀며 함께 세계로 나가고 싶어요.” ‘강철 나비’는 이제 한국 발레를 이끄는 선장이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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