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현우의 미세한 풍경] “자신 없으면 한 걸음 더”

한현우 문화전문기자 2023. 8. 8. 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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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 화장실에서 만난 표어… 어떤 공공 게시물보다 명료해
나이를 먹으며 자신 없는 일이 하나씩 늘어가고 있어
멀었던 노화의 길이 어느덧 보이지만… 한 걸음 더 다가서야겠다
일러스트=이철원

강원도 홍천 읍내 오일장에 들렀다가 중앙시장 화장실에서 이런 문구를 봤다. ‘자신 없으면 한 걸음 더.’ 근래 본 어떤 공공 게시물보다 직관적이면서 명료한 표어였다. 메시지의 타깃도 인구지리학적 특성을 잘 반영하고 있었다. 시골 읍내 화장실은 자신 넘치는 세대의 방자한 방사(放射)보다 자신 없는 사람들의 보잘것없는 배출 빈도가 훨씬 높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미 충분한 근접 위치에 서 있었지만 과연 자신 있는지 다시 생각해봤다. 나의 곡선은 언젠가부터 뚜렷한 포물선을 그려왔다. 마무리 단계에서는 하향세가 두드러져 일부러 고각(高角) 발사한 뒤 동해상에 떨어뜨리는 북한 대륙간탄도미사일의 낙하 궤도와도 비슷했다.

그에 맞춰 언젠가부터 시끄러운 TV 광고 가운데서도 남자는 지구력 어쩌고 하는 소리가 도드라져 들리기 시작했고, 미국 남동해안에서 자라는 야자수를 쏘팔메토라고 부른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나는 조용히 변기 앞으로 일보 전진했다.

어른들께는 송구스러운 말씀이지만, 나이를 먹으며 자신 없는 일이 하나씩 늘어가고 있다. 컴퓨터를 많이 들여다보는 직업 때문인지 원시(遠視)가 40대 초에 찾아와 돋보기를 쓴 지 꽤 됐다. 얼마 전엔 마트에서 소면을 샀는데 가격표에 적힌 세일 내역이 너무 깨알 같아 평소보다 싸겠지 하고 그냥 집어 들었다. 계산대에 이르러서야 그게 1+1 세일이었고 두 개를 들고 와야 했다는 걸 알았다. 부엌 환풍기 퓨즈가 끊어져 전파사에 사러 갔을 땐 돋보기로도 퓨즈 규격 글씨가 보이지 않아 사진 찍어 확대하는 수밖에 없었다. 시력에 자신 없어진 나는 카드 모양 돋보기를 늘 지갑에 넣어 다닌다.

나는 자동차 블랙박스에 찍힌 사고 영상을 보며 혀를 차는 TV 프로그램을 보지 않는다. 그걸 보노라면 세상에 미친 사람이 너무나 많아 운전할 자신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도로에서 직접 마주치는 광인(狂人)들만 해도 괴로운데 그보다 훨씬 다양하고 괴이한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화면으로 확인하는 일은 끔찍하다. 나는 1초 빨리 가려고 경적을 울리거나 이른바 칼치기 하는 차를 만났을 때 더 이상 창문을 열어 그 운전석의 낯짝을 확인하지 않는다. 죽고 싶어 오장육부가 뒤틀린 사람들과 엮여 시간과 마음을 축낼 자신이 없다.

미국 작가 노라 에프론은 69세에 펴낸 회고록 ‘내게는 수많은 실패작들이 있다’에서 “육체적인 것이 아니면서 정말 늙었다는 기분이 들 때”를 몇 가지 꼽았다. 같은 이야기를 반복해서 말할 때, “내가 젊었을 때는”이라는 표현을 자주 쓸 때, 농담을 바로 이해하지 못할 때, 영화나 연극을 두 번째로 보러 갔는데 생전 처음 보는 것 같을 때라고 했다. 그는 “이런 일들은 나를 슬프고 애석하게 하며 최악의 노화에 다가서고 있음을 느끼게 한다”고 했다.

나는 에프론에게 크게 공감한다. 젊은 후배들과 만나면 나도 모르게 “우리 때는 말이야” 하고 말을 꺼내고는 아차, 하곤 한다. 나의 선배들은 원고지에 기사 쓰고 활자로 신문 만들던 시절을 즐겨 말했지만 나는 컴퓨터가 인터넷에 연결돼 있지 않던 시절을 후배들에게 말하지 않는다. 옛날이야기를 하는 것이 그렇게 못난 일인지 나는 모르겠다. 다만 굳이 구닥다리 소리 듣는 모험을 할 자신이 없다.

그래서 나이 차가 적은 선후배들, 속칭 ‘같이 늙어가는 처지’끼리 어울리게 된다. 이들과 만나는 자리는 ‘나 때는 타령’의 범벅이며 그 끝은 늘 “요즘 같으면 어림없지” 같은 끌탕으로 수렴한다. 예전에 한 이야기 또 하는 건 이런 모임의 전형적 특징이다. 그 얘기를 이미 했다는 사실을 잊은 건지, 다시 들어도 재미있어서 또 하는 건지, 최근에는 재미있는 일이 없었던 건지는 불분명하다. 이야기가 재탕될 때마다 조금씩 그 내용이나 일부 고유명사가 달라질 때는 약간 우울한 생각도 든다. 도중에 “아, 그거 뭐더라?” 하는 추임새 없이 이야기가 완결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나는 노인으로 불리기엔 아직 멀었지만 내가 달리는 레인이 노화와 죽음의 먼 주로(走路)로 이어져 있음을 문득문득 느낀다. 까마득히 멀어서 보이지도 않던 그 길이 어느덧 지평선의 점처럼 보이는 것 같기도 하다.

몇 년이나 흙 속에서 살았던 매미가 한 달 삶의 최후를 앞두고 맹렬히 운다. 교미할 암컷을 찾아내야만 굼벵이 세월에 후회가 없을 테니 귀청 찢는 세레나데가 구슬프다. 매미가 다 죽으면 여름이 끝나고 더위가 꺾이면 또 한 해가 포물선을 그리며 저물 것이다. 한 걸음 더 다가서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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