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오 사설] 흉악범죄를 어떻게 보도할 것인가
미디어오늘 1413호 사설
[미디어오늘 미디어오늘]
2007년 4월16일 조승희의 버지니아 공대 총기 사건이 발생했다. 조승희가 한국계였기 때문에 미국 언론뿐 아니라 한국 언론도 비중있게 사건을 다뤘다.
사건 초기 범죄 잔혹성에 초점을 맞춘 보도가 양국 언론에서 쏟아졌다. 그리고 일주일이 지난 후 조승희가 누구인지, 그리고 범행 원인을 어디서 찾아야 하는지 심층있는 보도가 나오기 시작했는데 양국 언론의 보도는 차이를 드러냈다.
한국 언론은 조승희의 친척과 동창생을 만나 그가 누구인지 왜 범행에 나섰는지 보도하면서 그가 사회와 동떨어져 고립된 인물임을 강조했다. 반면 뉴욕타임스는 27명의 학생과 5명의 교수를 만나 그의 범죄가 '침묵'과 깊이 관련돼 있음을 일관성있게 제시했다.
한국언론이 조승희 인물에 대한 새로운 정보가 나오면 발빠르게 보도한 반면 뉴욕타임스는 철저히 범행의 원인이 무엇이었는지 한 주제를 추적했다. 침묵이 조승희의 악마성과 연관돼 있었고, 범행의 배경 중 하나일 수 있다는 가정을 증언과 증거로 입증하려고 했다.(「뉴스스토리」, 박재영 저)
2013년 4월15일 보스턴 마라톤 폭탄 테러 사건이 발생했다. 사망자가 3명이었고, 부상자만 183명이었다. 수사당국은 범행 현장 CCTV를 분석해 용의자들(형제)을 특정했다.
체포과정에서 범인들은 극렬히 저항했다. 형은 죽고 동생은 검거됐다. 해당 사건은 미국 언론의 문제를 드러내는 상징적 사건으로 기록됐다. 한 언론이 사우디아라비아 국적 남성 한명을 범인으로 검거했다고 보도했지만 무혐의로 밝혀졌다. 아랍인이 범죄에 연관됐다는 편견이 작용한 결과였다. 이슬람 근본주의자로 키워졌다는 가족의 인터뷰에 따라 용의자들의 테러가 정치적 배경과 깊이 연관돼 있고 이슬람 정부와 연결돼 있다고 했지만 사실은 달랐다.
보스턴 글로브는 용의자들이 어떻게 미국에 정착하고 어떤 삶을 살았는지 추적했다. 용의자의 할아버지가 소련에서 추방을 당하는 과정에서 생존자였다는 증언, 그의 아들이 난민 자격을 얻어 미국 보스턴으로 와서 이혼에 이르기까지 여정, 용의자 형이 복싱에 재능을 보여 올림픽에 출전하려고 했지만 미국 시민권이 없어 좌절된 내용 등을 취재해 그의 범행이 미국 사회에 불만을 갖고 범행에 옮긴 자생적 테러로 결론지었다.
신림역과 서현역에서 흉기 난동 살인사건이 발생했다. 사건 초기 범죄 잔혹성을 보도하는 건 정보 전달 차원으로 이해된다. 최초 사망자가 나오지 않았음에도 사망했다라고 오보를 낸 것은 사실 확인 규율을 지키지 못한 것이지만 사건의 급박함이 만들어냈다고도 볼 수 있다.
문제는 정부와 수사당국이 내놓은 강력 대책이 전부인 양 천편일률적인 보도에 머무르고 사건을 단순화시킨다는데 있다. 흉악범죄가 발생하면 언론에 기대하는 역할이 적지 않다. 특히 언론은 범죄 재발을 막기 위한 대책이 나오도록 원인을 추적하는 보도를 내놔야 한다.
그동안 우리 언론은 흉악범죄를 다루면서 피의자 일방 주장을 부각시키거나 범죄의 선정적인 면을 강조했다. 그러자 시민사회에서 나온 경고가 '피의자에 서사를 부여하지 마라'였고 언론의 금언으로 자리잡았다. 피의자와 관련된 새로운 정보를 발굴하면 속보를 내걸어 주목을 받아 조회수를 끌어올리려는 얄팍한 수나 범죄의 잔혹성과 선정성을 극대화하는 보도에 제동을 걸기 위한 장치로서 피의자 서사 부여 금지 주장이 설득력을 얻었던 것이다.
다만 범행 원인을 취재하는 것과 피의자 서사를 부여하는 것과는 구분돼야 한다. 원인을 파헤치는 것은 범죄의 잔혹성과 관련한 인간 본질에 대한 탐구이면서 범죄를 예방하는 첫걸음이다. 수사보고서가 담지 못한 범죄 배경을 심층 취재하고 정부와 수사 당국이 제대로 된 대책을 내놓도록 징검다리 역할을 하는 게 필요하다.
언론이 흉악범죄를 '묻지마 범죄'로 규정하는 것도 고민해봐야 한다. 범죄 원인은 단편적일 수도 있고, 복합적일 수 있다. 개인 특성과 사회경제적 요인이 동시에 작용할 수 있다.
애초부터 묻지마 범죄라는 건 없다. '묻지마 범죄'라는 용어를 일상적으로 쓰면 원인을 가리지 않은 '묻지마 대책'만 나올 수밖에 없다. 흉악범죄를 어떻게 보도할 것인가라는 물음에 정답은 없지만 해답을 찾고자 고민하는 모습이 더욱 절실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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