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철의 꽃이야기] 작가 박경리가 편애한 ‘옥잠화 여인’

김민철 논설위원 2023. 8. 8. 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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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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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리 대하소설 ‘토지’에서 식민지 조선의 신여성 임명희는 조연급이다. 그런데도 토지 3~5부에 자주 등장하고 좋게 묘사되는 인물 중 하나다. 소설에서 서희, 유인실, 양현 등과 함께 작가가 빼어난 미인으로 묘사한 여성이기도 하다.

임명희는 신분이 중인 출신이었지만 일제강점기 일본에서 대학을 나온 똑똑한 여성이었다. 혼기에 이르렀을 때 임명희는 마음에 둔 이상현에게 청혼 아닌 청혼을 하면서 떠보지만 이상현이 마음이 없는 것을 알고 친일파 집안의 장남 조용하와 결혼한다. 원래 조용하의 동생 조찬하가 임명희에게 마음에 두었는데 형 조용하가 이를 알고 선수를 친 것이었다. 그러면서 결혼한 후 임명희와 동생 찬하의 관계를 끊임없이 의심하며 임명희를 모욕하고 학대한다. 견디다 못한 명희는 이혼을 선언하고 남해안 통영에 내려가 지낸다. 그리고 조용하가 암에 걸려 자살한 다음 상당한 재산을 상속받아 서울에서 유치원을 경영하며 지낸다.

이 정도 역할인데도 작가는 자신이 창조한 인물 임명희에 상당한 호감을 갖고 있음을 여러 대목에서 드러내고 있다. 임명희를 옥잠화에 비유하는 대목도 그중 하나다. 명희가 유치원을 운영할 때 일본 유학 선배 강선혜가 찾아와 수다를 떨고 있는데, 어디선가 좋은 향기가 솔솔 풍겨온다. 집 뒤뜰에 옥잠화가 피어 있었다.

<”한데 이게 무슨 냄새지? 아까부터 나는데.”

“냄새라니요?”

“향수는 아닌 것 같고.”

“아아, 옥잠화예요.”

“옥잠화라니.”

“뒤뜰에 피었어요. 지금이 한창이라 향기가 짙어요.”

“어디.”

강선혜는 일어나서 뒤뜰 쪽으로 다가가 내다본다. 하얀 옥잠화가 꽃대를 따라 맺어가며 시작 부분에서는 활짝 꽃이 피어 있었다. 나무 그늘 아래 꽤 여러 포기 옥잠화는 무리지어 피어 있었다.

“순백이라는 말은 아마도 옥잠화를 두고 표현했을거야. 저런 흰빛은 다른 데서 찾아볼 수 없다. 눈도 저 빛은 아니야. 어떤 꽃도 저 같은 흰빛으론 피지 않아. 백합 따위는 옥잠화에 비하면 지저분하지.”

코를 벌름거리며 냄새에 취한 듯, 선혜는 침이 마르게 옥잠화를 찬송하다가 풀어진 치마끈을 여미고 다리를 쭉 뻗는다.

“옛날의 임명희가 저 옥잠화 같았지.”> (17권 100쪽)

옥잠화. 여름에 순백의 꽃을 피운다. 향기도 좋다.

작가는 임명희에 옥잠화같은 ‘순백’의 이미지와 좋은 향기를 부여하고 싶었던 것 같다. 임명희를 통해 식민지 시대 ‘여성의 삶’을 엿볼 수 있기는 있지만 재력가 집안 여성이라는 점에서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편애에 가깝게 임명희에 대해 애정을 숨기지 않는 것이다. 막판에 임명희가 지리산 조직에 거금인 5000원을 희사하는 것도 작가의 임명희에 대한 애정을 반영한 것 아닌가 싶다.

김윤식 서울대 명예교수는 책 ‘박경리와 토지’에서 “임명희는 신여성으로 계층과 신교육과 식민지적 현실이라는 조건 아래에서 주체성을 세우지 못하고 방랑하는 인물”이라며 “아주 분방하나 자기를 세우지 못한 인물이어서 그녀가 닿은 어떤 인물이나 사건도 문제투성이로 그대로 남을 뿐이다. 확고부동한 인물상인 최서희와는 반대편에 섰다”고 했다.

옥잠화는 여름에 공원이나 화단에서 순백의 꽃을 피운다. 소설에 나오듯 ‘다른 데서 찾아볼 수 없’는 흰빛이다. 중국이 원산지인 꽃으로, 옥잠화라는 이름은 길게 나온 꽃 모양이 옥비녀 같다고 붙인 것이다.

옥잠화는 해가 지는 오후에 꽃이 피었다가 아침에 오므라드는 야행성 꽃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흔히 보는 것은 시든 모습일 수밖에 없다. 어쩌다 밤에 옥잠화 꽃을 보면 언제 그랬냐는 듯 아주 싱그러운 모습으로 꽃이 핀 것을 볼 수 있다. 옥잠화는 소설에 나오는 것처럼, 밤에 피는 꽃답게 향기도 매우 좋다.

밤에 핀 옥잠화.

옥잠화와 비슷하게 생긴 꽃으로 비비추가 있다. 옥잠화는 순백의 꽃이지만 비비추 꽃은 연보라색이다. 공원이나 화단에 작은 나팔처럼 생긴 연보라색 꽃송이가 꽃대에 줄줄이 핀 꽃이 비비추다. 꽃줄기를 따라 옆을 향해 피는 것이 비비추의 특징이다. 비비추는 원래 산이나 강가에서 자라는 식물이었다. 그런데 우리가 요즘 화단 등에서 흔히 볼 수 있으니 원예종으로 성공한 대표적인 야생화 중 하나라고 할 수 있겠다.

비비추.

비비추라는 이름은 봄에 새로 난 잎이 ‘비비’ 꼬여 있는 취 종류라는 뜻에서 온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러니까 ‘비비취’에서 비비추로 바뀐 것 같다는 것이다. 비비추와 옥잠화는 잎 모양으로도 구분할 수 있다. 비비추 잎은 길고 뾰족한 편이고 옥잠화 잎은 둥근 편이다. 잎 색깔도 옥잠화는 연두색에 가깝지만 비비추는 진한 녹색인 점도 다르다.

비비추, 옥잠화를 포함한 비비추 집안 속명(屬名)이 ‘호스타(Hosta)’다. 그래서 개량한 비비추 종류를 뭉뚱그려 그냥 호스타라고 부르기도 한다. 호스타 식물은 원래 한국, 중국, 일본에만 분포하는 동아시아 특산식물이다. 그런데 미국과 유럽 등 서양에서 비비추속 식물이 판매 1위를 차지할 정도로 인기가 높다고 한다. 그래서 세계적으로 다양한 원예품종을 개발해 심어 가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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