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은수의이책만은꼭] 패자를 영웅으로 대접하는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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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메로스의 '일리아스'(아카넷 펴냄) 번역판이 새로 나왔다.
번역자는 이준석 방송대 교수, 국내에서 드물게 호메로스를 전공한 학자이다.
두 번역판은 사뭇 다르다.
두 번역 사이에 낫고 모자람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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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대 정치에 몰두하는 세계가 주목해야
두 번역판은 사뭇 다르다. 천병희 번역은 우리 독자가 읽기 쉽게 말투를 유려하게 다듬는 걸 중시한 대중적 번역이다. 이준석은 호메로스의 본래 표현에 최대한 가깝게 옮기는 데 집중했다. 덕분에 표현이 다소 생경하다. 가령, 천병희가 ‘물 흐르는 듯 거침없이 말했다’로 옮긴 것을 이준석은 ‘날개 돋친 말을 건넸다’로 옮겼다. 학자의 번역이다.
두 번역 사이에 낫고 모자람은 없다. 새 판본으로 읽으면서 시적 표현은 낯설게 보일지라도, 그 자체를 음미하면 여러 가지 다른 생각을 떠올릴 수 있음을 새삼 깨닫는다. ‘날개 돋친 말’은 어쩐지 신적인 언어, 즉 식상한 일상어를 넘어 자유롭고 신비롭게 날아다니는 말을 떠올리게 한다. 그런 말은 우리의 굳어진 정신을 뒤흔든다. 표현의 차이를 경이롭게 생각하고, 그 이유를 탐구하는 마음이 공부의 시작이다.
전체 24권, 1만5693행에 달하는 이 웅장한 서사시에서 가장 매력적인 인물은 아킬레우스보다 헥토르다. 이 인물은 다른 그리스신화엔 아예 나오지 않는다. 호메로스가 창조한 인물이다. 이 작품을 아킬레우스가 성숙하는 이야기 대신, 적대적 영웅인 헥토르를 중심으로 살피는 일은 작품을 읽는 또 다른 재미다.
작품 내내 헥토르는 진지하고 비장하다. 그리스군이 쳐들어온 지 10년간 트로이는 총력을 다해 버티는 중이다. 왕자 쉰 명이 모두 전사했을 정도다. 약소국 트로이의 총사령관인 헥토르는 아무리 애써도 그리스 침략자들을 도저히 이길 수 없음을 이미 안다. “나도 물론 내 헤아림으로, 기백으로 잘 알아요. 파멸을 맞을 날이 오리라는 것을!”
이어서 그는 소매를 붙잡는 아내에게 말한다. “트로이아인들이 앞으로 겪을 고통도, 당신이 겪을 그 고통만큼 나를 아프게 하지는 않아요.” 아킬레우스는 비정하고 잔혹하지만, 헥토르는 다정하고 온화한 사람이다. 그러나 그에겐 목숨보다 소중한 게 있다. 아가멤논이 재물과 노예를 위해, 아킬레우스가 명예와 복수를 위해 싸움에 나선다면, 그는 가족을 지키고 시민을 돌보며 조국을 수호하기 위해 전장에 뛰어든다. 한마디로, 그는 고결하다.
작품 3분의 1가량은 헥토르의 압도적인 활약을 다룬다. 그는 투구에 창을 맞아 정신을 잃고 가슴에 바위를 얻어맞고 쓰러지는 등 몇 차례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그리스군을 거의 멸망 직전까지 몰아붙인다. 절망과 희망 사이를 오가면서 그는 연약함을 용기로 극복하고 절망을 희망으로 이기려고 눈물겹게 애쓰다 쓰러진다. 패배할 줄 알면서도 운명에 맞서 싸우는 것, 이것이 위대함이다.
호메로스는 마지막 장을 헥토르에게 바쳐 그를 애도한다. 증오와 폭력에 사로잡혀 그의 시신을 전차에 매달아 끌면서 모욕하는 아킬레우스에게 연민과 동정을 깨닫게 하고, 헥토르에게 성대한 장례식을 베풂으로써 우리가 고결한 인간을 어찌 대해야 하는지를 가르친다. 적을 관용하고 그 장점을 존중하고 수용할 때 문명은 성숙한다. 패자를 영웅으로 대접할 줄 아는 아량이 그리스를 번영하게 했다. 적대의 정치에만 몰두하는 오늘의 세계가 주목해야 할 점이다.
장은수 편집문화실험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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