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칼럼] 폭염이 알려주는 것
‘찌는 듯한 더위’ 같은 오래된 표현으로는 담아내기 부족할 정도의 폭염이다. 전기에너지를 사용하고 온실가스를 배출하는 에어컨이 결국 기후변화에 악영향을 끼친다는 가책을 느끼면서도, 당장의 더위를 견디기 힘드니 에어컨을 찾는 모순이 계속되는 나날이다.
재해 수준에 이른 폭염은 개인의 나약함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의 문제점과 약한 부분을 집약적으로 드러내는 듯하다. 기후변화를 부정하는 가짜뉴스는 굳이 구체적으로 언급해서 키워주고 싶지 않다. 기후변화에 대한 국제적 대응은 필요하고 좋은 일이지만, 산업화 과정에서 이미 거대한 탄소 발자국을 남긴 국가들과, 선진국들은 유지하기 힘든 생산기지 역할을 하는 개발도상국들이 공평하게 부담을 나누는지 의문이다.
세상을 바꿀 혁신으로 여겨지는 인공지능(AI) 같은 기술은 상당한 온실가스 배출을 유발하지만, 이를 개발하는 지식노동자들은 폭염의 영향과는 거의 무관하다. 하지만 건설 현장, 대형마트나 물류센터에서 일하는 육체노동자, 농장에서 땀 흘리는 노인이나 이주노동자, 더위를 피하며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곳을 찾아 지하철역으로 향하는 저소득 노년층은 폭염을 피할 길이 없다.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는 8월1일 폭염 위기경보 수준을 가장 높은 ‘심각’ 단계로 조정하며, 사회 취약계층, 공사장 야외근로자, 고령 농업인을 3대 취약분야로 명시했다.
그 자체로는 기후변화와 관련이 없어 보이는 영역에서 폭염으로 인해 문제가 드러나기도 한다. 나무 한 그루 없는 곳에서 진행 중인 ‘세계스카우트 잼버리’를 통해 행정조직의 무리한 의사결정이나 집행력 결여가 밝혀졌다. 폭염에 대한 기초적인 대비조차 돼 있지 않은 상황을 정신력으로 극복할 수 있는 어려움 정도로 여기는 발언을 통해 우리 사회에 아직 남아 있는 후진적 사고가 드러나기도 했다.
미국 뉴욕대 사회학과 교수 에릭 클라이넨버그의 명저 <폭염사회>는 1995년 7월에 1주일 동안 700명 이상의 목숨을 앗아간 시카고 폭염을 분석한다. 연구자는 온열질환으로 갑자기 쓰러져 죽는 것만 폭염으로 인한 사망이 아니며, 더위가 천천히 눈에 띄지 않게 사람의 목숨을 앗아가는 현실을 드러냈다. 폭염으로 인한 사망자는 대부분 노인, 빈곤층, 1인 가구 등 고립된 사람들이었고, 인구 구성이나 지리적 조건이 비슷한 두 지역 사이에서도 공동체의 역할에 따라 사망자 수가 상당히 달라졌다는 분석은 실로 예리하다. 폭염은 자연재해일 뿐만 아니라 사회적 재난이고, 이를 극복할 정치적 의지가 있는지 여부가 중요하다는 것이 이 책의 묵직한 결론이다.
이는 인종차별, 빈곤 등 미국 대도시의 전형적 문제를 모두 보여주는 시카고 같은 오래된 도시의 문제만은 아니다. 날씨가 대체로 극단적이지 않은 미국 북서부 태평양 연안, 워싱턴주의 시애틀이나 오리건주의 포틀랜드에도 재작년에 기록적 폭염이 덮쳐 포틀랜드 지역의 기온이 46도 이상으로 치솟기도 했다. 이때도 희생자의 대부분은 1인 가구, 공동주택 거주자, 70대 이상 노인 등 고립된 사람들이었다. 미국에서 가장 진보적인 도시, 이른바 ‘힙스터’의 성지처럼 여겨지는 포틀랜드에서조차 부유한 지역과 그렇지 않은 지역 간에 약 10도의 실질적 기온 차이를 보였다고 한다. 이해하기 힘든 이런 결과는 지역 개발과 관리가 상대적으로 부실한 저소득층 거주 지역은 가로수 같은 조경이 부족해 사람들이 폭염에 그대로 노출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런 문제가 우리라고 다를까 싶다.
<폭염사회>의 부제는 ‘시카고 폭염 사태의 사회적 부검’이다. 부검을 통해 사인을 밝혀내는 것처럼, 사회적 부검을 통해 사회적 문제의 연원을 찾아간다는 뜻이다. 단순히 자연현상이라고 하기에는 삶에 큰 영향을 미치는 폭염을 통해 우리 사회의 약한 고리를 밝혀내는 사회적 부검을 실시간으로 보는 느낌이다. 노동자의 건강을 위협할 정도인 극한의 노동조건이 어디에 있는지, 행정력을 쏟아 살펴야 할 취약한 사람들이 어느 곳에 있는지 낱낱이 드러나고 있다. 이런 진단 결과를 받아들고도 무시한다면, 앞으로 무너지는 부분들은 더욱 늘어나고 사회의 지속 가능성은 그만큼 떨어질 것이다.
기후변화가 불가역적 지점을 지난 것인지 아닌지 따지기 전에, 어차피 이런 추세는 막을 수 없다고 절망하는 대신, 지금 여기에 드러난 문제점을 해결해 나가면 좋겠다. 인류가 수백년을 찍어 온 탄소 발자국이 이렇게 빨리 심각한 결과로 다가올 줄 몰랐던 것처럼, 지금 성실하게 하는 작은 일이 우리의 미래를 어떻게 바꿀 수 있을지 아무도 모르니까 말이다.
유정훈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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