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녘 코앞인 교동도에서 평화와 통일 감수성 키워요”

강성만 2023. 8. 7. 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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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짬][짬] 남북평화재단 경인본부 김의중 상임대표
김의중 상임대표가 난정평화교육원 전시실에서 사진을 찍고 있다. 강성만 선임기자

“인천 강화군 교동도는 대한민국에서 북한 땅이 제일 가깝게 보이는 곳이죠. 여기 망향대에서 보면 북한 연백 땅이 한눈에 들어와요. 한강하구 사이로 불과 2.6㎞ 거리죠. 교동도와 연백군 사이 한강하구는 세계 유일의 평화수역입니다. 70년 전 정전협정 때 한강하구는 선을 긋지 않고 공동활용하기로 해 평화수역이라고 불렸어요.”

지난 6월30일 정식 개원한 인천시교육청 난정평화교육원(원장 이종태) 김의중(76) 운영위원장 말이다. 2019년 폐교한 난정초를 리모델링해 ‘평화교육을 위한 숙박형 교육시설’로 탈바꿈한 이 교육원은 국내 교육청의 첫 평화교육전문기관이다. 130명까지 숙식할 수 있으며 상주 직원은 15명이다. ‘평화·공존을 실천하는 세계시민 양성’을 목표로 학생과 시민 대상으로 철책선과 방공호 등 현장체험과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학생만 아니라 시민·공무원들도 찾아 분단 현실을 체험하고 통일 감수성도 키우면 좋겠어요. 지난달 26~27일에도 서울과 인천 시민사회단체에서 150분이 찾아 하루 머물다 갔죠.”

2008년 남북평화재단 경인본부를 만들어 지금껏 상임대표로 이끌어온 김 대표는 공단 지역인 인천 부평 작전동 교회에서 40년 이상 사역한 뒤 2018년 은퇴한 감리교단 소속 목사이기도 하다.

지난달 28일 평화교육원에서 김 대표를 만났다.

난정평화교육원 생활동.
난정평화교육원 교육동.

김 대표는 은퇴 뒤 바로 고향 강화군 내가면으로 돌아와 이층집을 짓기 시작했다. 그가 ‘평화 나그네 집’으로 부르는 이 건물 1층 70평은 평화를 염원하는 그의 꿈을 담은 전시실과 방문객을 위한 숙소 3실을 갖추고 있다. “평화와 통일을 바라는 사람들을 맞아 함께 담소하고 교류할 목적으로 만들었죠.”

강화도 서쪽에서 다리를 건너 접근할 수 있는 교동도의 폐교를 평화교육의 장으로 만든다는 발상도 그의 머릿속에서 나왔단다. 연산군 유배지이기도 했던 이 섬은 현재 사방이 철책으로 막혀 있다. 남과 북이 한강하구를 함께 활용할 길을 터준 정전협정 조문과는 동떨어진 현실이다.

“2019년 제가 인천평화도시조성위원회 위원장을 할 때였어요. 난정초 폐교 소식을 듣고 지역 지도자들과 학교를 답사하고 평화교육원 설립에 뜻을 모았죠. 바로 설립 추진위를 구성하고 제가 위원장을 맡았어요. (이 사업을) 도성훈 인천시교육감이 전적으로 후원해 4년 공사 끝에 지난 6월 완공식을 했어요.” 숙소용 3층 건물과 전시·교육 등에 활용할 2층 건물과 평화정원까지 갖춘 이 교육원 건립에 대략 200억원가량이 들었단다. 그는 올해 초 폐교된 교동도 지석 분교 자리에도 세계 평화교육을 위한 시설을 만드는 쪽으로 인천시교육청과 협의 중이라고 밝혔다.

평화수역 속 사방 철책인 교동도
폐교에 난정평화교육원 설립 주도
교육청 첫 평화교육전문기관

아버지 월북 뒤 연좌제 굴레 고초
부평에서 40여년 ‘노동자 목회’
2008년 북쪽과 배농장 조성 합의
“통일까지 평화운동가로 살 터”

스스로 보수적인 목사라는 김 대표의 소원은 “통일이 될 때까지 자칭 평화주의자, 평화운동가로 사는 것”이다. 6년 전엔 민간 남북교류 부문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그는 2008년에 북한 민족경제협력연합회와 약 10만평의 배 농장을 평양 대성구역에 조성하기로 합의하고 그해에 1만 평에 심을 배 묘목 5천주와 비료 3천포를 북에 보냈다. 남북평화재단 경인본부도 이 사업 추진을 위해 만들었다. 하지만 2010년 5·24 대북제재로 더 이상의 지원은 중단됐다. 그는 앞서 1993년에는 중국복지후원회를 만들어 중국 동북삼성 지역과 베이징에 장애인 복지관이나 양로원, 학교 설립 후원을 해왔다. “80년대 후반부터 조선족 노동자들이 교회를 찾아 급여나 자녀 문제를 호소했어요. 그때부터 중국 내 조선족 지원 사업 등에 관심을 갖게 되었죠.”

특히 그가 김포시 배 농가와 함께 1999년 중국 베이징시에 지원한 배 묘목과 비료는 북한과의 가교 구실을 했다. “중국에서 배 농사가 잘 안된다는 말을 듣고 묘목과 기술 지원을 해 베이징시에 10만 평 배 농장을 조성했는데요. 여기 배가 ‘황금 배’라고 불릴 만큼 잘 자랐어요. 이 소식을 2002년에 중국 당국으로부터 전해 들은 북한 쪽에서 주중 한국 대사관을 통해 저를 수소문했다고 해요. 배 농장 조성에 도움을 얻으려고요.”

그가 평화를 염원하는 데는 남다른 가족사의 영향도 있을 듯하다. 평생 얼굴 한 번 보지 못한 그의 부친은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을 하다 1948년 단독정부 수립 뒤 월북했다. 모친은 한국전쟁이 터지자 좌익 가족에 대한 보복을 우려해 17살, 3살(김 대표) 두 아들을 살리려고 북으로 갔다가 평양에서 미군 폭격을 맞아 피해다니다 큰아들과 헤어지고 강화로 돌아온 뒤 2년 옥살이를 했다. “폭격 통에 사라진 형이 고향 집으로 올 수 있다고 생각하신 거죠. 2005년 이산가족 상봉 때 북의 형수와 조카를 만났어요. 아버지는 한국전쟁 때, 형님은 상봉 2년 전에 별세하셨더군요.”

한국전쟁 뒤 김 대표는 연좌제라는 ‘잔인한 형벌’과 마주했다. “제가 초등 6학년 때 어머니가 ‘우리가 살길은 기독교인이 되는 것밖에 없다. 앞으론 제사도 정리하겠다’고 하시더군요. 그리고 교회를 다녔죠. 동네 교회도 그 전에는 우리 모자에게 전도하지 않았어요. 빨갱이 가족이라고요.” 그의 모친은 늘 아들에게 “너는 커서 우리와 처지가 비슷한 과부나 고아처럼 외로운 사람들을 위해 살아라”고 당부했단다. “고교 졸업 무렵 교회 목사님께서 연좌제 아래에서는 너는 꿈이 없으니 목회자가 되는 게 좋겠다고 하시더군요. 어머니도 눈물을 흘리며 그 길을 가라고 권하셨죠.”

1977년부터 부평 작전동 교회를 개척해 ‘중형교회’로 키웠던 그는 연좌제 굴레를 벗은 1980년대에 인천 도시산업선교회(산선) 이사장을 맡아 20년 이상 재직했다. “제가 부평 공단에서 노동자 목회를 하던 70년대 후반에 당시 인천 산선 총무인 김동완 목사와 김근태 간사가 함께하자는 요청을 많이 했어요. 하지만 당시는 연좌제 굴레에 있던 터라 받아들일 수 없었죠.”

그는 인터뷰를 마치며 이런 바람을 나타냈다. “앞으로 교동도에 약 10평 규모로 작게 ‘평화통일기도 교회’를 만들고 싶어요. 여기서 한국의 모든 기독교인들이 평화와 통일을 위한 기도를 드리기를 소원합니다.” 난정평화교육원 문의 (032)621-9950.

강성만 선임기자 sungm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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