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1·3면 잇단 비판에 노 대통령 “가서 싸우세요”

한겨레 2023. 8. 7. 1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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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찾아서] 참여정부 천일야화 27화 1톱3전의 폭탄
삼성전자 수도권 공장 증설 보류가 결정되자 중앙일보가 참여정부 청와대와 이정우 정책실장 공세에 나섰다. 그래픽 성기령 기자 grgr@hani.co.kr

2003년 7월3일(목) 아침 중앙일보 1면 톱+3면 전면(1톱3전)으로 나를 공격하는 기사가 났다. 언론에서 투척하는 가장 강력한 폭탄이 1톱3전이라고 한다. ‘정부 노사정책 헷갈린다’는 제목 하에 ‘대통령은 영미식, 정책실장은 유럽식’이라고 부제를 달았다. 대통령과 정책실장이 다른 소리를 내니 정책 혼선이라는 비판이다. 내용을 보니 별 근거도 없는 의도적, 악의적 공격이었다. 삼성전자 공장 증설(제19화 수도권 공장 증설 참조)을 보류한 데 대한 보복으로 나를 축출하려는 공작으로 보였다. 삼성전자 수도권 공장 증설은 불허가 아니라 참여정부 국정 목표가 균형발전이니 만큼 먼저 지방을 살릴 큰 그림을 제시하자고 균형발전위원회가 순서를 정한 것이다. 지극히 온당하고 합리적인 결정이었기에 잠시 기다리면 되는데, 삼성은 참지 못하고 당장 해내라고 온갖 압력을 가해왔다.

아침 8시 반 국정과제회의 참석차 대전에 갔다. 배순훈, 이종오, 성경륭, 김병준 네명 위원장이 참석했고 권오규 정책수석이 신행정수도 계획을 보고했다. 회의는 잘 끝났다. 오후 서울로 돌아가는 버스에 오르려는데, 노 대통령이 나를 흘깃 돌아보더니 “정책실장은 내 차로 같이 갑시다”라고 했다. 오늘 아침 기사 때문이구나 하고 직감했다. 덕분에 대통령의 벤츠 관용차를 처음 타보았다.

앞좌석에 여택수 수행비서가 앉았고, 뒷좌석에 대통령과 내가 앉았는데 내부 공간은 생각보다 좁았다. 여택수 비서가 아침 중앙일보 1톱3전 기사를 이야기하자 노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

“내가 영미식으로 가야 한다고 이야기한 기억이 없어요. 설사 그랬다손 치더라도 그때 상황에 따라, 아마 미국 가서 주인 듣기 좋으라고 한마디 한 것이 어떻게 대통령 정책인가. 내용을 알아보고 정면 대응하세요. 나는 원래 후보 시절부터 유럽 모델을 선호했어요.”

이어서 네덜란드, 스웨덴 노사관계에 관해 대화를 나누었다. 새만금 헬기 사건으로 사표를 낸 세명 비서관 후임도 의논했다. 정책관리는 기획예산처 출신 김성진, 농업은 김인식으로 쉽게 정해졌는데 노동은 후보가 여럿인데 선택이 쉽지 않았다. 노 대통령은 최영기 박사에 호감을 표시하며 이렇게 말했다. “청와대 노동팀이 할 일은 첫째, 미래 구상과 장기전략 수립. 둘째, 노사분규 현장에 가서 설득해내는 작업이다. 두가지 일은 성격이 아주 다른데 이것을 어떻게 조화시키느냐가 문제다. 노동의 장기전략을 노사정위원회에 맡긴 이유는 노동부 공무원들에 대한 불신 때문이다. 김금수 위원장은 고집이 세고, 타협하지 않는데 그분 성격이 원래 그런가요?”

그리고 노 대통령은 미국에서 귀국하던 날 청와대 직원들이 도열해 환영한 것을 언급하며 더 이상 하지 말도록 하라고 여택수 비서에게 지시했다. 여 비서가 오랜 관례라고 하니 노 대통령은 “나는 싫다. 섬김 받는 거 귀찮다”라고 했다. 한시간 이상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청와대에 도착했다. 나는 바로 춘추관으로 가서 네덜란드 모델에 대해 기자회견을 했다(제26화 네덜란드 모델 참조).

7월21일(월) 아침 7시 예정에 없던 관저 조찬 모임이 있었다. 김영진 농림부장관이 돌연 사표를 던지고 잠적하는 바람에 후임 인사를 논의했다. 농업비서관은 김인식으로 확정됐다. 11시 김인식 비서관이 왔기에 농업분야 전략지도를 준비해달라고 부탁했다. 12시 국제기능올림픽 선수단 격려 오찬에 참석했다(영빈관). 스위스가 1위, 한국은 금메달 9개로 2위를 했으니 장했다. 나와 같은 테이블에 앉은 프레스 금형부문 우승자 서아무개 경북기계공고(대구) 졸업생에게 이것저것 물어보았다. 대구 내가 사는 동네에 있는 학교 졸업생이 큰일을 해내 아주 반가웠다.

저녁 6시 반 관저 만찬에 참석했다. 정책실 3명 비서관과 조재희 전 비서관이 참석했다. 조 비서관 후임인 김성진 비서관이 대통령에게 첫 인사를 했다. 초반에는 주신구라, 흑선, 난학, 이토 히로부미, 사카모토 료마(노 대통령은 대하소설 ‘료마가 간다’를 읽었다고 했다) 등 일본 역사 이야기를 많이 했고 후반부에는 하반기 경제정책을 검토했다.

이상 7월21일 일정을 상세히 기록했는데 그것은 노 대통령과 하루 세끼 식사를 같이 한 진기록을 세운 날이기 때문이다. 2016년 국정농단 사건이 터졌을 때 김기춘 비서실장에게 박근혜 대통령을 1주에 몇번 만나는지 질문하자 “한두번 뵐 때도 있고 못 뵐 때도 있고…”라며 우물쭈물 대답해서 사람들이 깜짝 놀랐다. 세상에 이런 일이! 최측근인 비서실장이 이렇다면 당시 국정은 4인방, 10상시로 불리던 비서들이 쥐고 흔들었다는 말이 된다. 또 다른 비서실장은 6개월 임기 중 박근혜 대통령을 딱 두번 봤다고 하니 기가 막힌다. ‘이게 나라냐’ 하는 말이 나올만하다.

7월22(화) 아침 중앙일보에 두번째 1톱3전 폭탄이 터졌다. 요지는 대통령은 변했는데, 정책실장은 계속 일자리창출을 방해한다는 것이다. 주로 삼성전자 공장 증설 문제다. 기사를 쓴 기자가 평소 아는 대학후배라서 놀랐다. 언론계는 참 비정한 세계로구나 싶었다. 9시 국무회의에서 행정개혁 로드맵 보고(정부혁신위)와 학교안전 보고(교육부)가 있었다. 노 대통령이 회의 도중 갑자기 일어나 뒤에 배석해 있는 나한테 와서 종이를 한장 건네주고 갔다. 정부혁신위의 국고보조금 정비 계획에 관한 대통령 의견이 적혀 있었다. 꼭 중앙에 필요한 것 아니면 모두 지방에 줄 것, 그리고 인력 변경이 있는지 명시하라는 내용이었다. 회의 끝나고 김병준 위원장에게 전달했다. 국무회의 도중 옆에 배석한 문희상 비서실장에게 원래 매주 수요일 하던 수석들 비서실장 공관 만찬을 여름엔 쉬고 월 1회로 바꾸자는 수석들의 의견 메모를 보였더니 문 실장은 만면에 희색을 띄며 ‘따봉’이라고 했다. ‘외모는 장비, 지략은 조조’라고 불리는 문 실장은 판단력이 좋고 인간적 매력이 있었다.

노무현 대통령이 2003년 11월19일 오전 청와대에서 문희상 비서실장, 이정우 정책실장 등과 차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국무회의 끝나고 일어서는데, 노 대통령이 나를 보더니 “정책실장, 부안군이 핵폐기장 거부하면 새만금 못준다고 합시다”라고 했다. 같이 집무실로 걸어가면서 중앙일보 지난번과 오늘 1톱3전이 삼성전자 공장 증설 때문인 것 같다고 했더니 노 대통령이 이렇게 말했다. “가서 싸우세요. 이정우 죽이면 노무현 죽이는 거라고 얘기하세요.” 바로 옆에 보고차 대기하던 나종일 안보실장이 대통령의 단호한 어조에 놀라 쳐다봤다.

박근혜 시절 “이게 나라냐”

이런 일도 있었다. 첫번째 1톱3전이 나온 다음 날 아침 7시 관저 조찬 기조회의에서 언론 대응이 화제에 올랐다. 노 대통령은 “언론과 혼자 싸우는 느낌”이라고 말했다. 그러더니 대통령이 나에게 말했다. “이 실장, 어제 중앙일보 말이죠. 세상에 그런 데가 어디 있어요. 하도 화가 나서 내가 어제 밤에 잠을 잘 못잤어요.” 아니, 나는 잘 잤는데 대통령이 잠을 설치다니. 이런 대통령을 위해서라면 더 열심히 일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기열전’에 자객 예양의 이야기가 나온다. 예양이 섬기던 주군 지백이 조양자에 의해 살해됐다. 예양이 “선비는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士爲知己者死)라고 하면서 주군의 복수를 결심한다. 무술을 연마해 천하무적의 경지에 오른 뒤 얼굴과 목소리마저 바꾸어 조양자에 접근했으나 두번의 암살 기도가 실패로 돌아갔다. 조양자가 예양에게 “너는 왜 이렇게까지 지백을 섬기느냐?”고 물으니 예양은 “지백은 나를 국사(國士)로 대접했으니 나도 그 은혜를 갚으려 한다”고 답했다. 그러고 바로 예양은 자결했다. 그날 나라의 지사들이 모두 울었다.

노무현 대통령이 2003년 11월19일 오전 청와대 집무실에서 이정우 정책실장으로부터 보고를 받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필자 이정우: 1950년 대구에서 나고 자랐다. 1974년 서울대 경제학과 학·석사를 마친 뒤 1983년 미국 하버드대학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1977~2015년 경북대 경제학과 교수로 재직한 뒤 명예교수를 맡고 있다. 2003~05년 참여정부 초대 정책실장, 정책기획위원장 겸 정책특보를 지냈다. 공정하고 평등한 사회를 만들고자 끊임없이 공부하는 경제학자를 자임하고 있다. ‘참여정부 천일야화’ 제목은 그의 친필이다. opini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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