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기의 D사이언스] `가속기·핵융합` 불모지에 씨앗… "수험생처럼 산 30년 보람"
차세대핵융합연구장치 사업까지 잇단 성공
중이온가속기구축단장 맡아 시운전 이끌어
"대형 프로젝트 성패, 결국 사전기획에 달려
외부 영향 안 받는 정책결정 시스템도 중요"
이준기의 D사이언스 권 면 중이온가속기연구소 초빙연구위원
그의 말 한 마디, 한 마디는 우리나라 대형연구사업의 산역사로 기록된다. '단군 이래 최대·최초 '라는 타이틀을 달고 시작한 국내 대형연구프로젝트에 있어 그를 빼놓고 얘기할 수 없다. 우리나라 최초 방사광가속기부터 핵융합, 중이온가속기까지 거대과학 프로젝트에 빠짐없이 그의 독특한 이름 두 자가 역사의 매 순간마다 오롯이 새겨져 있다.
권면 전(前) 중이온가속기건설구축사업단장(現 중이온가속기연구소 초빙연구위원)은 우리나라 대형연구사업이 걸어온 역사와 함께 해 온 산증인이다. 1980년대 우리나라 최초의 포항 방사광가속기를 관통해 1990년대 '인공태양'으로 불리며 핵융합에너지를 이 땅에 알린 초전도핵융합연구장치(KSTAR)에 이어 2010년대 10년 넘게 이어가고 있는 중이온가속기에 이르는 대형연구사업이 그의 손을 거쳐 '거대과학'이라는 이름으로 하나씩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대담=이준기 ICT과학부 차장
그는 지난 30년 간 'K-대형연구사업' 무대에서 조연 또는 주연으로, 때로는 현장 감독으로 위치를 바꿔가며 온화한 리더십과 풍부한 현장 경험을 무기로 독보적인 존재감을 발휘해 왔다. 지금은 30년 넘는 핵융합·가속기 현장 연구자 삶에 마침표를 찍고, 새로운 제2의 인생 출발선에 서 있다.
권 단장은 "포항방사광가속기, 초전도핵융합연구장치, 중이온가속기 모두 우리나라가 최초로 시도했던 대형연구사업에 참여하면서 과학자이기도 보다는 새로운 것을 배우는 학생 신분으로 30년 넘게 지내온 것 같다"며 "앞으로 대형연구사업은 철저한 사전기획과 현장 경험이 풍부한 인력, 국제협력을 통한 리스크 테이킹(Risk taking), 합리적인 국가 정책 결정 시스템 등을 통해 추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실험키트가 키워준 과학자 꿈… '핵융합'에 끌려
권 단장은 어릴 적 아버지가 사다 주신 화학실험 키트를 갖고 놀면서 자연스럽게 과학과 친해졌다. 유리로 된 플라스크와 비이커가 들어있는 화학실험 키트를 놀이삼아 실험하며 놀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고 했다.
그는 "키트를 이용해 실험을 하는 게 당시 너무나 재미있어 그 때부터 나중에 크면 과학을 해야 겠다는 생각을 막연히나마 했고, 그게 계기가 돼 과학자가 된 것 같다"고 말했다. 그 때부터 대학에 갈 때까지 과학 이외에는 다른 것을 해야 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대학에 가선 공학 분야 공부를 두루 하고 싶다는 생각에 공과대학로 진학했다. 당시 고리 원자력발전소가 처음 지어지고 있어 원자력 기술에 대한 관심이 높았던 터라 원자력핵공학과를 선택했다.
이후 군대에 다녀온 권 단장은 새로운 학문에 눈을 뜨게 됐다. 바로 핵융합 분야다. 그는 "복학해 보니 핵융합 분야를 전공한 교수님이 새로 오셔서 강의를 들었는데, 새로운 분야라는 점에 끌려 좀 더 공부해 보고 싶어 대학원에 진학했고, 미국 유학도 가게 됐다"고 핵융합과의 인연을 소개했다.
◇美 유학서 품은 '핵융합 꿈'… 포항 방사광가속기로 대형연구사업 '데뷔'
한국에선 생소했던 핵융합 분야가 미국에 유학가선 새롭게 주목받고 있었다. 핵융합을 공부하던 한국 유학생과 어울리면서 보다 깊이 있게 공부와 연구를 할 수 있었다. 그 때 우리나라 핵융합 분야를 개척한 이경수 박사와 만나 한국에서 핵융합의 불씨를 피우자고 뜻을 같이 하기도 했다.
먼저 귀국한 이경수 박사를 비롯한 동료 연구자의 노력으로 한국에서 핵융합 연구를 시작한다는 소식을 접한 권 단장은 포항 방사광가속기 건설에 참여해 달라는 제안을 받고 미국 유학생활을 서둘러 마치고 귀국했다.
그는 "제가 전공한 고주파 가열기술 분야 연구자를 찾던 중 자연스럽게 연락을 받아 포항가속기연구소에 들어가 우리나라 첫 방사광가속기 건설에 참여하게 됐다"며 "당시 우리나라가 가속기라는 대형연구장치를 처음 건설하는 것이어서 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모두가 밤낮을 모르고 열정적으로 최선을 다했기에 성공적으로 마칠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해외에 의존하지 않고, 국내 기술로 처음 시도한 대형연구장치를 완성했다는 자신감은 정부의 선도기술개발사업(G7 프로젝트)으로 추진하고 있는 차세대핵융합연구장치(KSTAR) 건설사업으로 이어졌다. 권 단장은 포항가속기가 정상 운전을 시작한 이후 KSTAR 건설사업에 합류하면서 대학 때 꿈꿔 온 핵융합 과학자로 본격적으로 나섰다.
◇가속기 '성공 DNA', 'KSTAR 사업'으로 이어져… ITER 국제협력 '성과'
그는 포항가속기사업에서 쌓은 경험과 역량을 KSTAR 사업에 적용하기 위해 노력했다. 가속기에 이어 우리나라에서 처음 시도되는 핵융합 사업에 '성공 DNA'를 새기어야 한다는 국가적 소명이 작용한 것이다. 하지만, 막상 사업에 합류해 보니 인력난에 부딪혔다. 사업 참여 인력이 예상했던 것과 비교해 상당히 부족했고, 사업을 원만하게 이끌어 갈 리더급 연구자들도 거의 전무했다. 이대로라면 사업 추진에 어려움이 클 것이라는 판단에 인력 충원에 역량을 모았다.
그는 "인력난 해결을 위해 포항가속기연구소에서 함께 근무했던 동료 연구자들을 만나 설득해 KSTAR 사업에 합류시킬 수 있었고, 그들의 역량과 리더십 덕분에 사업을 정상적으로 추진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이 때 KSTAR 사업에 함께 참여했던 리더급 연구자들은 7개국이 공동 추진하는 ITER(국제핵융합실험로) 사업에서도 각자의 역량을 발휘하며 글로벌 핵융합 연구자로 인정 받으며 활동하고 있다.
권 단장은 "가속기, 핵융합 등과 같은 대형연구사업에 직접 참여해 현장에서 쌓은 경험이 얼마나 의미 있고 중요한 지를 절실하게 깨닫게 됐다"며 "대형연구사업의 경우 기술적 문제에 부딪혔을 때, 그 문제를 얼마나 정확히 찾아 해결할 수 있는 현장 경험이 풍부한 우수 인력이 프로젝트의 성패를 좌우한다"고 대형연구사업에 있어 우수한 인력 확보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이런 인력들은 내 연구만 잘 해선 안 된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내 분야뿐 아니라 다른 사람이 하는 분야를 두루 알고, 각각의 분야를 하나의 시스템으로 통합하고, 장기적으로 사업을 관리할 수 있는 역량, 무엇보다 집단연구에 최적화된 능력을 갖춰야 한다고 주장했다.
핵융합 불모지나 다름 없던 우리나라는 과학적 실험장치를 구축하는 'KSTAR 사업'을 통해 후발주자임에도 국제 핵융합 무대에 참여하는 길도 마련할 수 있었다. 우리의 기술력을 인정받아 ITER에 KSTAR에 적용된 핵심 설비와 부품을 공급해 공학적 실험장치인 'ITER'에 참여하게 된 것이다. 이를 통해 핵융합 실증로와 발전소 건설을 위한 시간과 비용을 줄이며 단기간 내 선진국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일석삼조' 그 이상의 국제협력 성공사례를 만들어 낼 수 있었다고 권 단장은 평가했다.
◇"중이온가속기는 나의 마지막 도전 무대"… 직원 사기진작·기술 검증으로 활로 찾아
권 단장과 대형연구사업의 인연은 가속기, 핵융합에 이어 다시 가속기로 이어졌다. 단군 이래 최대 거대과학 프로젝트로 화려하게 출발했지만 사업 추진 과정에서 여러 난관이 부딪혀 어려움을 겪고 있던 중이온가속기건설구축사업단장으로 2019년 취임하면서 위기에 놓인 가속기 사업을 맡게 됐다. 그는 "대형연구사업을 해 본 연구자 입장에서 중이온가속기 사업이 잘못되면 국가적으로 커다란 문제가 생길 수 있고, 앞으로 대형연구사업 추진이 쉽지 않을 것이라는 우려 속에 나의 경험이 도움이 된다면 마지막으로 봉사하겠다는 결연한 마음으로 단장 공모에 나섰다"고 설명했다.
다행히 단장에 선임된 권 단장은 땅에 떨어진 직원들의 사기를 어떻게 하면 높이고, 떠나려는 직원들을 남게 할 수 있을 지 고민했다. 이를 위해 중이온가속기가 지어지고 있는 현장으로 사무실을 옮기는 선택을 했다.
그는 "취임하고 보니 분위기와 상황이 생각했던 것보다 좋지 않았다. 대형연구사업 현장은 일한 만큼 하루가 다르게 모습이 바뀌는 속성이 있다"며 "이런 현장의 모습을 직원들이 직접 보면서 일할 수 있도록 준비되지 않은 상황에서 이사하기로 결정했고, 우리들이 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현장을 통해 몸으로 느끼게 해 주고 싶었다"고 갑작스러운 이사 이유를 설명했다. 이사 이후 직원들의 달라진 모습에 그는 사업 추진에 희망을 가질 수 있었다.
무엇보다 급선무는 프로젝트가 제대로 진행되고 있는지를 기술적으로 파악하는 일이었다. 해외 전문가를 초청해 기술적 검증과 자문을 받았다. 앞으로 일부 진행 사항을 수정하고, 시간과 예산을 더 투입해야 한다는 의견을 받았다. 이런 결과를 바탕으로 정부와 지속적으로 협의해 사업 계획을 단계별 방식으로 다시 바꾸고, 고에너지 구간 중심의 선행 R&D 추진을 둬 사업 기간을 늘려 잡았다.
권 단장은 "네 차례에 걸친 사업 계획 변경에 따른 추가적인 예산과 기간 연장 등을 비난하는 주위의 목소리가 있었지만, 제대로 사업을 추진하기 위해선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며 "모든 것을 제 스스로 감수하고, 정면 돌파하겠다는 의지로 사업 운영과 관리에 더욱 매진했다"고 말했다. 좌고우면하지 않고 사업에 역량을 모은 결과는 얼마 안 돼 나타났다. 2021년 12월 저에너지 가속구간 구축을 모두 마치고, 지난 5월 저에너지 전체 가속 구간에서 빔 가속과 인출 등 시운전에 성공할 수 있었다.그는 "우리 입장에서 기술적 난관을 극복하고 모든 임무를 스스로 해 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됐고, 외부에 우리의 사업에 대한 신뢰 수준을 일정 부분 높일 수 있는 결과를 보여준 데 의미가 크다"며 "시운전에서 나타난 여러 문제들을 잘 보완해 내년 중반기부터 국내 이용자를 위한 실험을 진행할 것"이라고 밝혔다.
◇"철저한 사전기획 거치고, 정치·권력에 영향 받아선 안돼"
권 단장은 가속기, 핵융합, 천문우주 등과 같은 대형연구사업 추진에 있어 철저한 사전기획이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제대로 준비되지 않거나, 계획되지 않은 사업은 아무리 사업관리를 잘 해도 좋은 결과를 낼 수 없다는 것을 풍부한 현장 경험을 통해 뼈속까지 체험했기 때문이다.
그는 "사전기획의 중요성은 누구나 알고 있으나, 그동안의 대형연구사업은 사전기획을 거치지 않고 진행돼 온 게 우리의 현실"이라며 "앞으로 이뤄질 대형연구사업에는 반드시 사전기획 단계를 거친 후에 추진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대형연구사업은 모두 처음 시작하는 것이기에 사전기획 단계에 선행 연구도 포함해야 한다고 권 단장은 재차 강조했다. 중이온가속기사업도 사업계획 변경을 통해 고에너지 가속구간에 대한 선행 R&D를 진행키로 했는데, 이를 다른 대형연구사업에도 적용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는 "사전기획 단계에서 꼭 짚어야 할 것이 선행연구 기술이 무엇이고, 사업의 성공적 추진을 위해 어떤 기술 확보가 필요한지를 미리 파악하는 선행 R&D도 매우 중요한 과정 중의 하나"라고 설명했다.
권 단장은 대형연구사업 추진에 있어 국제협력과 외부에 영향받지 않는 합리적인 국가 정책결정 시스템 구축도 언급했다. 그는 "앞으로 대형연구사업 수요가 더욱 늘어나면 천문학적 비용과 위험을 한 국가가 모두 짊어지기 힘들기 때문에 국제협력을 보다 적극적으로 모색해야 한다"며 "이를 위해선 대형연구사업이 권력이나 정치와 무관하게 사회적 논의와 공감 속에서 합리적으로 결정될 수 있는 국가 시스템 구축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이준기기자 bongchu@d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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