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경포럼] 바비 테스트
영화로 남자친구 반응 살피는
바비 테스트까지 등장했지만
유독 한국에선 흥행 실패
'페미니즘 탓' 분석 있지만
남녀 편 가르기로 볼 일 아냐
미국 진보의 아이콘으로 꼽혔던 대법관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의 생애를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나는 반대한다'에서 긴즈버그는 대학 시절 한 사람과 두 번 이상 데이트를 한 적이 없었지만, 남편을 만났을 때는 달랐다고 회상한다. "나에게도 뇌가 있다는 것에 관심을 가진 최초의 남자"였다는 것.
긴즈버그와 같은 잣대가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은 요즘 미국 여성들 사이에서는 남자친구를 계속 만나도 될 것인지를 판단하기 위한 '바비 테스트'가 유행이다. 남자친구에게 영화 '바비'를 보자고 한 후 반응을 살피는 것이다. 영화 보기를 꺼리거나, 영화를 보고 나서 불쾌한 반응을 보이는지, 영화의 메시지에 공감하는지로 어떤 사람인지 판단하는 것이다.
긴즈버그가 대학생이던 195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여자아이들이 가지고 놀던 인형은 모두 아기 모습을 하고 있었다. 소녀들은 아기를 돌보는 엄마 역할밖에 할 수 없었다. 이때 바비가 등장했다. 바비는 성인 여성의 모습을 하고 있었고, 소녀들은 아기를 돌보는 대신 인형에 자신의 미래를 투영할 수 있었다. 바비는 의사, 우주비행사, 대통령 등 무엇이든 될 수 있다고 믿게 하는 장난감이었다. 그 덕분에 바비는 1990년대 초까지 10억개 이상 판매될 정도로 인기를 누렸다. 하지만 금발에 극도로 마른 체형이었던 바비는 비현실적인 미의 기준을 제시한다는 비판을 받았고, 말하는 바비 인형은 "수학 수업은 힘들다"고 말하는 등 여성 비하 논란에서도 자유롭지 못했다. 바비 제작사인 마텔은 체형, 머리카락 색깔, 인종이 다양한 바비로 변화를 시도했고, 1959년 태어난 바비는 어느새 64세가 됐다.
누군가에게는 페미니즘의 상징, 누군가에겐 퇴보한 여성의 상징이었던 논쟁적인 장난감 바비는 실사 영화 개봉으로 다시 한번 화제의 중심에 섰다.
바비는 지난달 19일 개봉한 이후 6일까지 전 세계에서 10억달러(약 1조3000억원)가 넘는 수익을 올리며,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영화가 돌아왔다'는 것을 알리는 또 다른 상징이 됐다. 100여 개의 제휴 상품이 쏟아져 나왔고, 이 영화 덕분에 미국 소비자들의 신용카드 지출액이 10% 이상 늘었다는 분석도 나왔다. 미국의 7월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 회의 직후 제롬 파월 연방준비제도(Fed) 의장의 기자회견에서 고금리에도 소비를 즐기는 사례로 바비가 언급됐을 정도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바비 열기를 느낄 수 없다. 6일까지 누적 관람객 51만명으로, 흥행수익 8위에 그쳤다.
바비의 국내 흥행 실패는 페미니즘 유머에 대한 시각 차이 때문이라는 분석이 있다. 북미 관객이 블랙 코미디로 웃어넘길 만한 관련 유머가 한국에서는 통하지 않았다는 것인데, 남성 중심 사회와 성차별에 대한 풍자, 남성을 희화화한 장면에 대한 거부감이 크다는 것이다. 실제로 네이버 관람객 평점도 여성은 9.24점, 남성은 6.06점으로 크게 갈린다. 일부 외신은 "한국에선 페미니스트 꼬리표를 두려워하기 때문에 바비가 고전하고 있다"는 분석을 내놓기도 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 바비의 흥행 실패를 설명할 수는 없다. 바비 인형을 가지고 놀았던 추억이 있는 여성이 많지 않다는 점이 더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한국 여성들은 미국 여성만큼 바비에게 감정이입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바비 테스트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한국에서 유독 바비가 성공하지 못했다고 해서 페미니즘 탓으로 몰아가며 남녀 편 가르기를 할 필요는 없다. 편 갈라서 싸우지 말고 자신만의 정체성을 찾으라는 것이 영화의 메시지이기도 하다.
[이은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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