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두영의 이제 좀] 정당 현수막의 가스라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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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덥다.
시선이 고이는 곳마다 도배된 정당 현수막 탓이다.
하지만 정당 현수막이 이렇게 도시를 뒤덮게 된 건 작년 12월 개정 옥외광고물법이 시행되면서, 지자체장들이 정당 현수막은 쉽게 철거하지 못하도록 된 탓이 크다.
이러니 정당들은 현수막에 집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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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오늘 황두영 작가]
너무 덥다. 그래도 이 열기를 받아 생명력을 뿜어내는 만물들을 보면 여름의 맛이 날까 싶어 주위를 둘러보면 더 짜증이 난다. 시선이 고이는 곳마다 도배된 정당 현수막 탓이다. 너무 많기도 하거니와 미감이라곤 하나도 찾아볼 수 없이 강렬한 원색과 고딕체가 남용된다. 내용도 악담과 비관으로만 가득해 겨우 찾아낸 일상의 평안을 기어코 깨놓는다. 정치적 논쟁을 좇는 것으로 밥벌이를 하는 나도 이런데 시민들은 오죽할까 싶다. 저 추물들을 보며 대한민국과 대한민국 정치에 대한 사랑이 커지기는 아무래도 어려울 것이다.
천 따위에 주장을 크게 적어 게시하는 현수막은 고전적 정치표현의 방식이다. 하지만 정당 현수막이 이렇게 도시를 뒤덮게 된 건 작년 12월 개정 옥외광고물법이 시행되면서, 지자체장들이 정당 현수막은 쉽게 철거하지 못하도록 된 탓이 크다. 게다가 헌법재판소가 공직선거법 상 선거 180일전 현수막 게시 금지가 너무 포괄적으로 표현의 자유를 침해한다며 내린 헌법불합치 결정에 대해, 국회가 시한 내에 법 개정을 못하면서 정치 현수막이 더욱 난립할 염려도 늘고 있다. 옥외광고물법 개정과 헌재 판결은 모두 표현의 자유와 정당 활동의 보장이라는 민주주의가 가치를 신장하기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늘어난 자유가 쓸모 있게 쓰인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별로 없는 것 같다.
정당 현수막들은 인터넷 창의 팝업광고 같다. 아무리 못 본 채 하려 해도 어디든 따라붙고 도무지 치울 수도 없다. 내가 보고자 하는 원래의 내용과 무관한 내용이라는 점에서도 그렇다. 시대의 참혹을 고발하는 무거운 기사에도, 모처럼 인간미를 찾은 귀한 미담에도 지긋지긋하게 따라붙은 성인물 팝업 마냥, 정치현수막들은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정치가 무엇인지를 가리고 양 당이 만든 자극적 싸움만 보도록 만든다. 가로수 쪽그늘에 앉아 이 더위를 피하는 자의 표정, 안 되는 장사에도 간판을 바꿔달아 본 사장님의 바람, 지난한 싸움 끝에 설치된 어린이보호구역 표지판 등은 현수막에 가려진다.
근본적 문제는 현수막 자체보다는 시민의 삶과 괴리된 정치 그 자체다. 너무도 강렬한 현수막의 호소에 비해 시민들의 반응은 너무 냉담하다. 정치에 대한 기대와 관심 자체가 저조하다. 정치 관련 각종 콘텐츠들은 팔리지 않는다. 온라인에는 정치 글들이 가득해 보이지만, 실은 일부 관계자와 팬덤들이 반복적으로 내는 소음일 뿐 흥미로운 논쟁은 사라졌다. 이러니 정당들은 현수막에 집착한다. 어떻게든 정치적 인상을 남기기 위해 행인의 무의식에 스크래치를 남기려 한다. 결국 현수막 정치는 대중과 유리된 정치가 하는 가스라이팅이다.
그러니 정당 현수막을 규제해야 할까? 정당활동의 자유를 제한할 필요가 있다는 주장은 늘 신중해야 한다. 그러나 평범한 예술가인 시민이 대통령을 풍자한 포스터 몇 장 붙였다고 옥외광고물법으로 기소되는 나라에서, 정당들만 제한 없이 현수막으로 도배할 수 있다고 말하는 건 좀 겸연쩍다. 현수막을 걸 권리를 획득한 정당들은, 평범한 시민들의 표현의 자유를 얼마나 금과옥조처럼 지켰는가? 정당 현수막은 군소정당들이 홍보를 할 수 있는 수단이 되기도 하지만, 지난 9개월의 실험은 현행 현수막 제도가 결국 자금력과 조직력을 가진 양대 정당과 기성 정치인들에게 훨씬 유리하다는 걸 확인시켰다.
나는 양적으로 질적으로 과잉된 저 현수막들이 사실 두렵다. 우리나라가 나아갈 방향을 알고 있고 유권자를 설득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아니라, 망해가는 정당 민주주의가 내는 마지막 비명처럼 들려서다. 우리 정치가 할 수 있는 게 시민들의 일상을 침해하는 가스라이팅 밖에 남지 않았을까봐, 이 폭염, 그늘 없는 교차로에 설 때마저도 나는 몸이 덜덜 떨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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