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고 강한, 서평연대 열세 번째[출판 숏평]
■보이지 않는 질병의 왕국(메건 오로크 지음 / 진영인 옮김 / 부키)
우리에겐 듣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 불시에 찾아온 역경과 시련을 딛고 일어나 행복해지는 이야기 말이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질병의 왕국’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이와는 거리가 멀다. 저자가 20대 초반부터 정체불명의 증상들에 시달려온 이야기는 불쾌하다. 기승전결이 뒤죽박죽인 서사, 납득하기 어려운 선택들, 날뛰는 감정들, 활짝 열린 결말. 그 모든 것이 여과 없이 날아와 해피엔딩을 기대하는 마음과 충돌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 이야기는 불쾌하기에 완성된다. 왜 아픈지도 모른 채 의학의 경계선에서 서성이며 고통받고만 있는 이야기는 과거에 그랬던, 지금 그런, 그리고 앞으로 그럴 수 있는 우리의 이야기이기에. (황예린 / 문화비평가, 9N비평연대, 한국문화콘텐츠비평협회 홍보위원)
■극장 앞에서 만나(신승은 지음 / 오월의봄)
싱어송라이터이자 영화감독인 저자가 자신이 사랑하는 영화들을 소개한다. 모두 장애인, 여성, 어린이, 성소수자 등 차별과 혐오에 노출된 채로 살아가야 하는 이들의 삶을 다룬 영화다. 저자는 현시대의 여러 문제와 영화 속 사건들을 교차시키면서 연대의 필요를 증명한다. 단순히 영화의 스토리가 아닌 영화의 형식, 특히 카메라 기법과 컷 연결 방식에 집중해 영화가 인물과 사건을 그려내기 위해 어떤 선택을 했는지 분석한다.
책에서 소개된 영화들의 공통점은 인물을 내려다보거나 올려다보지 않고 아이레벨(인물 눈높이에서 촬영하는 것) 또는 고정된 앵글로 담는다는 것이다. 관객이 인물을 동정이 아닌 연대의 태도로, 어떠한 편견도 없이 있는 그대로를 바라보게 하기 위함이다. 또한 영화 속 인물에게 트라우마가 될 수 있는 장면을 담거나, 관객이 ‘영화 속 그들과 나는 다르다’라고 느끼게끔 연출하지 않는다. 대신 개개인의 서사와 인물을 둘러싼 시스템에 주목한다. 저자가 사랑하는 영화들과 이 책에는 그 누구도 차별받지 않고 상처받지 않고 혐오의 대상이 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가득하다. 영화를 향한 애정과 전문성 그리고 세상을 대하는 다정한 태도를 지닌 저자는 우리에게 따듯하고도 깊이 있는 영화 에세이를 선물한다. (현다연 / 출판편집자, 9N비평연대)
■여자아이이고 싶은 적 없었어(쥘리 델포르트 지음 / 윤경희 옮김 / 바람북스)
“우리는 어떤 이미지들의 포로인가?” 여성으로 태어나 지금껏 살아온 내가 경험한 어떤 불이익과 피해가 온전히 나만의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수많은 차별적인 형용사들은 세대를 막론하고 하나의 성별만을 수식해 왔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우리의 입장을 강력하게 표명하는 것에 대해 두려움을 느낀다. 독박 육아, 유리천장, 성폭력 피해…. 그리고 생각한다. 나는 대체 무엇과 싸우고 있는가. 애초에 내가 여자이고 싶었던 적이 있었나?
페미니스트 여성 예술가 쥘리 델포르트는 그녀의 삶 전반에 걸쳐 롤 모델, 여행 그리고 평범한 사랑 이야기를 들려주지만, 이 책은 그렇게 단순한 그림 에세이가 아니다. 여성이기에 당연하고 여성이기에 참을 수 없는 이야기. 그 속에서의 아픔과 외로움은 한 여성 개인의 것이 아니니까. 나는 비로소 용감해진다. (김정빈 / 출판칼럼니스트, 9N비평연대, 한국문화콘텐츠비평협회 홍보위원)
■이름보다 오래된(문선희 지음 / 가망서사)
‘고라니’라는 이름은 우리에게 어떻게 스며들어 있는가. 오늘날 고라니는 농작물에 피해를 주는 유해야생동물이자 ‘로드킬’의 상징으로 잘 알려져 있다. 특히 대중에게 더 깊이 각인돼 있는 이미지는 로드킬이다. 인터넷상에서 도로에 갑자기 튀어나오는 전동 킥보드 사용자들을 ‘킥라니’라고 부르고 있고, ‘배틀그라운드’ 등의 서바이벌 게임에서는 자동차로 상대방을 치어 죽이는 행위를 ‘고라니’라고 부르기까지 한다.
고라니만큼 대중에게 죽음의 이미지로 다가가는 동물이 또 있을까? 모기와 바퀴벌레 외에는 없다고 본다. 이런 사고와 죽음이라는 프레임에 갇힌 고라니가 전 세계적으로는 멸종위기 동물이라니, 잔혹한 생태계의 현실과 우리 인식 사이의 괴리에 탄식하지 않을 수 없다.
10년 동안 만난 고라니 50여 마리의 얼굴을 담아낸 ‘이름보다 오래된’은 고라니가 처한 현실을 생명의 편에 서서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인간으로 인해 자리를 잃은 동물들, 목숨을 잃는 동물의 수, 생태계의 심각한 위기. 이 모든 처절한 상황들을 읽어낸 뒤 책에 실린 고라니의 얼굴을 다시 보고 생각하게 된다. 인간은 자연에게 그리고 동물에게 이미 ‘유해동물’이 된 게 아닐까. (김현구 / 문화비평가, 9N비평연대, 한국문화콘텐츠비평협회 홍보위원)
■미세미세한 맛 플라수프(김지형 글·그림 / 두마리토끼책)
“모여라 모여라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인 작디작은 알갱이들아, 하수도와 비를 타고 졸졸졸 세상 구경 가볼까?”
알록달록한 플라스틱 알갱이들을 향해 누군가 경쾌하고 발랄하게 노래를 불러주는 것만 같아요. 예쁜 색들이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지만, 이 풍경이 더 이상 예쁘게만 보이지는 않아요. 왠지 모르게 무섭네요. 책장을 펼치면 거대한 대륙과 바다가 한눈에 보여요. 바닷속엔 수많은 물고기가 떼 지어 헤엄치고 있어요. 그런데 이 넓디넓은 바닷속에 알록달록한 플라스틱 알갱이들이 한 가득 퍼져나가고 있어요. 작은 물고기들은 미세 플라스틱을 먹이처럼 먹어요. 큰 물고기는 이 작은 물고기를 먹네요. 그 물고기를 아이가 먹고요. 이번엔 아이의 몸속이에요. 플라스틱 알갱이가 온몸으로 퍼져가고 있어요. 미세 플라스틱은 계속 쌓여 갑니다. 계속 쌓이고 또 쌓이면서 아이의 모습이 조금씩 달라져요. 아이는 자신의 몸이 플라스틱 장난감이 된 듯한 이상한 기분을 느껴요. 그러다 결국 플라스틱 인간이 됐어요. 그러자 엄마가 미세 플라스틱이 가득한 ‘플라스프’를 끓여주시네요.
이 책은 전통적인 방식으로 교훈을 주려고 하지 않습니다. 대신 반어법을 사용해 독자들이 자발적이고 적극적으로 생각하도록 만들어요. 작고 예쁘지만, 몸에는 크게 위험한 플라스틱에 대해 경각심을 주는 내용을 담은 책이랍니다. (김성신 / 출판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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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엄민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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