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에서 날 몰아세운 건 바로 나”…악귀는 자신일 수도
‘경소문2’ 등 욕망이 악귀를 만든다
“악귀가 드글드글한 세상이다.”
드라마 ‘악귀’ 이정림 피디는 지난 4일 “요즘 시대에 악귀란 무엇이냐”는 한겨레의 서면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그 이유는 이렇다. “‘악귀는 그 사람의 욕망을 먹고 자란다’ ‘악귀는 인간의 가장 약한 점을 파고든다’는 표현이 드라마에 나온다. (이 얘기를 들으면) 각자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사람이 있지 않을까.” 욕망이 들끓는 자들이 우리 주위에도 많다는 뜻이다. 나 자신일 수도 있다. ‘악귀’의 김은희 작가도 같은 질문에 “누구나 가슴 깊숙이 품고 있는 이기심과 욕망이 이 시대에 악귀를 만든다”고 했다.
지난달 29일 종영한 드라마 ‘악귀’는 일상 속 악한 마음이 악귀가 된다는 설정에서 이전 오컬트(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초자연적 현상) 드라마와는 달랐다. 남의 불행을 들춰내며 우월감을 느끼고, 타인과 나를 끊임없이 비교하며 시기하는 감정도 악의 씨앗이 됐다. 김은희 작가는 이렇게 말했다 “‘악귀’에는 ‘문을 열었네’라는 대사가 자주 등장해요. 진짜 문을 연다는 행위를 뜻하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의 내면 깊숙이 닫혀 있는 문을 스스로 열면서 비로소 내 안의 악귀와 마주하게 된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지상파에서 오컬트 장르가 괜찮을까 우려에도, 평균 시청률 10.4%(닐슨코리아 집계)로 기분 좋게 마무리한 것도 악귀라는 존재가 이질감이 없어서다. ‘악귀’에서 구산영(김태리)의 대사처럼 “뭔가를 원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
내 안의 나쁘고 약한 마음이 악을 부르는 현상. 요즘 악을 퇴치하는 드라마들이 공통으로 그리는 악귀의 모습이다. 지난달 29일 시작한 ‘경이로운 소문: 카운터 펀치’(tvN)에서도 악귀는 자신과 닮은 사람을 숙주로 삼는다. 애초 살인 충동과 욕망이 강한 자를 찾아 그 마음을 부추긴다. 시즌1(2020~2021, OCN)에서는 갑질을 일삼는 회사 대표, 연쇄살인마, 사리사욕 채우는 정치인 등이 숙주가 됐다. 이번 시즌에서는 분양 사기를 치는 거대 조직 등 악귀 집단의 규모가 더욱 커졌다. 시즌1 방영 당시 기대작이 아니었는데도 우리 주변에서 볼 법한 소소한 인물들이 초능력자들과 악귀들로 등장해 화제를 모았다. 지난 5~6월 방영한 ‘구미호뎐 1938’(tvN)도 설화에 바탕해 지금도 이어지는 악행들을 악귀로 소환해 인기를 얻었다. 사람을 속여 수명을 가로채는 거북이 요괴(동방삭), 어린이를 굶겨 죽이고 그 영혼(새타니)으로 신점을 치는 행위 등이다.
‘전설의 고향’ 같은 옛날 공포드라마에서는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이들이 한을 품고 귀신이 됐다. ‘스위트 홈’ 같은 요즘 오컬트드라마에서는 촉수 괴물 등 기이한 존재들이 등장했다. 그랬던 드라마들이 나쁜 마음이 악을 키우는 것에 주목한 것은 요즘 사회 분위기에서 답을 찾을 수 있다. 자신의 힘듦에 타인까지 해하려는 이들이 늘고, 어린 청춘들을 좀 먹는 사람들에 각박한 사회 속에서 상대적 박탈감은 커지고 있다. 김은희 작가는 “끔찍한 범죄를 보다 보면 ‘귀신보다 무서운 게 사람’이란 말을 더욱 실감하게 된다. ‘악귀’는 그런 생각에서 시작했다. 희망을 뺏어간 범죄자들을 악귀에 빗대어 그려보고 싶었다”고 했다. 특히 “여러 기사를 접하면서 가장 슬픈 죽음이 자살이라고 생각했다”며 “한국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자살률이 가장 높다는 점, 젊은층의 자살률이 증가하고 있다는 안타까운 사실도 다루고 싶었다”고 한다.
열심히 살아보려는 이들조차 흔들리는 순간을 포착해내며 나쁜 기운이 미치는 악영향도 강조한다. ‘악귀’에서 공무원 시험 준비와 아르바이트를 하며 열심히 살던 구산영은 무시하는 이들을 접하면서 ‘나는 왜 이렇게 살아야 하느냐’며 한쪽에 묻어둔 원망을 드러낸다. ‘경이로운 소문: 카운터 펀치’에서 신념을 갖고 일하던 정의로운 소방관 마주석(진선규)도 아내가 살해당한 뒤 참고 참았던 분노를 폭발하며 악귀를 받아들인다. 그는 분양사기를 당한 뒤에도 아내한테 잊고 살자며 오늘에 최선을 다했던 사람이다. 진선규는 소속사를 통해 “‘악귀’에서 봤듯이 악은 인간이 가장 취약할 때 내면으로 파고든다. 분노를 자양분 삼아 결국 사람을 집어삼키는데, 마주석도 분노로 인해 내면의 변화가 생긴다”고 했다.
결국 이런 드라마들이 말하려는 것은 건강한 마음이다. ‘악귀’에서 구산영은 스스로 이겨낸다. 자신과는 반대로 열렬하게 살고 싶어 하는 악귀와의 긴 싸움을 통해 “어둠 속에서 날 몰아세운 건 나 자신이었다”는 걸 깨닫는다. 김태리는 소속사를 통해 “모든 것은 자신의 의지이고 선택이다. 이 드라마로 ‘희망이 있기에 섣불리 포기하긴 아직 이르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고 했다.
드라마에서 악귀는 사라지지만 현실에서 여전히 우리 주위를 맴돈다. ‘경이로운 소문’ 시즌2에서 더욱 강력한 악귀가 등장하고, ‘악귀’에서 구산영이 악귀를 거부하고 앞이 안 보이는 결말을 택한 이유다. 김은희 작가는 “현실에서 아무리 옳은 선택을 했다고 해도 희망만이 가득하진 않을 것이란 걸 표현하고 싶었다”고 했다. ‘시그널’(tvN)의 미제 사건 범인, ‘킹덤’(넷플릭스)의 민초를 핍박하는 양반에 이어 ‘악귀’에서 아이를 속이는 사람들까지 그의 작품에는 늘 악귀가 존재했다. “어느 시대나 힘없고 약한 이들에게 아픈 일이 유독 많이 일어나는 것 같습니다. 계속해서 이런 이야기를 쓴다는 건 아직도 좋은 세상이 오지 않았기 때문이 아닐까요.” 현실 세계가 달라지지 않는 이상 드라마에서 우리 마음을 찌르는 악귀는 계속 등장하지 않을까.
남지은 기자 myviolle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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