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기 끝날 때까지 전 정부 탓만 할 ‘유령 정권’
박찬수 | 대기자
윤석열 정부에서 재난은 예상치 못한 순간 소리 없이 찾아오지만은 않는다. 6년이나 준비했고 1천억원 넘는 예산을 투입한 행사도 재난의 현장으로 변하는 건 순식간이다. 물이 흥건한 습지에 텐트를 치는 대원들, 찢어진 커튼과 흙탕물 흐르는 샤워실, 채식주의자인 어느 행사요원이 받았다는 밥과 두부 두쪽뿐인 식사…, 에스앤에스(SNS)를 통해 지구촌에 퍼진 사진들은 충격적이다. 케이 팝(K-pop)의 본고장을 방문한다는 설렘을 안고 새만금을 찾았을 전 세계 청소년들의 실망감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다.
처음엔 나무 한 그루 없는 간척지에서 대규모 야영을 하면서도 폭염 대책을 세우지 않은 무신경만 문제인 줄 알았다. 그런데 퇴소한 참가자들 증언을 보면 야영 시설과 식사, 위생, 안전까지 모든 면에서 총체적인 행정 실패였던 셈이다. 김현숙 여성가족부 장관이 국회에서 “태풍, 폭염 대책도 다 세워놓았다“며 걱정하지 말라고 자신 있게 말한 게 10개월 전 일이다. 지난 5월엔 한덕수 총리가 새만금 현장을 방문해서 ‘준비상황을 꼼꼼히 챙겼다’고 보도자료까지 냈다. 도대체 3개 부처 장관이 참여한 대회 조직위원회와 국무총리가 주재한 정부 지원위원회는 뭘 준비하고 뭘 지원한 것일까.
정부 부처의 어느 국장급 공무원은 이렇게 말했다. “새만금은 간척지라 한여름 폭염과 침수는 익히 예상된 거였다. 더구나 전 세계에서 4만3천여명이 참가하는 행사라면 장관은 아니더라도 차관 또는 실장급이 2~3주 정도 현장에 상주하며 문제를 점검했어야 했다. 누구도 그런 데 관심을 두지 않았다는 데 (같은 공무원인) 나도 놀랐다.” 여성가족부와 문화체육관광부, 행정안전부 등 세 부처 장관 중 단 한 사람이라도 일을 잘하는 사람이 있었다면, 그래서 차관이나 실·국장을 현장에 미리 보내 점검했다면, 우리 행정 동원능력으로는 단기간에라도 이런 식의 처참한 실패는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대통령실과 총리실은 부처에 맡기고 나 몰라라 하고, 장관들은 책임 있게 챙길 생각은 하지 않고, 전북도는 어떻게 하면 중앙정부 예산을 더 끌어낼까 생각하는 와중에 잼버리 현장의 재난은 터진 것이다. 그래도 앞으로 법적 처벌을 받는 건 말단 공무원들일 것이다. 컨트롤 타워에 있는 ‘높으신 분’들은 정치적 책임조차 지지 않을 가능성이 작지 않다. 이게 윤석열 정부가 1년3개월 동안 국정을 운영해온 모습이다. 그런 국정 운용이 부처 장·차관들에게 밑바닥 현장을 챙기기보다 대통령 부부의 동선과 언행에만 신경 쓰게 하여버린 게 아닐까.
국민의힘은 “문재인 정부와 전북도의 부실준비 책임을 묻겠다”고 밝혔다. 대통령실 고위관계자는 “준비 기간은 문재인 정부 때였다. 실무 준비는 지자체(전북)가 중심이 돼서 한 것으로 보고받고 있다”고 말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 열린 국제 행사가 지자체의 무리한 유치로 어려움을 겪은 사례는 많다. 가까이는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이나 2014년 인천 아시안게임이 그랬다. 오죽하면 지자체의 국제스포츠 행사 유치를 제한하는 법률안이 국회에서 발의된 적도 있다. 그래도 일단 유치하면 중앙정부가 적극적으로 개입해서, 과도할 정도로 잘 치른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런 대한민국 정부는 지금 어디로 실종된 것일까. 물론 김관영 전북도지사는 책임을 피할 수 없다. 하지만 인제 와서 실패의 주된 원인을 지방자치단체로 돌리는 건 치졸하다. ‘잼버리는 코로나 이후 한국에서 개최하는 최초의 대규모 국제행사’라고 의미를 부여한 건 현 정부 아닌가. 이번 실패는 현 정부의 행정력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있음을 보여주는 하나의 상징이다.
앞으로 상황 전개는 눈으로 보듯 그릴 수가 있다. 윤석열 정부는 새만금 잼버리에 배정된 1천억원 넘는 예산을 ‘이권 카르텔’이 빼먹어서 참사가 빚어졌다고 말할 것이다. 문재인 정부 5년 동안 나라가 얼마나 썩었는지 보라면서, 전 정부 고위 관료들에게 수사의 칼날을 들이댈 것이다. 그러나 일의 성과를 내려면 먼저 책임지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이 정부는 임기 내내 모든 책임을 전 정부에 돌리고, 있는 사업마저 백지화하는 무위(無爲)의 통치를 보여주려는 듯싶다. ‘윤석열 정부는 문재인 정부 행사 준비의 틀을 깨지 않은 채 행정적·재정적 지원만 했다’는 국민의힘 논평을 보면 더욱 그렇다. 그렇게 5년이 지나면, 윤석열 정부는 있었나 싶을 정도로 존재감 없는 ‘유령 정권’으로 훗날 기록될지 모른다.
대기자 pcs@hani.co.kr
Copyright © 한겨레신문사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 [영상] 지하차도 불 10분 만에 홀로 진압…육아휴직 소방관이었다
- 잼버리 3만7천명 새만금 철수중…이상민 곧 기자회견
- “잼버리 IMF 금반지 정신으로 극복”…국힘, 잇단 무책임 발언
- [영상] 지하차도 불 10분 만에 홀로 진압…육아휴직 소방관이었다
- ‘입추 매직’ 안 통하는 폭염…태풍 ‘카눈’ 경남-전남 사이로 온다
- 잼버리 ‘태풍 오면 분산대피’ 매뉴얼 물거품…대책 없는 정부
- 4명 살리고 ‘별’이 된 가수 지망생…식당일 하며 꿈 키웠다
- 윤 대통령 ‘잼버리 비상대책반’ 뒷북…철수 당일 밤에야 지시
- 멸종 앞둔 고라니…왜 죽여야 하죠?
- 치안강국 덮친 ‘흉기 공포’…재난 수준의 트라우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