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도 곧 살인자 될까요"…'마음의 고통' 환자가 물었다[이승환의 노캡]
"나쁜 사람의 범죄 아냐…아픈데 방치된 사람의 범죄"
[편집자주] 신조어 No cap(노캡)은 '진심이야'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캡은 '거짓말'을 뜻하는 은어여서 노캡은 '거짓말이 아니다'로도 해석될 수 있겠지요. 칼럼 이름에 걸맞게 진심을 다해 쓰겠습니다.
(서울=뉴스1) 이승환 기자 = 2018년 마지막 날, 서울 종로구의 한 유명 대학병원. 임세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당시 47세)는 예약 없이 찾아온 박모씨(당시 30세)와 마주앉았다. 대학병원에서 예약하지 않은 채로 당일 진료를 받기 쉽지 않다. 그러나 임 교수는 박씨를 배려해 진료를 수락했다.
약 2시간 뒤인 오후 7시30분, 임 교수는 응급 수술 끝에 숨을 거뒀다. 박씨가 임 교수를 공격했고 임 교수는 그의 흉기를 피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임 교수는 당시 현장을 벗어나던 중 간호사를 먼저 대피시키려다 화를 면치 못했다.
◇간호사 먼저 대피시켰던 임교수 결국…
신경정신질환이 있는 박씨는 경찰 조사에서 횡설수설했다. "머리에 소형폭탄을 심은 것을 놓고 논쟁하다가 이렇게 됐다" "폭탄을 제거해 달라고 했는데 경비를 불러서"
임 교수의 동료들은 슬픔을 가누지 못했다. 그가 정신건강의학계에 기여한 공로를 잘 알기 때문이다. 우울증과 불안장애 분야 권위자였던 임 교수는 한국형 자살 예방프로그램을 개발하며 극단선택 예방에도 앞장섰다.
그는 업무적으로 엄격하고 완벽주의 성향을 보였다. 동료들이 '독일병정'이라고 부를 정도였다. 반면 환자에게는 한없이 따듯하고 열정적이었다고 한다. '마음의 병'이 있던 임 교수는 코너에 몰린 환자들의 심리 상태를 누구보다 잘 이해하는 의사였다.
임 교수는 지난 2016년 출간한 '죽고 싶은 사람은 없다'에 "저도 그 병(우울증), 잘 알아요"라고 썼다. 본인 역시 우울증으로 죽음을 생각한 적 있다는 고백이었다
온라인 커뮤니티에선 "조현병·조울증 환자를 격리하는 방안을 마련하라"는 요구가 쏟아졌다.
그러나 임 교수의 빈소 추모객 가운데 5분의 1은 그의 환자이거나 환자 가족이었다. 그를 아는 사람들은 확신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신경정신질환 환자에게 낙인이 찍히는 것을 임 교수가 원치 않을 것이라고.
"평소 고인은 마음의 고통이 있는 모든 분들이 사회적 편견이나 차별 없이, 누구나 쉽게, 정신적 치료와 사회적 지원을 받기를 원하셨습니다… (추모객들은) 고인이 평소 하시던 말처럼 저희 유족에게 '힘들어도 오늘을 견디어 보자고, 우리 함께 살아보자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장례 절차를 마친 유족들은 이런 내용의 서한문을 공개했다.
◇절친 잃어 진료가 두려웠던 정신과 권위자…그를 위로한 조현병 환자 백종우 경희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53)는 임 교수의 대학동기이자 지기였다. 백 교수와 임 교수는 초년병 의사 시절부터 의기투합해 극단선택 예방 대책을 연구했다. 한국자살예방협회 사무총장과 대한신경정신의학회 법제이사, 보건복지부 중앙자살예방센터장을 역임했던 백 교수는 한국트라우마스트레스학회 회장을 겸임하고 있다.
백 교수는 자신을 둔감한 성향으로, 임 교수는 예민한 성향으로 분류했다. 그러나 아무리 둔감하다고 해도, 임 교수 얘기가 나오면 백 교수는 말을 잘 잇지 못했다. 백 교수는 2020년 보건복지부가 임 교수를 의사자로 지정했을 때 펑펑 울었다고 한다.
임 교수를 떠나보낸 후 백 교수는 한동안 환자 진료가 두려웠었다. 그런 그를 위로한 것은 다름 아닌 조현병 환자였다. 언론 보도로 임 교수 소식을 접한 환자들이 백 교수의 손을 잡고 진심으로 가슴 아파했다. 임 교수가 보던 환자들까지 백 교수를 찾아왔다고 한다.
"환자분들은 임 교수와 함께 자신이 치유됐던 순간을 말씀하시면서 저를 위로해주셨죠.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어요. 조현병 또는 조울증 관련 범죄 보도가 이어지던 시기였기 때문이죠."
어느 환자는 '선생님, 저도 곧 살인자가 되는 건가요'라고 백 교수에게 물었다. 백 교수는 이런 비극이 되풀이돼선 안 된다고 다짐하며 답했다.
"조현병 범죄는 아픈데 도움받지 못한 상황에서 발생한 비극입니다. 지금 이렇게 직접 찾아오시거나 가족이 있는 분들과는 사례가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백 교수는 지난해 9월 기자와의 인터뷰에서도 "임 교수 사건은 나쁜 사람이 저지른 범죄가 아니다"며 "아픈데 방치된 사람이 벌인 범죄였다"고 말했다.
◇"사회적 편견 없이, 누구나 쉽게"
신림동 흉기난동 사건(7월21일) 발생 후 보름이 채 지나지 않아 서현동 흉기 테러(3일)와 고속버스터미널 흉기 소지자 체포(4일), 대전 고등학교 교사 피습(4일) 사건이 잇달아 터졌다. '묻지마 흉기난동' 피의자들이다. 이들은 조현병과 우울증 등 신경정신질환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결국 근본적인 문제부터 점검해야 한다. 조현병 등 '마음의 고통' 환자의 전체 범죄율은 일반인보다 낮지만 살인 같은 강력범죄 비율은 일반인의 약 5배에 이른다. 보통 환자들은 '극성기' 때 극단적인 상황을 일으킨다.
반대로 말하면 극성기 전 관리와 치료만 잘 한다면 이들의 범죄율은 일반인보다 낮아질 수 있다는 의미다. 증세가 사그라지지 않았는데 약을 끊거나 진료를 중단해선 안 되는 이유다. '마음의 고통' 환자의 범죄 대부분은 치료를 중단한 후 발생했다.
요컨대 초기 증세를 잡아야 환자의 극성기 위험성을 방지할 수 있다. 미국 등 선진국들의 조현병 관리 프로그램이 환자의 증세 초기에 집중적으로 개입해 극성기를 억제하는 형태로 이뤄진 배경이다.
그러나 한국은 초기 치료나 사회복귀보다 환자들의 '장기 입원'에 초점을 맞춘다는 지적이다. 필요시 입원해 짧은 기간 집중 치료를 한 후 지역사회 서비스를 거쳐 환자를 사회에 복귀시키는 '회복 체계'를 지향하자는 것이 전문가들의 제언이다.
임 교수의 바램대로 '사회적 편견이나 차별 없이, 누구나 쉽게, 정신적 치료와 사회적 지원'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힘들어도 오늘을 견디어보자'고 했던 임 교수의 신념이었고, 시민들을 불안케 한 '흉기난동'을 예방하는 최선의 대책이다.
mrlee@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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