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보기] 한국 민주주의를 이해하는 키워드, 반지성주의
민주주의는 인간의 '이성'에 대한 믿음을 전제로 한다. 대중의 지배를 뜻하는 민주주의는 실은 소수의 엘리트가 주도하는 집단적인 의사결정의 '합리화'를 지향하는 정치체제이다. 따라서 철인으로 상징되는 엘리트, 교육과 학습을 통해 깨어있는 시민, 이성적인 대화와 토론, 합리적인 의사결정을 위한 투명한 정보의 공개 등이 성공을 위한 조건이다.
요컨대 민주주의는 대중지성을 필요로 하며, 엘리트의 도덕적 권위를 기반으로 한다. 하지만 디지털시대의 진전으로 시민들의 객관적인 사고력은 감퇴하고, 난세의 시대에 기득권인 엘리트, 특히 지식인집단에 대한 불신은 팽배하게 됐다. 여기에 격화되는 권력투쟁과 레거시미디어의 위축에 따른 저널리즘의 퇴보로 인해 민주주의의 위기를 언급할 만큼 민주주의의 토양은 근본부터 무너지고 있다.
지식인이나 엘리트를 불신하고 적대시하는 태도로 정의되는 반지성주의는 이러한 환경 속에서 만개했다. 반지성주의는 정보의 편취에 근거한 비합리적인 확증편향이 특징이며, 가짜뉴스나 음모론의 유포를 통한 선동을 주 무기로 사용한다. 다만 한국의 반지성주의는 다른 나라와 달리 이명박 정부 때부터 극심해진 '정치적 진영논리'의 산물로 보인다. 과학적 관점에서 접근해야 할 4대강 보의 존치 여부가 진영논리에 의해 정치화된 것이 대표적인 예이다.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 문재인 정부의 등장과 그 반작용인 현 정부의 집권에 이르기까지 반지성주의를 빼놓고는 한국정치를 설명할 방법이 없게 됐다. 문제의 핵심은 주장과 선동만 난무할 뿐 이성적인 대화와 토론이 힘들다는 것이다. 더욱 심각한 것은 미디어환경의 급속한 변화에 따라 공론의 장이 사라지고 있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갈등은 치유되지 않고 국가는 퇴보한다.
사람들은 공영방송의 토론·시사프로그램을 시청하기보다는 정치적 편향성이 강한 매체를 선호하면서 SNS를 통해 동류집단과 폐쇄적으로 정보를 공유하고 있다. 다수의 정치인은 반지성주의를 타파하기 위해 노력하기보다는 부추긴다. 언론은 진실과 정론을 추구하는 일부를 제외하고 진실을 왜곡하는 선정적인 보도 태도를 자주 보인다.
최근의 사례를 들면, 서울 S 초등학교 교사의 자살로 촉발된 교권 침해 문제와 KBS의 방송수신료 분리 징수 문제가 있다. 교사의 안타까운 죽음 직후 대통령실은 교권 침해의 원인이 '학생인권조례'라는 주장을 하면서 종북주사파를 비난했다. 과연 그럴까. 일부 언론이 보도한 바와 같이 학생인권조례의 제정과 교권 침해 사건 간에는 통계적으로 유의미한 상관성이 없고 제정된 곳보다 없는 곳이 더 많다는 것이 진실이다.
종북주사파와 학생인권조례 간에는 무슨 관계가 있을까. 운동권 출신이 많은 민주당을 지칭하는 것이다. 책임을 회피하는 정치적 마타도어임을 쉽게 알 수 있지만, 정치적으로 양분된 현실에서는 학생인권조례의 폐지 여부에 대한 정치적 논란으로 사안의 본질이 가려지면서 교권을 회복할 수 있는 해법을 모색하는 공론의 장은 열리지 않는다.
충분한 사회적 논의 없이 확정된 KBS의 방송수신료 분리 징수는 KBS의 재정을 크게 악화시켜 공기(公器)인 공영방송의 정치적 독립성과 중립성이 훼손될 것임이 자명하다. 이동관 방송통신위원회 위원장 지명자는 '공산당 기관지' 발언을 해 현 정부의 대(對) 언론관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기까지 했다. 방송수신료에 대한 일부 국민들의 거부감은 이해하지만, 다수의 국민들은 여전히 공영방송의 필요성에 대해 공감하고 있다는 것이 주목해야 할 진실이다.
정치권과 언론을 탓하면서 정치적 허무주의나 극단주의에 빠지면 상황은 개선되는가. 필자가 보기에 한국의 반지성주의는 각자도생하는, 깨어 있지 못한 시민의 탓이 더 크다. 우리는 갈수록 생존본능에 충실해지고 있다. 정치적 심판도 좋고 자유로운 의사표현과 행동도 중요하지만, 중우(衆愚)와 파시즘으로 흐르지 않으려면 이성적인 사고를 하는 건전한 시민공동체가 있어야 한다. 대중지성을 복원할 수 있는 시스템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 결국 좋은 정치가 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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