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외 러브콜 몰리는 ‘트로이의 여인들’…에든버러 축제 초대도
3일 서울 중구 남산 자락의 국립극장 연습실. 나라를 빼앗기고 남편을 잃고 자식들마저 떠나보낸 트로이 여인들의 비가가 울려 퍼졌다. 영국 ‘에든버러 국제 페스티벌’에 초대받은 국립창극단 창극 ‘트로이의 여인들’ 최종 리허설이었다. 스코틀랜드 최대, 영국에서 세 번째로 규모가 큰 ‘페스티벌 씨어터’ 공연(8월 9~11일)이 잡혀 있다. 소리꾼들은 뼛속에서 우려낸 듯 절창을 토해냈고, 계면조 판소리 가락에 실린 그리스 비극엔 비통함이 더해졌다.
동서양의 전통을 융합한 연출로 세계적 명성을 얻은 싱가포르 연출가 옹켕센(60)은 이날 맨발로 연습실을 휘적이며 돌아다녔다. “동작을 외워서만 하면 안 돼요. 앞선 장면에 대한 반응으로 움직여야 합니다.” 단원들에게 현지 무대 구조를 자세하게 설명하며 동선도 구체적으로 지시했다. 영어로 번역한 대사와 우리말 발음을 알파벳으로 표기한 대사가 함께 담긴 그의 대본엔 연필 메모가 가득했다. “해외 관객 중에 50%는 케이(K)팝을 알아요. 30% 정도는 한국에 판소리란 보물이 있다는 걸 알고 있고요.” 그는 “해외에서 한국이란 나라와 그 문화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서 창극에 대한 관심도 더욱 높아진 것 같다”고 했다.
이 작품은 2016년 초연 이후 꾸준히 해외 무대에 오르고 있다. 싱가포르 예술축제, 영국 런던국제연극제, 네덜란드 홀란드 페스티벌, 오스트리아 빈 페스티벌에 이어 지난해 11월엔 미국 뉴욕에서도 공연했다. 해외 관객들은 기립 박수를 보냈고, 평단의 호평도 쏟아졌다. “그리스 비극을 다룬 오페라를 많이 봤는데, 이렇게 몰입되는 공연은 처음이다. 창극은 정말 강렬하다.”(영국 브라이턴 페스티벌 총감독 앤드루 콤벤) “압도적인 비가가 카타르시스를 불러일으킨다.”(오스트리아 공영방송 ORF) 옹켕센은 “수천년 전에 노래처럼 불렀을 그리스 비극의 원래 모습을 판소리 창극에서 찾았다는 미국, 네덜란드 학자들의 얘기가 인상 깊었다“고 전했다.
■ 창극의 해외 진출 가능성 보여준 ‘트로이의 여인들’
‘트로이의 여인들’은 전통 판소리에 극을 입힌 창극이 해외에서도 통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줬다. 이 작품의 국제 무대 성공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소재다. 원작은 그리스 비극작가 에우리피데스의 기원전 5세기 작품. 옹켕센은 “서구인들은 자신들이 잘 알고 있는 이야기를 동양 사람들이 어떤 식으로 전달할지 기대와 궁금증이 있었을 것”이라고 했다. 판소리는 낯설어도 콘텐츠는 친숙해 서구인들도 쉽게 다가설 수 있었을 거란 얘기다.
처음부터 해외 진출을 목표로 작품을 기획한 국립창극단의 전략도 적중했다. 다양한 작품으로 서구 공연계에 신뢰가 쌓인 연출가 옹켕센에게 연출을 맡기고 싱가포르예술축제와 공동으로 제작한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국내 최고 전문가들도 합세했다. 대사에 소리를 입히는 작창은 명창 안숙선이 맡았고, ‘기생충’과 ‘오징어 게임’의 음악을 만든 정재일이 음악감독으로 나섰다. 한국어 말맛을 살리는 데 탁월한 극작가 배삼식이 대본을 썼다.
감정을 밀도 있게 전하는 판소리 특유의 에너지는 해외 관객들의 감정선을 자극했다. “판소리는 이야기와 감정을 전달하는 힘이 굉장히 강해요. 소리꾼들이 전하는 날것의 감정을 서구 관객들도 그대로 느끼게 되는 거죠.” 옹켄센은 “스펙터클한 요소들은 덜어내고 판소리의 기본에 집중하려 했다”고 말했다. 1998년 첫 방한 이후 많은 국악인과 교류해온 그는 판소리에 대한 이해가 남다른 것으로 알려져 있다.
■ 변신과 실험 거듭하며 ‘젊은 장르’로 진화
20세기 들어 새로 만들어진 창극은 정형화된 형식이 없기에 다양한 현대 예술의 자양분을 흡수하며 진화해 왔다. 그리스 비극을 다룬 것도, 해외 연출가에게 연출을 맡긴 것도 이런 실험의 연장선이었다. 이미 2011년에 독일 연출가 아힘 프라이어가 ‘수궁가’를 내놓았다. 2014년에도 미국과 유럽에서 활약한 루마니아 연출가 안드레이 서반이 ‘다른 춘향’으로 색다른 해석을 선보였다. 작품을 두고선 찬반이 엇갈렸지만 새로운 시도 자체는 긍정적으로 평가받았다.
변신을 거듭해온 창극은 지난 10년 사이 젊은층도 즐겨 찾는 장르로 성장했다. 셰익스피어 희곡(‘리어’, ‘베니스의 상인들’)과 그리스 비극(‘트로이의 여인들’), 웹툰(‘정년이’) 등 다른 장르로 영토를 넓히며 가능성을 입증했다. 올해에도 ‘베니스의 상인들’, ‘정년이’ 등은 일찌감치 전석 매진을 기록했다. 김준수, 유태평양, 이소연 등 간판 창극단원들은 아이돌 버금가는 인기를 누린다. 다만, 국제무대 진출은 아직 갈 길이 멀어 보인다. ‘트로이 여인들’에 대한 국제무대의 호평은 역설적으로 창극이란 장르가 맞닥뜨린 한계를 드러내기도 한다. 국립창극단은 다양한 작품들을 국제무대에 선보이고 싶어하지만 ‘주문’이 ‘트로이의 여인들’에 쏠리고 있기 때문이다.
■ 국제무대 ‘3개 트랙’ 전략
국립창극단도 ‘트로이의 여인들’ 이후 어떤 작품으로 국제무대를 공략할지 고심 중인 것으로 전해졌다. ‘전통적 소재의 창극이냐, 해외에서 친숙한 소재의 창극이냐.’ 국립창극단의 고민은 여기에 있다. ‘판소리 다섯 바탕’ 등 한국적 콘텐츠로 승부하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판소리란 낯선 형식에 내용까지 익숙하지 않으면 해외 관객들에게 쉽게 다가서기 어렵다.
국립창극단은 창극의 국제무대 진출을 목표로 ‘3개의 트랙’을 준비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우선, 셰익스피어 비극이 원작인 창극 ‘리어’를 염두에 두고 있다. 지난해 첫선을 보인 이 작품은 널리 알려진 이야기라 해외 관객에게 진입장벽이 낮다는 강점이 있다. 이 작품 역시 배삼식이 대본을 맡았는데, 노자 사상 색채를 입히는 등 과감한 각색이 신선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정영두 연출에 음악은 작창가 한승석과 정재일이 호흡을 맞췄다. 내년 6월에 초연할 신작 창극 ‘만신: 페이퍼 샤먼’도 해외 진출 작품 후보군에 들어 있다. 만신이 된 여인과 무녀가 된 쌍둥이 딸의 이야기를 다룬 한국적 소재에 무속 음악과 전통 한지와 종이접기가 더해진다. 동서양을 넘나드는 공연을 만들어온 박칼린 연출에 작창은 안숙선이 맡는다. 이밖에 지난 2021년부터 3년 동안 차례로 공연한 ‘절창 시리즈 Ⅰ~Ⅲ’도 선택지에 있다. 4~5시간 걸리는 완창 판소리를 100분 남짓으로 압축한 일종의 ‘미니 창극’이다. 국립창극단 오지원 프로듀서는 “해외에서도 ‘트로이의 여인들’ 이후에 선보일 작품이 뭐냐고 궁금해한다”며 “결국 해외 관객들의 수요가 많은 작품을 선택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했다.
임석규 기자 sky@hani.co.kr
Copyright © 한겨레신문사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 [단독] ‘LH 출신’ 출자 감리업체, 4년간 LH 용역 166억 따냈다
- 급증한 ‘살인 예고’ 54명 덜미…“장난”이라도 구속수사 검토
- “카톡이든 블박이든 영구 삭제”…포렌식 무력화 업체 성업
- 태풍 ‘카눈’, 한반도 한가운데로 핸들 꺾었다…열대야로 예고편
- 슬금슬금 반등 아파트값…바닥 쳤으니 살까, 더 기다릴까
- 흉기 들고 버젓이 교무실까지…또 뚫린 ‘학교 안전’ 어쩌나
- 고성 하루 만에 183㎜ 물폭탄…시간당 최대 90㎜ 호우특보
- 잼버리 이 지경 만든 5인 공동위원장 체제…총책임자가 없다
- 신원식, 전북연맹 잼버리 조기 퇴영에 ‘야권 개입설’ 제기
- “800원 받으려 38㎏ 에어컨까지”…쿠팡의 ‘무조건 배송’ 원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