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철 안에서 '묻지마 방화'···살인미수범에 23년형 선고한 日 [일본相象]
‘일본相象(상상)’은 이웃나라 일본의 다양한 이슈를 전해드립니다. 아울러 한국과 닮은 사회적 현상·맥락을 짚어보고 문제 의식을 공유하고자 합니다.
신림역에서 ‘칼부림’을 벌인 조선이 온 나라를 충격에 빠뜨렸듯 2년 전 일본 도쿄도의 전철 차량에서 흉기를 휘두르고 불을 질러 10여명을 다치게 해 열도를 발칵 뒤집어 놓았던 20대 남성이 징역 23년형을 선고받았다.
지난 1일 마이니치·요미우리신문 등 현지 매체에 따르면 전날 도쿄지방재판소(지방법원)는 살인미수와 방화 등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핫토리 교타(服部恭太·26)에게 징역 23년형을 선고했다. 앞서 검찰은 징역 25년을 구형했다.
다케시타 유 재판장은 “약간의 시간 차이로 많은 사상자가 나와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라며 "다수의 승객을 무차별적으로 노리고 공포에 빠진 승객을 태워 죽이려 한 흉악하고 비열한 범행"이라고 양형의 이유를 밝혔다.
재판부는 쟁점이 됐던 핫토리의 살인미수죄에 대해 “사망할 위험성이 있었다”며 동죄의 성립을 인정했다. 애초 검찰은 핫토리가 열차 내에 불을 붙여 12명을 살해하려 했다고 주장했지만 재판부는 “이들이 사망할 구체적 위험이 있는 장소에 있었는지 불분명하다”며 이 중 2명에 대해서는 살인미수죄 성립을 부인했다.
판결에 따르면 핫토리는 지난 2021년 10월31일 밤 도쿄 지하철 게이오선 특급열차 안에서 30대 남성의 가슴을 칼로 찔러 중상을 입힌 뒤 기름을 뿌리고 불을 붙여 10여명을 살해하려 한 혐의를 받고 있다.
핫토리는 범행을 일으킨 동기로 ‘자살 충동’을 꼽았다. 그는 헤어진 전 여자친구가 다른 남자와 결혼하자 실의에 빠졌다고 피고인 심문에서 언급한 바 있다. 2명 이상을 살해하고 사형을 선고받고자 범행을 벌였다는 변명이다. 핫토리는 이에 관해 “연애 경험은 한 번뿐이지만 그 한 번이 내 인생을 좌우했다”고 정심감정에서 주장했다.
자살 충동을 주변에 털어놓지 못하고 고립을 심화시킨 모습도 확인됐다. 핫토리는 3년6개월간 근무한 부서에서 갑자기 전출을 통보받자 며칠 뒤 사표를 제출했다. 그는 법정에서 “직장 동료에게 상담할 수 없었다. 애초에 친구라고 할 만한 사람도 없었다”고 말했다.
판사가 이번 사건 피해자들에 대한 생각을 묻자 핫토리는 “피해자를 생각하면 솔직히 살아갈 의미가 없는 것 같다”며 “죗값을 갚기 위해서라도 살아가야 하는데”라고 말끝을 흐렸다.
한편 2021년 8월6일 오후 8시30분께 도쿄 세타가야 구간 오다큐선 급행열차에 불을 지르고 3명을 흉기로 찌른 37세 쓰시마 유스케는 징역 19년에 처해졌다.
사실 일본에서 ‘묻지마 살인’이 문제가 된 건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1999년 대낮 도심 번화가에서 2명이 숨지고 6명이 다친 ‘이케부쿠로 사건’이 발생해 일본 사회를 공포에 몰아넣었다. 이후 2001년에는 오사카에서 부잣집 아이들을 노려 흉기를 든 채 이케다 초등학교에 난입한 사건이 벌어졌다. 당시 8명의 아이가 세상을 떠났다.
2008년 도쿄 아키하바라에서는 주행 중이던 트럭이 길거리를 덮쳐 7명이 사망하고 10명이 다쳤다.
수십명이 희생된 안타까운 참사도 이어졌다. 2019년 5월 36명이 숨지고 33명이 중경상을 입은 ‘교토 애니메이션 방화 사건’, 2021년 12월 24명이 죽고 4명이 다친 ‘오사카 방화 사건’ 등도 끊임없이 터졌다.
일본에서는 ‘묻지마 범죄자’를 일컬어 ‘도리마(通り魔)’라고 부른다. 길거리에서 마주치면 해를 주는 악마라는 뜻이다. 이들 도리마들은 꼭 “아무나 상관없었다(誰でも良かった)”고 말하곤 한다.
이는 한국에서도 마찬가지다. 신림역 흉기 난동범 조선은 일면식이 없는 행인들에게 무차별적으로 칼을 휘둘렀고 수원에서도 술에 취한 40대 남성이 역시 모르는 이들을 흉기로 위협했다. 울산에서는 “그저 누구 하나를 해치고 싶다”며 둔기를 구입했다가 스스로 112에 신고하는 일도 벌어졌다.
이처럼 국내에서 불특정 다수에 대해 적개심을 갖고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들의 75%는 전과자였다. 신림동 흉기 난동범 조선 역시 전과 3범에 법원 소년부로 열네 차례 송치되기도 했다.
윤정숙 한국형사법무정책연구원 범죄분석·조사연구 실장은 “30대에 이미 3번의 범죄 경력이 있는 이런 사람을 형 집행이 다 끝나서 교도소에서 출소하면 그냥 지역사회에 돌아다니는 이 시스템이 과연 옳은 것인지 생각을 해봐야 할 것”이라며 “출소할 때 재범의 위험 요인이 남아 있다고 하면 지역 사회 내에서 관리할 수 있는 별도의 시스템이 마련돼야 하는데 그런 시스템이 전혀 발동이 되고 있지 않다”고 MBC를 통해 전했다.
성범죄자의 경우처럼 전과자의 재범 위험성을 평가하고 사후 감독하는 등 관리책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실제 조선은 스무 살이던 2010년 서울 신림동의 술집에서 모르는 사람들과 시비가 붙었다. 그는 상대 일행 중 한 명에게 뇌진탕 증상에 걸릴 만큼 세게 머리를 소주병으로 내리쳤다. 싸움을 말리던 종업원에게도 술병을 휘둘러 종업원의 팔이 찢어졌다. 그럼에도 조선에게 징역 1년6개월에 집행유예 2년이 선고됐다.
이에 대해 윤 실장은 “조선이 피해망상적 사고를 갖고 있지 않을까 하는 의심이 든다. 그러나 잘못된 망상은 단기간의 치료로 고칠 수 있는 부분이 아니고 장기간의 심리치료나 교육이 필요하다”며 “이런 사람들이 '묻지마 범죄'를 저질렀을 때 그 폭행 결과가 좀 경미하다고 해서 단기형이나 벌금형으로 끝내 버리면 교도소에 거의 수용이 되지 않기 때문에 교화 프로그램을 제대로 쓸 수가 없다. 그래서 법원에서도 가해자가 과거에도 불특정한 대상에게 흉기를 휘둘렀거나 범죄를 저지른 경력이 있다고 하면 선고형을 더 높일 필요가 있다”고 매체를 통해 제안했다.
한동훈 법무부 장관은 흉기 난동이 벌어진 다음 날 신림역 현장을 찾아 “명백한 사이코패스 범죄로 보인다. 사이코패스 범죄를 예방할 수 있는 방안을 연구하겠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나 ‘사이코패스 범죄’ 예방법이 따로 있을까.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일어나는 범죄를 단순히 개인의 성격장애 문제로 매도하면 되레 놓치는 부분이 더 많아질 수 있다고 전문가들은 경고한다.
조은경 동국대 경찰사법대학 교수는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우발적으로 범행한 행동만 보고 '이 사람이 사이코패스다, 아니다'라고 진단하기는 불가능하다”면서 “사람들이 굉장히 두려운 범죄를 봤을 때 그냥 '이건 다 사이코패스니까 한 거야'라고 하면서 우리와 상관없는 범죄라고 거리를 둘 수도 있다. (하지만) 사실은 그게 문제를 축소시키고 더 여러 가지 문제들을 유발하는 원인이 될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강남역 화장실 살인사건 직후인 2017년 한국법학회가 낸 '묻지마 범죄의 형사정책적 대응방안'에 따르면 묻지마 범죄의 유형은 △사회현실 불만형 △정신장애형 △만성 분노형 등으로 분류된다.
특히 사회현실 불만형의 경우 경제적 파탄, 소외로 인해 대인관계를 기피하거나 고립되며 사회에 대한 강한 거부감 또는 적대감을 품는 것으로 분석됐다.
실제로 조선은 경찰 조사에서 "남들도 불행하게 만들고 싶었다"고 말하거나 구속 전 피의자 심문(영장실질심사)을 위해 법원에 출석하면서 "저는 그냥 쓸모없는 사람"이라고 말한 바 있다.
과외앱을 통해 ‘또래 살인’을 저지른 정유정 또한 평소 사회적인 유대가 전혀 없었고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직장을 다닌 적도 없었다.
이에 대해 승재현 한국형사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지난 24일 CBS 라디오에 나와 조씨와 정유정 사건을 들어 "두 범인 모두 목적 없이 살아왔고 또래 동성을 향한 시기와 질투를 느껴서 그들을 범행 대상으로 삼았다"고 분석했다.
한국형사정책연구원이 발간한 '묻지마 범죄자의 특성 이해 및 대응방안 연구' 논문에서도 가해자들의 현실에 대한 불만이나 자신의 처지에 관한 비관을 범행 동기로 손꼽았다.
김상균 백석대 경찰학부 교수는 "이런 범죄는 무동기 살인"며 "자신이 처한 현실이나 실패·좌절과 같은 경험의 원인을 자신에게 돌리면 자살이나 자해의 형태로 나타나지만 사회로 돌리기 때문에 불특정 다수에 관한 폭력의 형태로 발현된다"고 설명했다.
‘승리조(勝ち組)와 패배조(負け組)’로 나뉘어 양극화가 진행된 일본 사회도 이와 다르지 않았다. 일본 법무성 산한 연구기관이 최근 묻지마 범죄 가해자 52명의 판결을 분석한 보고서를 발간했다. 그에 따르면 주요 범행 동기는 사회로부터의 완전한 고립과 경제적인 어려움 등으로 인한 절망으로 나타났다.
국내 전문가들은 묻지마 범죄가 사전 예방이 어렵지만 사회안전망을 강화해 방지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한국형사정책연구원은 논문에서 직장 내 상담센터와 지역사회의 정신보건센터나 의료기관이 적극적으로 은둔형 외톨이나 극단적 불만형 사람들을 발굴하고 적극적으로 치료할 것을 조언했다.
승 선임연구위원은 “묻지마 범죄, 무차별 범죄라는 게 사실은 없다고 생각한다. 국가가 그 이유를 찾아야 되는데 못 찾으니까 그냥 편하게 '묻지마'라고 이야기하고 사이코패스 검사(PCL-R)를 해서 '이 범죄의 원인은 사이코패스야'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다. 사이코패스는 성격장애 현상이다. 현상은 범죄 원인이 아니다. 그 성격 장애를 만들어 놓은 개인적·사회적 배경이 범죄의 원인”이라며 “이 사람이 범죄를 저지르게 된 결정적인 원인을 찾아야 한다. 같은 또래에 대한 분노, 살인을 해야 할 만큼 강력한 분노를 불러일으키는 동기, 그 열쇠부터 찾아야 이런 범죄를 막을 수 있는 최소한의 대책을 만들 수 있다. 왜 이런 상황에서 이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한 구체적이고 설득력 있는 원인을 찾아서 국가가 국민에게 답을 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한국법학회도 보고서를 통해 "묻지마 범죄자의 다수는 사회·경제적인 취약계층으로 직장, 교육, 가정환경 등이 열악한 미혼자들"이라며 "가장 최선의 형사정책은 복지정책"이라고 강조했다.
공정식 경기대 범죄심리학과 교수는 "범죄 경력이 많은 우범자들을 철저히 관리하는 게 필요하다"며 "특히 사회적인 어려움을 겪는 젊은 층이 성장할 수 있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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