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트로트’ 컨트리, 빌보드 1~3위 독식... PC주의 반발 탓?
백인들, PC주의 반발
컨트리 음악 밀어줘
‘경찰에게 막말을 하고 얼굴에 침을 뱉어봐. 멋지다고 생각해? 작은 마을에서 그렇게 해봐. 얼마나 가나 한번 봐.’ 미국 가수 제이슨 알딘이 부른 노래 ‘트라이 댓 인 어 스몰 타운(Try That in a Small Town·소도시에서 그 짓을 해봐)’의 가사다. 이른바 PC주의(정치적 올바름)를 주창하는 미 대도시 사람들이 자유를 내세워 저지르는 못된 행태를 소도시에서 응징하겠다는 도발적 가사의 이 노래가 빌보드 ‘핫 100′ 1위에 올랐다. 이 노래의 장르는 힙합·댄스·K팝 인기에 미 음악계 주류에서 밀려났다고 여겨진 컨트리음악이다.
빌보드지는 지난달 31일 주간 ‘핫 100′ 순위를 발표하면서 “1~3위를 모두 컨트리음악이 차지했다”며 “1958년 8월 4일 집계를 시작한 이후 처음으로 컨트리음악이 상위 3위를 싹쓸이했다”고 전했다. 모건 월런의 ‘라스트 나이트’, 루크 콤스의 ‘패스트 카’가 각각 2·3위에 오른 노래들이다.
컨트리음악은 미국적 정서를 담았다고 여겨지는 장르다. 한국의 트로트 격이다. 하지만 이 장르의 음악을 부르는 가수 대부분이 백인 남성인 데다 가사의 주제 중에 보수적인 내용을 담은 것이 적지 않아 젊은 층엔 외면을 받아왔다.
1920년대 미 남부에서 유래한 컨트리음악은 노동자 계급을 대변하는 가사, 단순한 구성, 어쿠스틱 악기 반주 등이 특징이다. 백인·남성 우월주의적 색채를 띤다고 여기는 이들이 많다. 컨트리음악은 그동안 PC주의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낙인을 찍고 온라인 ‘왕따’를 시키는 이른바 ‘캔슬(cancel·취소) 문화’의 공격 대상이 되어 왔다. ‘캔슬 문화’란 소셜미디어에서 표적으로 삼아 구독·팔로 등을 집단적으로 취소하는 행태를 뜻한다.
진보가 주도하는 PC주의와 ‘캔슬 문화’에 대한 반감으로 보수가 집결하면서 그동안 공격을 받아온 문화 상품들의 ‘역습’이 최근 영화·도서·음악 등 전 분야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분위기다. 음악 부문의 반격을 이끄는 것이 컨트리음악, 그중에서도 ‘트라이 댓 인 어 스몰타운’이다.
이 곡은 도시에서 하는 ‘못된 행위’, 이를테면 신호 대기 중인 할머니의 차를 강탈하거나 경찰에게 침을 뱉는 행태를 시골에서 할 경우 본때를 보여주겠다는 내용이다. 시골엔 사회적 연대가 끈끈하고 할아버지가 물려준 총도 있으니 도시 녀석들의 철모르는 행동은 꿈도 못 꿀 것이라고 일갈한다.
애초 이 곡은 지난 5월 발표될 당시만 해도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하지만 지난달 뮤직비디오를 공개하면서 논란의 중심으로 떠올랐다. 뮤직비디오에 2020년 일어난 ‘흑인 목숨은 소중하다(Black lives matter)’ 캠페인의 과격한 시위 장면이 등장한 데다 하필이면 해당 영상을 찍은 장소가 테네시주(州) 컬럼비아 법원 앞이라는 점이 화제가 됐다. 컬럼비아 법원은 1927년 한 흑인 남성이 백인 여성을 성폭행했다는 누명을 쓰고 백인 폭도들에게 집단 폭행을 당한 장소다. 결국 이 노래에 대해 민주당 정치인들이 비난하고 일부 방송은 뮤직비디오 방영을 금지하는 등 ‘인종 차별’ 낙인이 찍혔다. 올딘은 “이 노래엔 인종과 관련한 가사가 없다”며 반박했지만 결국 PC주의자들에게 곡 하나가 ‘캔슬’될 위기에 처한 것이다.
보수층은 즉각 반격을 시작했다. 도널드 트럼프 전 미 대통령이 소셜미디어에 “알딘을 응원한다”며 그의 노래를 옹호하기 시작했고, 다른 공화당 정치인이 나서 동조했다. 알딘의 노래는 7월 마지막 주 빌보드 차트 2위를 차지한 데 이어 8월 첫주엔 1위를 거머쥐었다. 빌보드 핫 100은 실물 음반과 디지털 다운로드, 뮤직비디오 관람 및 라디오 방영 횟수 등을 종합해 산출한다. 알딘의 뮤직비디오는 올라온 지 3주 만에 유튜브 조회 수가 2600만건을 넘어섰다.
공교롭게도 빌보드 2위인 모건 월런 역시 PC주의자들에게 공격을 받았던 가수다. 지난해 3월 사적인 자리에서 ‘검둥이(nigger)’라고 말하는 장면이 담긴 동영상이 유출되며 집중포화를 받았다. 옆집 사람이 몰래 촬영한 이 영상에 월런은 사과했지만 방송사들은 그의 음악을 금지하고 음원 플랫폼에서도 그의 노래가 사라졌다. 하지만 이 또한 역풍으로 이어져 보수적인 백인들은 그의 음악을 폭발적으로 소비했다. 그의 노래는 핫 100 1위를 14주 동안이나 차지했고, 아직도 인기가 이어지고 있다.
3위에 오른 ‘패스트 카’는 원래 1988년 흑인 여성 가수 트레이시 채프먼이 불렀던 원곡을 리메이크한 노래다. 마트에서 일하며 일탈을 원하는 처참한 심정을 담은 흑인 노동 계층의 현실을 담은 이 노래를 백인 컨트리 가수가 불러 유행시켰다. 한때 흑인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이런 자조적 심리가 트럼프의 주 지지층 중 하나인 저소득 백인 남성의 정서로 자리 잡았다는 평가가 나왔다.
PC주의에 대한 반발은 최근 미국에서 종종 문화 전쟁으로 확대되고 있다. 지난달 개봉한 영화 ‘사운드 오브 프리덤(자유의 소리)’은 실화를 바탕으로 인신매매 문제를 지적한 완성도 높은 영화인데도 주인공이 극우 음모론자이며 영화 제작자와 주연 배우가 트럼프 지지자라는 낙인이 찍혀 주류 영화계의 외면을 받았다. 진보 매체인 뉴욕타임스(NYT) 등 유력지가 아예 다루지 않았음에도 보수층의 소문만으로 관람객 1위를 차지했고 ‘플래시’, ‘분노의 질주’ 등 블록버스터 영화보다 많은 수익을 거뒀다.
도서 분야에서도 진보 PC주의자들을 겨냥한 보수층의 반격은 이어지고 있다. 폭스뉴스는 최근 “진보 도서에 우호적인 NYT에서도 우파 성향의 작가들이 12~15위 네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며 “만화책에서도 이런 경향은 확인돼 보수 논객으로 꼽히는 에릭 줄라이가 내놓은 만화책 ‘이솜(Isom)’ 1권은 단 4일 만에 선주문 금액 170만달러(약 22억원)를 돌파했다”고 전했다.
☞캔슬 문화
인종·젠더 등 분야에서 논란의 소지가 있는 말이나 행동을 한 유명인에 대해 소셜미디어 팔로·구독을 취소(cancel)하는 문화. 언행을 문제 삼는 데 그치지 않고 공격 대상인 사람을 매장하려는 데 악용돼, 과도한 PC(정치적 올바름)주의라는 지적도 나온다. 싱가포르 등은 표현의 자유를 침해할 소지가 있다는 이유로 캔슬 문화 금지법 마련을 추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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