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의 소리] 졸업 예정자의 위치
다음 상황들에는 공통점이 있다. 고장 난 엘리베이터를 뒤로하고 계단을 오를 때와, 덜컹거리는 시내버스에 앉아 창밖을 바라볼 때, 그리고 졸업을 몇 달 앞뒀을 때. 마음속에 이런 물음이 두둥실 피어오른다. “나는 어디쯤 와있나.”
졸업이란 기대감과 두려움, 그리고 불확실성이 섞인 연기 속에서 두꺼운 희곡의 마지막 막을 한 장 한 장 넘기는 것과 같다. 왔던 길을 돌아보며 그 경험들이 이 희곡의 결말을 얼마나 성장시키고 준비시켰는지 고민하게 한다. 그렇기에 졸업을 앞둔 사람은 ‘나는 어디쯤 와있나’라는 질문을 자신에게 건넨다.
일단은 의사 면허 실기 시험을 3개월 앞두고 있다. 실기 시험에서는 배우가 연기하는 표준화 환자를 대상으로 문진과 신체 진찰을 진행해야 한다. 필요에 따라서는 수액 투여나 수혈 혹은 심폐소생술 등의 술기를 인체 모형에 실시한다.
“그건 교수님께서 설명해 주실 겁니다.” “밖에 계신 간호사 선생님께서 알려주실 거예요.” 정말 하고 싶은 말이지만 참아야 한다. 도움받을 교수님과 간호사 선생님은 없다. 오로지 스스로 진찰하고 표준화 환자의 질문에 대답해야 한다. 그동안 배운 것을 혼자 힘으로 환자 앞에 촤르륵 펼쳐내야 한다. 독립이다.
6년의 의학 교육 과정을 거쳤지만 과연 내가 할 수 있을까. 그동안 뒤로 흘려보낸 시간은 등에 업혀 무기가 되었을까. 시간을 무기로 빚는다면 묵직할 것이다. 이 무기에는 ‘당신의 대학 과정을 증명하시오’, 즉 ‘당신이 무기를 휘두를 수 있는지 보이시오’라는 문구가 새겨져 까끌까끌할 것만 같다. 휘두를 수 있을까. 졸업을 앞두고 기대의 설레는 손짓과 걱정의 소심한 머뭇거림이 함께한다.
대충 소주에 고춧가루 타서 마시거나 코에 침 바르기만 해도 증상이 낫는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그런 방법들은 분명한 한계가 있다. 발이 저린 적이 있다. 옆에서 게임을 하던 친구가 코에 침을 바르라고 말해주었다. 그래서 곧장 손가락에 침을 발라 친구의 코에 문질렀다. 발 저린 게 사라지기는커녕 친구에게 맞아서 팔까지 아파졌다. 그래서 나는 민간요법을 믿지 않는다.
농담이고, 어쨌든 발 저린 것부터 감기, 그리고 더 중한 질병에까지 민간요법이 마련되어 온 것을 보면 건강이 얼마나 중요한 주제였는지 짐작이 된다. 다만 내가 그 주제를 직관적 혹은 합리적으로 다룰 줄 아는 사람일지 졸업을 앞두고 상념이 피어난다.
사람을 다룰 줄 알기 위해 다양한 교육을 받는다. 사람의 신체를 해부할 기회까지 받았다. 자신의 시신을 기증하겠다고 서약하신 분이 계시고, 죽음이 찾아온 후에 그 몸이 학생들의 앞에 온다. 이 시신을 ‘카데바(cadaver)’라고 부른다. 단어의 뜻은 단순히 ‘시체’이지만 학문적 용도로 쓰이는 것을 그렇게 부른다.
해부 실습에 앞서 추모실에 가 위패를 마주한다. 묵념하고 돌아와 시신 앞에 선다. 시신의 피부는 오래되면 거뭇거뭇해진다. 그리고 카데바로는 노인이 많다. 검게 변한 노인을 보며 멍해지는 학생도 있고 눈물을 흘리는 학생도 있다. 이내 감사한 마음으로 승화되어 해부용 칼을 잡는 손에는 결의가 선다.
과정이라는 것의 안에 있다 보면 마음으로 다가오는 이미지들이 있다. 의대 과정 안에서 마주친 검은 노인 카데바의 이미지가 그렇다. 또 다른 이미지는 똑같이 검은 피부를 가진 한 할아버지 환자께서 진료를 받으시던 모습이다. 웃음이 무척 많으신 분이셨는데 눈웃음도 많으셔서 그런지 눈가에도 주름이 자글자글했다. 살아오며 땡볕을 많이 받으셨는지 피부는 검다 못해 시꺼멨다. 마르고 왜소한 몸은 햇빛과 주름으로 덮였지만 그 안에는 활기라는 이름의 장어가 사는 듯 팔다리가 진료실의 공기를 가르며 움직였다. 용을 보는 것만 같았다. 대단한 생기를 가지신 분이었다.
이 까맣고 마르고 왜소한 할아버지 환자, 그리고 해부학을 배울 때 내 앞에 누워있던 까맣고 마르고 왜소한 카데바의 이미지를 겹쳐 떠올려 본다. 인간이 태어나서 움직이다가 늙고 스러지고 산 것보다 더 오래 가만히 멈춰있게 될 때까지 의사를 만난다. 생과 사의 두 이미지 사이에 놓인 종잇장 같은 삶이라는 시간. 그 두꺼운 마분지 위에 의사가 서 있나 보다. 그 가장자리에 졸업을 앞둔 내가 서 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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