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남국의 아포리아]위대한 미국 시대의 황혼
[편집자주]아포리아는 그리스어의 부정 접두사 아(α)와 길을 뜻하는 포리아(ποροσ)가 합쳐져 길이 없는 막다른 골목, 또는 증거와 반증이 동시에 존재하여 진실을 규명하기 어려운 난제를 뜻하는 용어. '김남국의 아포리아'는 우리 사회가 직면한 여러 문제에 대해 지구적 맥락과 역사적 흐름을 고려한 성찰을 통해 새로운 해석과 대안을 모색한다.
지난 6월 미국 대법원은 대학입시에서 인종을 고려하는 '적극적 평등실현 정책'(affirmative action)이 수정헌법 14조의 평등한 보호원칙을 어긴 위헌이라고 판결했다. 대법원은 하버드대학 등이 입시에서 인종을 고려할 때 생겨나는 두 가지 위험성, 즉 특정 인종의 학생들이 동일한 피부색 때문에 모든 사회문제에 대해 똑같은 판단을 할 것이라고 보는 잘못된 고정관념 위에 서 있었고 인종을 고려한 입시 때문에 이 정책의 혜택을 받지 못한 다른 인종 학생들의 합격률이 떨어지는 부정적인 영향을 막지 못했다고 봤다.
모든 개인은 누구나 자신의 인종이나 사회적 지위에 상관없이 평등하게 대우받아야 한다. 그러나 보다 평등한 사회를 이루기 위해 역설적으로 어떤 집단에 더 혜택을 주는 불평등한 정책을 채택하는 경우가 있다. 특정 시대에 예외적으로 적용되는 이런 불평등한 정책을 정당화하는 논리에는 두 가지 방식이 있다. 첫째는 역사적으로 누적된 차별로 한 집단이 구조적으로 불리한 상태에 있을 때 그 집단의 지위를 교정해주기 위해 보상이 필요하다는 자유주의적 사회정의의 논리다. 둘째는 다양하게 분화한 사회에서 구성원이 각 분야에 고르게 대표됐을 때 사회의 안정을 이룰 수 있다는 공리주의적 이익의 논리다.
1960년대 미국에서 처음 이 정책이 도입된 시기 주요 목표집단은 노예제로 차별받은 흑인들이었고 당연히 보상의 성격을 띤 자유주의적 사회정의의 논리가 우세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미국 사회가 노예제의 유산으로부터 멀어지고 이민자를 비롯한 새로운 정책목표집단이 생겨나면서 점점 다양성의 이익이 주는 공리주의적 정당화 논리가 강해졌다. 즉 1960년대 이 정책의 성격이 흑인들의 불리한 처지를 교정하려는 적극적 차별시정 정책이었다면 최근에는 노예제 유산과 관련 없는 새로운 이민자 집단까지 포괄하려는 적극적 평등실현 정책으로 바뀐 것이다.
이와 같은 논리전환의 실마리는 1978년 미 대법원의 캘리포니아대학 판결에서 이미 보인다. 당시 마셜 대법관 등이 3세기에 걸친 인종분리와 비극적 불평등 대우를 지적하며 과거 부정적 유산을 치유하기 위해 적극적 평등실현 정책을 지지한다고 논지를 편 반면 파월 대법관은 학문의 자유를 증진하는 다양한 학생집단을 구성하기 위해 인종을 입학기준으로 사용할 수 있다는 논리를 제시했다. 다양성의 혜택을 지지하는 파월의 논리는 2003년 미 대법원의 미시간대학 판결에서 핵심논리로 다시 등장한다.
2003년 판결에서 오코너 대법관은 다양한 학생집단의 구성이 미국의 사활적 이해며 지원자 개인 위주로 엄격한 검토를 거친 인종의 고려는 합헌이라고 주장했다. 당시 미시간 로스쿨은 LSAT 점수가 164~166점, 학점 3.25~3.49인 백인이나 아시아인 학생이 약 22%의 합격률을 보인 반면 같은 점수대의 소수인종 학생이 100% 합격률을 보인 것을 설명하면서 2000년 경우 학점 3.5가 넘고 LSAT 점수가 165점 이상인 흑인 학생이 전국적으로 26명이었지만 백인이나 아시아인 학생은 3173명이었기 때문에 다양한 학생집단 구성을 위해 소수인종 지원자를 배려한 것은 정당하다고 주장했다.
이와 비교하면 올해 이뤄진 미 대법원 판결은 사회적 차별에 대한 보상에서 사회적 안정을 위한 다양성 증진으로 바뀌어온 지난 60여년에 걸친 적극적 평등실현 정책의 정당화 논리 자체를 거부한다. 대학들이 너무 오랫동안 한 사람이 직면한 도전과 그가 습득한 기술들, 삶에서 배운 교훈을 바탕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형성한다는 사실을 외면하고 피부색이 정체성을 결정한다고 잘못 판단했다는 것이다. 이 판결은 특히 적극적 평등실현 정책이 전제한 미국이라는 공동체에 대한 관심보다는 개인의 능력과 기회의 평등을 강조한다.
물론 2003년 오코너 대법관이 앞으로 25년 안에 적극적 평등실현 정책의 자연스러운 소멸을 희망했듯이 이 정책은 인종을 고려할 필요가 없는 평등한 사회가 실현되면 언제든지 폐지해야 할 한시적 조치다. 그러나 미 대법원은 이 정책의 정당성을 논리적으로 반박할 뿐 2016년 경우 흑인가구의 순자산 평균이 1만750달러로 백인가구의 17만1000달러보다 아직도 10배나 적은 현실을 고려하지 않았다. 사회정의와 다양성의 거대담론 대신 개인의 능력과 기회의 평등이 전면에 등장하는 이번 판결에서 '여럿으로부터 하나'(E Pluribus Unum)를 구호로 역차별적인 배려를 통해서라도 구성원들을 통합해 하나의 정치공동체를 이루고자 한 미국 역사의 한 시대가 저무는 모습을 본다.
김남국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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