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워인터뷰]“한국-대만 반도체 협력 강화해야 中-北 위협도 대처 가능”
2000∼2008년 대만 최초의 여성 부총통을 지낸 뤼슈롄(呂秀蓮·79) 전 부총통의 말이다. 미국과 중국이 정보기술(IT) 분야에서 치열한 패권 다툼을 벌이고 있는 지금 각각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TSMC라는 세계적 반도체 기업을 보유한 두 나라가 뭉쳐 영향력을 행사하면 그 어떤 강대국도 한국과 대만을 함부로 하지 못할 것이라고 거듭 강조했다.》
최근 강연을 위해 내한한 그는 지난달 28일 서울 종로구 동아미디어센터 20층 CC큐브에서 인터뷰를 갖고 “중국이 대만을 침공하려 든다면 현 국제 정세상 한국과 일본 또한 반드시 위험에 빠질 것”이라며 “한국, 대만, 일본 세 나라가 유럽연합(EU)과 유사한 ‘아시아 민주주의-경제 번영 블록’을 창설해서 대비해야 한다”고 권했다. 내년 1월 치러질 대만 총통 선거와 이 선거에서 승리한 새 총통이 취임하는 같은 해 5월까지의 4개월이 특히 위험하므로 세 나라가 군사, 경제적 협력을 강화해야 한다고 했다.
그는 ‘대만 민주화 및 여성 운동의 대모(代母)’로 불린다. 국민당이 장기 집권하던 1979년 진보 잡지 ‘메이리다오(美麗島)’에 관여한 민주 인사들이 주축인 민주화 운동 ‘메이리다오 사태’가 발발했다. 당시 그는 집회에서 연설을 했다는 이유로 체포돼 12년형을 선고받고 5년 넘게 복역했다.
집권 민진당 출신의 첫 총통이자 반중 노선을 주창한 천수이볜(陳水扁) 전 총통은 당시 이 사건의 변호인으로 활동하다 정계에 입문했고 총통까지 올랐다. 뤼 전 부총통은 천 전 총통 시절 최초의 여성 부총통을 지냈다.
수차례 생사의 고비도 겪었다. 젊은 시절 암 투병을 했고 2004년 천 전 총통의 암살 시도가 있었을 때는 옆에 있던 그 또한 무릎에 총상을 입었다. 부총통 퇴임 후 양성평등, 환경 운동 등에 주력했다. 중국의 압제에 굴복하면 안 되지만 일방적인 미국 추종도 곤란하다며 ‘자강’을 거듭 강조했다. 독신인 그는 “대만의 자유는 물론이고 나 자신의 자유 또한 중시한다”며 호탕하게 웃었다. 다음은 일문일답.
―한국과 대만의 반도체 협력이 왜 중요한가.
“두 나라는 발달된 과학기술, 민주주의, 시장경제, 유교 문화, 강대국의 군사 위협 직면이란 많은 공통점을 지녔다. 미국과 중국이 전방위적 패권 다툼을 벌이고 있는 상황에서 우수한 반도체 기술을 보유한 한국과 대만의 협력은 엄청난 시너지를 낼 수 있다.
TSMC가 미국 서부 애리조나주에 반도체 공장을 짓기로 했는데 사막 지대여서 공업용수가 중요한 반도체 공장에 적합하지 않다. 미국은 노동 관련 법규 등이 까다로워서 한국 및 대만에서처럼 근로자들이 불철주야 일하기도 어려운 환경이다. 두 나라의 반도체 기업이 손을 잡으면 굳이 천문학적 돈을 들여 미국에 공장을 짓지 않아도 되고 그 어느 나라도 한국과 대만을 함부로 하지 못할 것이다. 이게 바로 ‘윈윈’이다.”
―대만과 미국의 대선이 모두 치러지는 내년에 중국이 양국의 정치적 혼란을 틈타 대만을 침공할 가능성이 있다는 전망이 속속 제기된다.
“중국의 대만 침공은 독단적으로 이뤄지지 않을 것이다. 북한이 한국을 침공하는 것과 동시에 이뤄지거나, 북한의 침공이 중국의 침공보다 먼저 이뤄질 것으로 예상한다. 중국이 대만을 공격하면 대만과 인접한 일본 또한 어떤 식으로든 참여가 불가피해 ‘제3차 세계대전’으로 비화할 수 있다.
특히 내년 1월 대만의 총통 선거가 실시되고 여기에서 승리한 새 총통이 취임하는 같은 해 5월까지의 4개월이 매우 위험하다. 그 기간에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있다. 그래서 한국, 대만, 일본 세 나라가 군사적으로도 협력하는 것이 중요하다. 윤석열 대통령이 ‘대만 문제는 중국의 내정이 아니라 전 세계의 문제’라고 발언한 것을 감사하게 생각한다.”
―내년 총통 선거 전망은…. 일각에서는 중국이 반중 성향인 라이칭더(賴清德) 부총통 겸 민진당 후보를 떨어뜨리기 위해 어떤 식으로든 선거에 개입할 것으로 본다.
“중국의 개입을 크게 우려하지 않는다. 홍콩의 반중 시위 여파로 차이잉원(蔡英文) 현 총통이 2020년 압도적 격차로 재선에 성공한 후 전국 단위의 주요 선거에서 친중 노선을 내세운 후보가 승리한 적이 많지 않다. 설사 중국이 배후 조종한다 해도 허우유이(侯友宜) 국민당 후보, 커원저(柯文哲) 민중당 후보가 승리할 가능성이 크지 않다고 본다.
라이 부총통은 국회의원, 타이난 시장, 행정원장(총리), 부총통 등을 거쳐 행정 경험이 풍부하다. 의사 출신이며 하버드대 보건학 석사는 국회의원 시절 땄을 정도로 성실하고 영어도 유창하다. 오래전부터 ‘대만은 주권국’임을 강조해 온 강단 있는 인물이다.
라이 부총통이 15일 산티아고 페냐 신임 파라과이 대통령의 취임식에 참석하기 위해 미국을 경유하는 것에 중국이 반발하고 있는데 과한 반응이다. 대만과 파라과이는 직항도 없는데 경유를 하지 않고 어떻게 중남미를 가겠나. 나도 부총통 시절 다른 나라를 가면서 수차례 미국을 경유했다.”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의 집권 후 ‘양안(兩岸·중국과 대만)’ 관계가 급격하게 악화됐다.
“모든 중국 지도자는 ‘중국이 세상의 중심이고 지구는 중국을 중심으로 회전한다’고 여긴다. 시 주석이 유독 심한 것은 스스로를 중화인민공화국을 건국한 마오쩌둥(毛澤東) 이상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친강(秦剛) 전 중국 외교부장의 전격 경질, 싱하이밍(邢海明) 주한 중국대사의 외교 결례 발언 같은 사안은 진짜 원인이 뭐가 됐든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중국공산당은 무엇이 민주주의인지 모른다. 이런 상황을 만든 시 주석을 너무 자극하진 말되 중국을 제외한 나머지 세계 각국의 공조와 연합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중국에 보여줘야 한다.
일각에서 ‘우크라이나 다음은 대만’이라고 하지만 대만은 절대 ‘제2의 우크라이나’가 되지 않을 것이다. 북한이 미사일을 쏠 때는 한국이 전 세계에서 제일 위험해 보이지만 막상 한국에 와 보면 얼마나 평온하고 발전된 나라인가. 대만도 마찬가지다. 대만은 단 한 번도 중국의 일부였던 적이 없다.
시 주석은 ‘하나의 중국’을 주장하지만 이는 민주사회에 사는 대만인에게 일방적으로 ‘공산주의’를 강요하는 것이다. 대신 나는 ‘하나의 중화(中華)’를 언급하고 싶다. 시 주석에게도 ‘하나의 민족이 여러 나라가 될 수 있다’는 이 개념을 강조하고 싶다.”
―한국 일각에서는 과거사 때문에 일본과의 협력을 주저하는 분위기가 있다.
“과거사 때문에 일본과 척을 지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당장 북한의 핵 위협에 공동 대처하는 것이 훨씬 중요한 사안 아닌가. 한국, 대만, 일본이 EU 같은 ‘아시아 민주주의-경제 번영 블록’을 창설해야 한다. 앞서 언급한 한국과 대만의 공통점은 일본에도 고스란히 적용된다. 세 나라가 ‘황금의 삼각형(골든 트라이앵글)’을 만들 수 있다.”
―퇴임 후 양성평등, 환경 운동 등에 주력했다.
“전 세계가 극한의 기후위기 같은 범국가적 난제를 겪고 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는 데 당적, 남녀, 국적 등의 구분이 무의미하다고 느껴질 때가 많다.”
―대만 또한 아시아 주요국처럼 과거 여성 인권이 낙후됐다. 또 아시아의 유명 여성 정치인은 대부분 부친이나 남편의 후광으로 높은 자리에 올랐지만 평범한 집안에서 자라 최초의 여성 부총통이 됐다. 후배 여성에게 어떤 조언을 해 주고 싶은가.
“다른 사람의 의견이나 평가에 신경 쓰지 말고 자신의 길을 가라. 나를 ‘민주화 운동의 대모’로 부르는 사람도 있지만 어떤 단어나 표현으로 나를 규정하고 싶지 않다. ‘나 자신이 되는 것(Be yourself)’이 가장 중요하다.”
뤼슈롄 전 대만 부총통 |
△ 1944년 타오위안 출생 △ 1967년 국립대만대 법학 학사 △ 1978년 미국 하버드대 법학 석사 △ 1979년 민주화 운동 ‘메이리다오’ 사건으로 체포 및 투옥 △ 1985년 석방 △ 1990년 민진당 입당 △ 2000∼2008년 대만 최초 여성 부총통 |
하정민 기자 dew@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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