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로워지기 위해 스스로를 가뒀던 사람들[김영민의 본다는 것은]
학생들을 만나기 전에 내가 홀로 피렌체를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은 단 하루. 이 하루 동안 나는 무엇을 할 것인가. 서양미술사를 대표하는 명화와 조각들로 가득한 우피치 미술관에 갈 것인가, 다비드상을 보기 위해 아카데미아에 갈 것인가, 건축가 부르넬레스키의 돔으로 유명한 대성당에 갈 것인가, 해 질 무렵 베키오 다리를 건너갈 것인가. 나는 그 답을 이미 알고 있다. 나는 산마르코 수도원에 갈 것이다.
피렌체의 여름은 덥다. 늦잠을 자면 이미 그날의 가장 좋은 시간은 당신을 떠난 뒤다. 이른 아침에 움직여야 한다. 아무리 더운 이탈리아 여름이라 해도 밤에는 온도가 꽤 떨어지기에 이른 아침이라면 누구나 황금 같은 시간을 누릴 수 있다. 일찍 일어나 밖으로 나서라. 살갗에 닿아도 좋을 선선한 공기와 나직한 목소리라도 좋을 고요한 시간이 기다리고 있다. 그 시공을 통과하여 마침내 산마르코에 도착했다. 예상대로 사람은 별로 없다. 나는 이곳에 사람을 만나러 온 것이 아니다.
방 밖을 절실하게 꿈꾸기 위해 방의 안이 필요하다. 방 안의 그림과 창문은, 그 방 아닌 곳을 보여주기 위해 거기에 존재한다. 이곳 아닌 다른 곳을 느끼기 위하여 사람들은 그림을 걸고, 창문을 연다. 창문과 그림은 당장의 절망과 권태에도 불구하고 존재할 또 다른 가능성을 시사한다. 이 닫힌 방이 전부이고 다른 가능성은 전혀 없다면, 사람들은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다. 방 안에 걸려 있는 그림과 창문은 방 안에 홀로 있는 고단한 삶을 견딜 수 있게 해준다.
수도원 창문들을 바라보면서, 여러 장소의 창문을 떠올린다. 거실의 창문, 기차의 창문, 감옥의 창문, 창호 가게의 창문, 마음의 창문. 창문 없는 곳도 떠올린다. 좁은 고시실, 땅속에 묻힌 관, 열리지 않는 금고, 과묵한 돌덩이, 꽉 다문 마음, 창 없는 우주.
창문은 희망이되 간신히 존재하는 희망이다. ‘기회의 창’(Window of opportunity)이라는 영어 표현이 있다. 그것은 무엇을 하기 위한 기회가 제한된 시간 내에 있음을 뜻한다. 기회는 언제나 거기 그대로 있지 않다. 꾸물거리면 기회의 창은 조만간 닫히고 말 것이다. 그처럼 간신히 잠시 존재하는 기회와 희망을 애써 모색한 사람들을 생각한다. 인간의 비참 앞에서 애써 구원의 가능성을 인정한 사람들을 생각한다. 그들은 고민 끝에 화폭에 창문을 기어이 그려 넣기로 결심한 화가들이다.
화가들은 고민한다. 창문을 그릴 것인가, 말 것인가. 창문을 그린다는 것은, 어둡고 닫힌 현실만을 그리는 일과 다르다. 밝게 빛나기만 하는 미래를 묘사하는 일과도 다르다. 어두운 방에서 밝은 곳을 보며 서성이는 인간의 조건을 그린다는 것을 뜻한다. 그래서 2023년 더운 여름, 산마르코 수도원에 창문을 보러 갔다. 이제 그곳에 사는 사람은 없다. 그 빈방 속 창문을 오랫동안 응시하다 돌아왔다.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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