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희은의 어떤 날] 오, 집밥의 위대함이란
[양희은의 어떤 날]
양희은 | 가수
매달 마지막주 월요일이 원고 마감일이다. 그래서 마감 하루 전 일요일 아침, 목욕재계하는 마음으로 일찍 동네 목욕탕으로 향한다. 그리고 장을 봐서 우리 세 식구 먹을 점심, 저녁거리를 만들면서 세탁기 돌리고 또 그 틈에 엊저녁 불려놓은 시커먼 잡곡을 압력밥솥에 안친다.
금, 토, 일 사흘 동안 세 식구가 함께 먹을 밥상 차리기에 목요일 오후 장보기도 중요하다. 6~7월 두달 동안 ‘노영희의 철든부엌’에서 운영하는 집밥 한상차림 배우기 시간에 여름 반찬 만들기를 배웠다. 노각생채, 애호박눈썹나물, 뱅어포조림, 마른새우 넣은 아욱국, 마른새우조림, 꽈리고추찜무침, 애호박쇠고기조림, 전복조림, 닭볶음 등이다.
밖에서의 일이 방송인이니 가수니 뭐니해도 주부로서 혼자 부엌을 꾸려온 지 37년 차 아닌가? 무얼 그리 또 배우려느냐며 친구들이 웃는다. 내가 정말 배우고 싶은 건 따로 있다. 재료를 고르고 손질하는 마음가짐, 힘 뺀 채 슬렁슬렁하는 선생님의 능숙하고도 잔잔한 손매와 그릇에 담는 담음새와 마무리 과정까지….
배우는 것보다 중요한 건 정성스레 차려진 나를 위한 밥상을 간절히 원한다는 점이다. 어디로 도망갈 수 없이 고스란히 삼시 세끼, 3인분(엄마, 남편, 나)에 강아지 두마리까지 챙겨야 하는데, 국물 없이는 빡빡하다시는 엄마에 우리 부부 역시 맑은국, 옅은 된장국이 있어야 좋고 새빨가니 매운 김치보다 옅은 주황색의 국물 많은 물김치가 필요하다. 또 마른반찬 서너가지는 기본이어야 남편 도시락 싸기 편하니 한주일에 두번은 장을 본다.
외식하고 싶어도 먹고 나면 물을 자꾸 켜고 왠지 입이 마르니, 제대로 먹게끔 만들어주고 돈 받는 식당이 아쉽다. 어쩌다 일정이 빠듯하면 도망갈 수 없는 영락없는 부엌데기는 지쳐서 쓰러질 것 같다. 게다가 새로 내놓은 에세이집 ‘그럴 수 있어’ 덕에 요새 무슨 아이돌처럼 고된 일정을 소화하면서, 사 먹을 때와 집밥 든든히 챙겨 먹고 다닐 때 차이가 크다는 걸 실감했다. 끼니 거를 수도 없어 김밥, 샌드위치 등으로 차 안에서 이동 중에 허기를 달랬다. 거의 비슷한 질문들인 인터뷰에 혼자 두세시간 답을 하니 말하는 게 직업인데도 속힘이 달려 후들거렸다. 그러게 깍두기 국물에 비벼 먹어도 집밥은 든든한데 왜 사 먹는 밥은 돌아서면 배고픈지 모르겠다는 말을 제대로 실감했다.
기운 없어 보이니까 매니저가 쓰러진 소도 일으킨다는 산낙지를 권해서 모처럼 활짝 갠 날 틈을 내어 식당으로 갔다. 새끼조기구이와 병어찜, 맛깔스러운 집반찬, 육회와 산낙지를 먹고 계산하려는데 매니저가 사준단다. 집에 와서 엄마께 그 얘길 하니 “아유~ 세상에!! 누가 너한테 그렇게 해주니?” 하신다. 하기야 나는 늘 지갑을 여는 쪽이라, 어른 축에 드니까 누가 내게 마음을 다한 밥 한끼 사준 기억은 거의 없다.
정신없이 바쁜 일정도 끝나간다. 다들 휴가 떠나서 어떤 때는 머리 만지기와 분장도 혼자 했다. 방송국 식구들은 방학과 동시에 “애들 때문에…” 하면서 짤막한 휴가를 떠났다. 가까운 친지는 아이도 친구들과 떠난다 하고 시댁 식구도 우리처럼 늙은 부부만 있으니 가평에 풀빌라 며칠 빌려 더위나 피하고 오겠단다. 또 다른 이는 부모님 떠나시고 윗대 분들도 연로하셔서 아예 상주 쪽에 펜션 두채 빌려서 어르신들, 우리 세대, 우리 아이들, 손주들까지 4대가 사촌 육촌까지 모여 논단다. 늦기 전에 그리하겠단다. 시골 사는 식구들은 쌀, 채소, 김치, 고기, 감자, 옥수수, 고구마 등을 대고 서울서 일하는 이들은 돈으로 내고 그런단다. 그렇게 모이기도 힘들 텐데… 부럽다.
바쁜 일정 중에 뉴욕서 가까이 지내던 선배가 가신 지 100일 되는 날, 딸 셋이 서울 와서 ‘사랑하는 엄마의 밤’이라는 추모음악회를 열었다. 엄마의 친지들이 모인 자리에서 내 노래 ‘엄마가 딸에게’를 연주했는데, 그날 함께하진 못했지만 아이들 떠나기 전에 점심이라도 하고 싶었다. 어린 딸 셋 데리고 81년 미국으로 건너와 빨래방을 하며 치열하게 살다 간 ‘안 트리오’ 세 자매의 어머니!! 이영주 선배가 계셔서 안 트리오가 있었다. 밥 먹는 자리 아이들 얼굴에서 떠난 분을 만났다. 눈빛과 표정에서 그 엄마를 읽었다. 아이들도 제각기 자기 자리로 떠나고 톡을 이어가며 우리가 처음 만나 서로를 알아가던 그때, 선배의 기막힌 요리 솜씨며, 내가 뉴욕 떠날 때 아끼던 식물들과 책상을 드렸던 기억, 그 고운 웃음이 문득 생각났다. 이렇게 또 한 사람이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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