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연 지난 화에 일제강점기 남촌 일대의 변화상에 대해 간략하게 살펴봤습니다. 이번 화에서는 남산과 남촌의 거리를 따라 걸으며 경성의 번화했던 주요 장소들과 여전히 그 길에서 찾을 수 있는 건물들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더 자세하게 이어가 보겠습니다. 먼저 남산으로 올라가 볼까요.
식민지 권력의 중심, 남산 조선총독부
호택반촌 빈가목멱(豪宅班村 貧家木覓), 권세가의 호화 주택은 반촌에 있고, 가난한 선비의 집은 목멱에 있다는 말처럼 한낱 딸깍발이 선비들의 거주지였던 목멱골 남산 일대가 일본 세력의 중심으로 변화한 것은 언제부터였을까요. 그 시작을 거슬러 올라가면 1884년 갑신정변에 이르게 됩니다.
‘3일 천하’로 끝난 갑신정변. 일본 정부는 갑신정변 당시 청나라 군대의 진압으로 일본공사관 건물이 불탄 것과 공사관 서기관이 살해당한 것에 대해 조선 정부의 사죄와 배상금 지급을 요구합니다. 덧붙여 요구한 것이 공사관 건물의 신축이었습니다. 이에 대해 조선 정부는 궁궐과 최대한 멀찍이 떨어진 남산에 새 공사관을 지어 주며 일본을 내몰았습니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고, 조선을 식민지로 만든 일제는 이듬해 통감부를 설치합니다. 초대 통감이었던 이토 히로부미는 새로운 통감부 청사를 일본 공사관 근처에 신축합니다. 르네상스양식의 2층짜리 목조 건물이었습니다.
통감부가 들어서며 기존의 공사관 건물은 통감 관저로 용도가 변경됩니다. 5년 후인 1910년, 3대 통감 데라우치 마사다케와 총리대신 이완용이 한일병탄 늑약을 체결한 장소가 이곳 남산의 통감 관저였습니다.
경술국치 이후 통감부는 조선총독부로 간판을 바꾸어 답니다. 일본의 식민 지배가 본격화되며 조선총독부의 규모가 커지자 청사를 증축하는 공사가 여러 번 이루어집니다.
연이은 확장 공사에도 사무 공간의 부족이 해결되지 않자, 1926년 경복궁 흥례문 권역을 헐고 새 청사를 준공합니다. 이것이 1995년 폭파되기 전까지 조선총독부, 해방 이후에는 중앙청과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사용되었던 건물입니다. 조선총독부가 이전한 후 남산에 남은 구 청사는 국립과학관으로 사용되다 1950년 한국전쟁 때 소실됩니다.
일본인들을 위한 위락시설
개항 이후 조선으로 이주하는 일본인들의 수가 늘어나자 이들은 일본인 거류민단을 조직하여 이권 옹호를 위한 조직적인 자치활동을 펼쳐 갑니다. 1885년 한양 내 일본인 거주가 허용되면서 남촌 거주 일본인 수는 날이 갈수록 늘어났고, 일본인 거류민단은 일본인을 위한 위락 시설이 필요하다며 조선 정부에게 남산 자락에 공원을 조성해 줄 것을 요구합니다.
일본인 거류민단은 1897년 남산 북쪽 자락 1만 ㎡를 조선 정부로부터 조차해 왜성대공원을 조성했습니다. 지난 화에서 이야기했듯 임진왜란 당시 이곳에 주둔했던 일본군들을 기리는 의미였습니다. 1910년에는 남산 서북쪽 산비탈 일대 부지 30만평을 한성부로부터 무상으로 대여 받아 또 다른 공원을 만들었습니다.
고종은 칙사를 보내 이 공원에 ‘한양공원’이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왜성대공원은 지금의 숭의여자대학교와 리라초등학교, 한양공원은 남산식물원부터 숭례문 일대에 해당합니다.
왜성대공원이 조성되자 일본인 거류민단은 종교시설인 신사를 세우기 시작합니다. 이듬해 왜성대공원 안에 문을 연 신사는 남산대신궁이었습니다. 이름은 ‘대신궁’으로 거창했지만, 작은 규모의 신사였습니다. 1916년 남산대신궁은 경성신사로 이름을 바꾸고 정식 신사로 개원합니다. 신사 근처에는 하찌만궁, 텐만궁, 이나리신사 등 일본의 토속신을 모시는 부속 신사들도 생겼습니다.
조선에 ‘신토’를 심어라… 남산 중턱에 들어선 조선신궁
한편, 1920년대 중반 일본의 문화통치가 안정기에 접어들었다 판단한 조선총독부는 그동안 미뤄두었던 경성 정비 사업을 진행합니다. 이 시기 조선총독부 신청사와 경성부 신청사, 경성역 등 경성의 주요 건물들이 일제히 준공되었습니다. 남산 중턱에도 거대한 신사가 세워지기 시작합니다.
한일병탄 때부터 일제는 식민지 조선에 어떻게 신토를 정착시키고 민중들을 동화시킬지 고민합니다. 일왕을 신의 아들인 현인신으로 추앙하는 ‘천황제 이데올로기’를 심어 일본의 지배를 정당화하고, 하나의 종교나 신앙을 통해 조선과 일본을 정신적으로 단일화해 ‘내선일체’를 달성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시기 일본 식민사학자들은 <일본서기>에 등장하는 일본 시조신 아마테라스의 동생 스사노오가 열도에서 쫓겨나 정착한 곳이 한반도였고, 더 나아가 이가 곧 단군이라는 허무맹랑한 주장을 내놓습니다. 일본과 한국은 형제의 나라이며 본디 같은 민족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의 해석에 따르면, 한일병탄은 떨어졌던 형제가 다시 하나가 되었을 뿐 아니라 야만하고 미개한 중국에 오랫동안 시달리던 한반도가 근대화된 일본으로부터 구원받았음을 의미하기도 했습니다.
왜성대에 경성신사가 건립되었지만 일제는 이에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더 크고 격조 있는 신사가 필요했습니다. 새로운 신사 후보지로 현재 청와대가 있는 북악산과 사직단, 삼청동, 남산의 왜성대와 한양공원 부지 등이 선정되었습니다.
조선총독부는 1912년부터 신사 건립을 위한 예산편성에 돌입하는데, 공원 부지를 사용할 수 있어 보상비가 가장 적게 드는 남산 일대에 신사를 짓기로 결정합니다. 이 일대에 일본인들이 많이 거주했다는 점, 경성 일대를 한눈에 조망이 가능하다는 점, 풍수지리학적으로 영험한 산이라는 점이 남산을 신사 건립지로 낙점한 또 다른 이유였습니다.
조선신궁은 일본의 시조신 아마테라스와 메이지 일왕을 모신 신사였습니다. 이곳은 민간신사가 아닌 국가의례가 진행되는 ‘관폐대사’였을 뿐 아니라 일왕의 대리자 자격으로 파견된 칙사가 예물을 바치는 ‘칙제사’였습니다. 따라서 1925년 ‘신사’에서 격상된 의미의 ‘신궁’으로 이름을 변경해 완공합니다. 이 시기 칙제사는 일본 본토에도 16곳뿐이었으며 식민지에는 조선신궁이 유일했습니다.
1925년 10월 조선신궁에서는 축제 분위기가 가득한 가운데 진좌제가 열립니다. 진좌제는 신령이 신사에 깃들게 하는 제사로 이를 통해 비로소 건물이 신을 모시는 곳으로 거듭나게 되는 의식입니다. 조선신궁은 조선 최대 규모의 신사였던 만큼 아마테라스의 신체(신의 상징물) 일부가 보관되었습니다.
혼슈의 이세신궁에서 출발한 신체는 부산을 거처 경성으로 들어왔습니다. 이 때, 신체가 실린 기차를 경성역 완공 이후 처음 역에 들어온 기차로 만들기 위해 경성역의 준공식을 신궁의 진좌제에 맞추었습니다. 진좌제 이튿날에는 경성운동장의 낙성식이 열렸는데, 이후 이곳에서는 조선신궁 경기대회가 크게 열렸습니다. 새단장한 경성의 상징물들이 신궁의 성대한 개원을 위해 총동원된 것입니다.
1930년대 황국 신민화 정책의 일환으로 일제는 조선인에게 일왕에 대한 충성을 강요하고 신사 참배를 할 것을 강제합니다. 조선인은 대일본 제국의 신민임을 기록한 황국 신민 서사비가 조선신궁 앞에 세워졌습니다. 1937년 중일전쟁이 시작되자 매월 1일을 애국일로 정해 참배를 비롯해 궁성요배, 황국신민서사 제창, 근로봉사 등을 월례행사로 지정했습니다.
결국 일본이 전쟁에서 패망하고 광복이 되자, 일본인들은 스스로 전국 각지 신사에 모신 신령을 돌려보내는 승신식을 열고 신사를 해체합니다. 조선신궁도 이 당시 주요 신전과 배전, 제문이나 제구들이 철거되고 소각되어 역사 속으로 사라집니다.
<참고문헌>
ㅇ정수진, 「서울의 인문학」, 창비
ㅇ김기호,「서울 남촌 : 시간,장소,사람」, 서울시 간행물
<사-연 지난화 보기>
ㅇ사-연 시리즈 모음
https://www.mk.co.kr/news/running-story/S00010078
ㅇ 식민지 경성의 중심, 남촌의 근현대 역사를 따라 걷다 (1) / 질퍽대는 동네에 일본인 몰려왔습니다...화려한 불빛이 슬퍼지네요 [사-연]
https://www.mk.co.kr/news/premium/10793740
정부기록물과 박물관 소장 자료, 신문사 데이터베이스에 잠들어 있는 빛바랜 사진들을 열어 봅니다. ‘사-연’은 그중에서도 ‘길’, ‘거리’가 담긴 사진을 중심으로 그곳의 이야기를 풀어 나가는 연재입니다. 거리의 풍경, 늘어선 건물, 지나는 사람들의 옷차림 등을 같은 장소 현재의 사진과 이어 붙여 비교해볼 생각입니다. 사라진 것들, 새롭게 변한 것들과 오래도록 달라지지 않은 것들이 무엇인지 살펴봅니다. 과거의 기록에 지금의 기록을 덧붙여 독자님들과 새로운 이야기를 이어 나가고 싶습니다. 해당 장소에 얽힌 ‘사연’들을 댓글로 자유롭게 작성해 주세요. 아래 기자페이지의 ‘+구독’을 누르시면 연재를 놓치지 않고 읽으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