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연의 인문학이 필요한 시간] 인생의 짐인가 힘인가 … 우리 안의 콤플렉스
아돌프 히틀러. 독일과 오스트리아 국경 작은 마을에서 세관원의 아들로 태어나 열세 살 때 아버지를 잃고 불우한 시절을 보낸 아이, 국립실업학교를 때려치우고 화가가 되기로 결심했던 예민한 소년, 독신자 합숙소에 살면서 바그너와 독서에 심취했고 병역기피 혐의로 체포된 적이 있는 청년. 무엇이 이런 소심한 히틀러를 괴물로 만들었을까? 연구자들은 그 뿌리에 콤플렉스가 있었다고 말한다. 그 콤플렉스의 근원에는 의외의 인물이 한 명 등장한다. 바로 천재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이다.
1904년 오스트리아 린츠에 있었던 레알슐레 국립실업학교 단체사진을 보면 히틀러와 비트겐슈타인이 함께 등장한다. 그렇다. 희대의 전쟁범죄자 히틀러와 20세기 최고 천재라는 비트겐슈타인은 초등학교 동창이었다.
호사가들은 히틀러의 비뚤어진 반유대주의의 기원에는 초등학교 동창이었던 유대인 비트겐슈타인에 대한 열등감이 있었다고 말한다. 비트겐슈타인 집안은 유대인 최고 명문가였다. 카네기나 로스차일드 가문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유명한 세계적인 철강 재벌이었다. 비트겐슈타인 집안의 부와 권세는 대단했다. 그들의 재력은 당시 빈 예술계 전체를 먹여 살리다시피 할 정도였다.
브람스, 슈만, 구스타프 말러, 브루노 발터, 쇤베르크 등이 비트겐슈타인 집에 식객으로 드나들었다. 비트겐슈타인 집안은 구스타프 클림트가 창설한 예술단체인 분리파의 절대적인 후원자이기도 했다. 이 인연으로 클림트는 비트겐슈타인의 누나 초상화를 그리기도 했다. 비트겐슈타인에게 거액의 예술 후원금을 받은 사람 명단에는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도 있었다.
생각해보라. 비트겐슈타인 집안 식구들이 저녁 식사를 하는 동안 옆에서 피아노를 연주하고 있는 슈만의 모습을….
게다가 비트겐슈타인은 명석하고 잘생기기까지 했다. 이런 금수저 비트겐슈타인을 어깨너머로 보며 종주먹을 쥐고 이를 갈던 소년이 있었다. 바로 히틀러다.
히틀러 역시 음악·미술·문학을 무척이나 좋아한 예민한 소년이었다. 하지만 처한 환경은 비트겐슈타인과 정반대였다. 히틀러는 가난했고 학교에 적응하지 못하는 낙제생이었다. 게다가 열세 살 때 아버지가 사망하면서 생활은 더욱 어려워졌다. 그는 레알슐레를 자퇴한 후 남모르게 세상에 대한 적의를 키워나간다.
히틀러가 저술한 일종의 자서전 '나의 투쟁'에는 동창 비트겐슈타인을 비하하는 부분이 나온다. "레알슐레에서 나는 유대인 소년을 한 명 만났다. 우리는 모두 그를 조심스럽게 대했다."
비트겐슈타인은 단 한 번도 히틀러 이야기를 한 적이 없었다. 비트겐슈타인에게 히틀러는 별 존재감이 없는 대상이었다.
청년기를 거치면서 히틀러는 선동가의 길에 들어섰고, 비트겐슈타인은 맨체스터대와 케임브리지대에서 수학하면서 철학자로 명성을 얻는다. 히틀러의 콤플렉스는 그가 정치권력의 상층부에 이른 순간 극적으로 드러난다. 이미 비트겐슈타인 집안은 유대인 탄압과 전쟁으로 몰락한 뒤였지만 히틀러의 열등감은 풀리지 않았다. 히틀러는 난데없이 유대인이 예술을 타락시켰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비트겐슈타인 집안을 염두에 둔 분노였다.
히틀러는 이상하리만큼 예술에 집착했다. 히틀러는 한 지역을 점령하고 나면 가장 먼저 박물관과 미술관을 접수해 그곳에 있는 유물과 작품을 약탈했다. 히틀러는 '히틀러박물관'을 세워 그 약탈품을 보관했다. 히틀러박물관은 린츠에 있었다. 히틀러와 비트겐슈타인이 함께 다녔던 레알슐레가 있던 바로 그 도시다. 소름이 돋는다. 왜 하필 린츠였을까. '린츠의 한(恨)'이 대단하긴 했던 모양이다. 히틀러는 굳이 린츠에 제철소를 세워 비트겐슈타인 가문의 공장을 흡수해버리기까지 한다.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든다. 히틀러가 어린 시절 비트겐슈타인과 같은 학교를 다니지 않았다면, 그래서 기형적인 콤플렉스를 키우지 않았다면 역사는 좀 다르게 흘러가지 않았을까. 물론 역사에 가정은 없지만 말이다.
가브리엘 샤넬. 우리가 흔히 코코 샤넬이라고 부르는 여인은 인류 패션사에 큰 족적을 남긴 사람이다. 그는 콤플렉스의 화신이었다.
그는 가난, 고아, 여성, 외모, 불임 등 사람이 지닐 수 있는 거의 모든 콤플렉스를 다 지닌 사람이었다. 그는 콤플렉스덩어리였지만 역설적으로 운명의 지배자였다. 샤넬은 불운과 콤플렉스에서 삶의 동력을 얻은 사람이었다. 이렇게 얻은 동력으로 견고하기만 한 관습과 일대 전쟁을 벌였다.
1883년 프랑스 남부 소뮈르에서 바람둥이였던 떠돌이 장돌뱅이와 시골 처녀 사이에서 태어난 샤넬은 12세 때 결핵으로 어머니가 죽자 고아원에 맡겨져 바느질을 배운다. 그가 끔찍하게도 싫어했던 바느질은 훗날 그의 가장 중요한 자산이 된다. 18세 무렵 고아원을 나온 샤넬은 낮에는 봉제공장에서 일하고 밤에는 카페에서 노래를 부르는 아르바이트를 한다. 그는 카페에서 부유한 장교 에티엔 발잔을 만나 연인이 됐고 함께 파리로 온다. 파리에서 샤넬은 남성용 승마복과 스웨터를 여성용으로 개조하는 멋진 솜씨를 발휘한다.
여성 해방과 자유의 아이콘이 된 샤넬룩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자신의 첫 번째 상점인 모자 가게를 연 샤넬은 서서히 상류층 고객을 끌어들인다. 그의 남성 편력도 성공가도에 한몫했다. 27세 무렵 샤넬은 발잔과 헤어지고 폴로 선수 아서 카펠과 사랑에 빠진다. 카펠과 함께 도빌에 스포츠 웨어를 취급하는 상점을 낸 샤넬은 여인을 관습에서 해방시켜줄 패션 혁명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그는 치마의 길이를 무릎까지 올리고, 여성용 바지를 따로 만들어 여성의 다리를 해방시켰고, 가방에 어깨끈을 달고, 의상에 패치 포켓을 달아 여성의 손을 해방시켰다.
샤넬의 디자인은 시대 상황과 일치했다. 1차 대전으로 남자들이 전쟁터로 떠나고 여성은 경영자가 되거나 기술자가 되어 남자의 일을 해야 했다. 집에만 있는 게 아니라 대중교통을 이용해 출퇴근을 하는 여성이 늘어났다. 레이스 의상을 입고 의자에만 앉아 있던 여인들의 모습은 사라졌다. 샤넬의 이름은 이런 새로운 시대의 조류를 타고 전 유럽에 퍼져 나갔다. 샤넬은 영국으로 건너가 웨스트민스터 공작과 인연을 맺으면서 영국 귀족 스포츠 패션의 매력을 자신의 의상에 녹여내기 시작했다. 샤넬 특유의 스웨터와 카디건, 배기팬츠 스타일은 그렇게 탄생했다.
'행동하는 여자의 옷' 도빌룩을 전 유럽 대륙에 유행시킨 샤넬은 훗날 그를 대부호로 만들어준 향수 사업에 진출하게 된다. '샤넬 N˚5'는 디자이너의 이름이 들어간 사상 첫 번째 향수였다. 이름을 짓게 된 사연이 있다. 향수 제작자 에르네스트가 1번부터 24번까지 번호를 매겨 향수 샘플을 만들어왔다. 냄새를 맡아본 샤넬은 다섯 번째 향수를 선택했다. 향수의 이름을 짓는 일이 남았다. 경영진이 귀족적이고 낭만적인 이름을 고민하고 있을 때 샤넬이 말한다. "그냥 샤넬 N˚5로 할래요."
또 샤넬은 남편의 경제적 능력을 과시하던 귀금속 장신구를 여성의 아름다움을 완성시켜 주는 도구로 변화시켰다. 샤넬은 과감하게 인조 보석을 도입했다. 인조 보석을 장신구에 도입하자 여성의 액세서리는 '가성비'를 장착하고 무한정 다양해질 수 있었다.
샤넬에게도 위기는 있었다. 파리가 독일군의 손에 들어간 1940년대 샤넬은 13세 연하의 독일군 장교 한스 귄터 폰 딩클라게와 동거를 한다. 샤넬이 딩클라게와 진정한 사랑을 나눈 것인지 아니면 독일 점령하에서 살아남기 위해 그렇게 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그는 이 때문에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망명을 떠나야 했다. 망명 생활을 하던 샤넬은 1954년 귀국해 새 컬렉션을 발표한다. 크리스찬 디올에게 자극받은 샤넬은 모던한 스타일의 룩으로 갈채를 받았다. 샤넬은 열정적인 삶을 살다 1971년 88세로 생을 마친다. 여성을 해방시킨 그의 디자인 혁명은 영원히 남아 그를 기억하고 있다. 그는 자신을 지배했던 콤플렉스의 힘으로 여성의 삶을 해방시켰다.
콤플렉스는 힘이 세다. 누군가를 극단적인 악마로 만들기도 하고, 세상을 바꾼 위인으로 만들기도 한다. 사람은 누구나 콤플렉스를 지니고 있다. 콤플렉스는 사람의 생각, 감정, 행동에 큰 영향을 미친다. "한 인간의 진실은 다름 아닌 그가 감추고자 하는 것에 있다"고 했던 앙드레 말로의 말처럼 한 인간의 전모는 콤플렉스를 통해 드러나게 돼 있다. 콤플렉스에는 상황을 왜곡하는 힘이 있다. 이 때문에 콤플렉스는 삶의 에너지원이 되기도 한다. 그렇게 생성된 에너지원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악마 혹은 위인이 되는 것이다. 여기 두 명의 상반된 인생을 산 사람이 있다. 한 명은 자신의 콤플렉스를 바탕으로 희대의 만행을 저질렀고, 다른 한 명은 길이 남을 업적을 만들었다.
[허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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