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공식작전》, 유머와 연대를 싣고 끝까지 간다
(시사저널=정시우 영화 저널리스트)
1987년, 한 남자가 김포공항 입국장에 들어서자 카메라 플래시가 곳곳에서 터진다. 언론의 뜨거운 관심을 한 몸에 받는 이 남자. 베이루트에서 무장 괴한에게 21개월간 피랍돼 있다가 풀려난 레바논 주재 한국대사관의 도재승 서기관이다. 관련 사건을 다룬 당시 신문들을 검색해 보면, 풀려난 사람은 있는데 그가 어떤 경로로 풀려났는가에 대한 자세한 기술은 없다. 국가기밀 사항이었기 때문이다.
그 와중에 대통령이었던 전두환이 도 서기관 가족을 청와대로 불러 격려하는 뉴스 영상은 또렷하게 남아있다. 모르긴 해도 당시 5공 정부는 도재승 무사 귀환으로 마무리된 피랍 사건을 정권 홍보에 적잖이 활용했을 것이다. 국가가 나서서 국민을 구해낸 사건으로 말이다(그해 나라가 어떠했는가는 영화 《1987》에 잘 기록돼 있다). 그렇다면 도재승 서기관 귀환에 국가는 정말로 제 역할을 다한 것일까.
이 사건이 다시 수면 위에 오른 건, 10년 후. 한 주간지가 숨은 비화를 기사화하면서다. 교섭 과정에 참여한 한 외국인의 증언을 토대로 쓰인 기사의 요지 중 하나는 당시 협상을 주도한 건 외국인들로 구성된 팀이었다는 것. 또 하나는 전두환 정권이 도 서기관의 몸값으로 납치범이 요구한 돈의 절반만 지불하고 나머지는 '먹튀'했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다시 앞선 질문을 해보자. 도재승 서기관 귀환에 국가는 정말로 제 역할을 다한 것일까. 김성훈 감독이 심어둔 《비공식작전》 코드명이다.
실화에 상상력 가미한 스토리…캐릭터의 힘 돋보여
감독이 실화에 상상력을 얹어 주조한 이야기는 이렇다. 여기, 레바논 베이루트에서 피랍된 오재석(임형국) 서기관 구출을 위한 비공식 작전에 자발적으로 지원한 공무원이 있다.
외무부 소속 외교관 이민준(하정우). 언뜻 보면 투철한 직업정신과 인류애가 흘러넘치는 사람 같지만, 속사정이 있다. 학벌도 연줄도 약한 탓에, 서울대 출신 후배에게 런던 발령에서 밀린 그는 이번 사건을 잘 해결해 뉴욕 주재원 자리를 얻어낼 요량이다. 그에게 레바논 임무는 아메리칸 드림으로 가는 터널이었던 셈이다.
그런 민준을 이용해 역시 미국행의 꿈을 품어보는 또 한 남자가 있다. 베이루트 유일의 한국인 택시기사 김판수(주지훈). 동포애보단 당장의 '먹고사니즘'이 중요한 판수는, 일을 도와주면 미국 비자를 발급해 주겠다는 민준의 말에 오재석 구하기에 동승한다. 그러나 민준이 들고 다니는 가방 속 거액의 현금이 자꾸 눈에 아른거린다. 이를 어쩐다.
2023년 여름 극장가 두 번째 주자로 나선 《비공식작전》의 실질적인 경쟁자는 동시기에 개봉하는 영화가 아니다. 《비공식작전》의 경쟁자는 같은 소재로 관객의 호응을 얻은 《모가디슈》와 같은 소재로 관객에게 외면받은 《교섭》이다. '외교관이 해외에서 사람을 구한다'는 똑같은 로그 라인을 관통하는 비교 대조군이 존재하는 만큼, 후발주자인 《비공식작전》은 독창성 면에서 핸디캡을 안고 출발한다. 《모가디슈》가 세운 높은 기시감과도 싸워야 하고, 《교섭》이 안긴 어떤 편견도 넘어야 하는 것이 《비공식작전》이 부여받은 미션인 것이다.
비슷한 콘셉트란 이유만으로 이 영화의 재미를 지레짐작하는 건 감상에 이로운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영화라는 게 시나리오만으로 이뤄지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콘셉트는 출발일 뿐, 중요한 건 창작자가 어떤 비전을 제시하느냐이고, 어떤 '톤 앤 매너'를 설정하느냐다. 그렇다면 《비공식작전》은 어떠한가.
일단 《비공식작전》의 전략은 앞선 영화들과는 확실히 다르다. 《모가디슈》는 유엔 가입을 위해 소말리아 모가디슈에서 외교 총력전을 벌이던 남북의 정치적 상황이 중요하게 작동한 영화였다. 《교섭》의 경우 품은 소재가 워낙 논쟁적인 사건이었기에, 감독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관람 내내 관객이 과거에 있었던 실제 사건을 곁눈질하는 상황이 펼쳐졌다. 《모가디슈》 《교섭》은 '사건'이 일종의 주인공으로 기능한 영화였던 셈이다. 이와 달리 《비공식작전》이 중심에 두고 힘을 쏟은 건 '인물', 그러니까 캐릭터다. 여기엔 소재로 삼은 이야기가 잘 알려지지 않은 탓에, 창작자의 상상력 개입이 자유롭다는 것이 이점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실제로 《비공식작전》은 실화의 무게에 묶이지 않고, 유머를 큰 비중으로 배합했다.
《터널》에서 이어지는 질문
그렇다면 남은 질문. 인질 구출이라는 무게감 있는 소재에 유머가 어울릴까. 이 부분에서 개연성을 확보해 내는 건 배우들이다. 하정우는 《베를린》 《황해》에서처럼 웃음기 싹 뺀 얼굴로 극을 장악하는 데 능한 배우지만, 《러브픽션》 등에서 입증했듯 능청스러운 기운을 흘리는 데도 도가 튼 연기자다. 해병대 PX 방위병 근무 이력을 해병대 전역으로 돌려 이용할 줄 아는 민준은 《멋진 하루》의 수완 좋은 남자 '병운'에 《터널》의 생존 본능 강했던 '정수'의 위기관리 능력을 더한 남자다. 하정우는 민준 캐릭터를 귀엽게 연기하면서도 관객이 불편하지 않게 극에 몰입할 수 있도록 능숙하게 코미디 수위를 조절한다. "너무 피곤하다, 진짜"를 진짜인 양, 아마 진짜인 듯 표현하면서.
화려한 의상을 두른 주지훈은 어디에도 정착하지 못하는 사기꾼 기질의 남자를 유들유들하게 선보이며, 민준을 위기로 몰아넣을 듯 말 듯한 꿍꿍이 속내로 극에 연신 긴장감과 리듬을 불어넣는다. 민준이 '제임스 본드'류의 공무원이 아니거나와, 판수 역시 '알고 보니 숨은 무술 고수였다'는 식의 반전을 거부하는 인물인 탓에 《비공식작전》의 액션은 수비와 생존과 방어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주인공들의 능력치 결함은, 영화가 액션 아이디어를 색다르게 구상하는 방향으로 이끈다. 쫓고 쫓기는 자동차가 좁은 골목에 끼여버리거나, 전선이 얼렁뚱땅 목숨줄로 작용하는 장면 등이 아기자기하게 이어진다.
다만 각자의 이득과 목적을 위해 티격태격하는 전반부의 민준-판수의 호흡이 찰진 반면, 가슴에 태극마크를 단 듯 동포애를 드러내는 후반부의 민준-판수의 모습이 다소 인위적으로 다가오는 면이 있다. 우여곡절을 겪으며 물리적 거리가 가까워지고 있는 것은 보이지만, 그에 상응하는 심리 변화의 인과관계나 감정의 동기가 충분하게 무르익지 못한 탓이다.
외피만 보면 《비공식작전》은 김성훈 감독의 전작 《터널》에서 멀리 떨어진 이야기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같은 지류가 흐르는 영화임을 알 수 있다. 무겁게 가라앉을 수 있는 소재를 유머로써 접근성을 높였다는 것도 그렇지만, 한 사람의 생명을 둘러싼 국가 시스템의 반응을 살피는 이야기라는 점에서 결정적으로 닮았다. 《터널》엔 사회적 비용과 가성비를 들먹이는 외부의 악다구니 속에서도 구조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던 구조반 대장 대경(오달수)이 있었다. 《비공식작전》에도 정치공학적 판단을 중시하는 국가권력에 맞서 생명 살리기를 포기하지 않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소수일지라도, 믿음을 포기하지 않는 이들이 발 딛고 선 사회. 그것이 김성훈 감독이 살 만하다고 생각하는 세상일 것이다. 《비공식작전》은 그런 감독의 태도가 유유히 흐르는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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