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프] 셰익스피어를 종이에서 떼어 무대 위에 세운 이들
셰익스피어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1989년은 흥미진진했을 것이다. 그 해 개발업자들이 파헤친 한 공사현장에서 로즈 극장의 유적이 발견됐기 때문이다. 로즈는 셰익스피어가 초기 작품을 선보였던 극장이다.
그런데 불과 8개월 후, 일련의 고고학자들이 인근 주차장에서 또 다른 극장의 흔적을 발견했다. 다름 아닌 글로브였다. 글로브는 셰익스피어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이름이다. 셰익스피어는 이 극장의 주주이자 배우, 극작가로 활동했으며, 햄릿, 리어 왕, 오텔로, 맥베스 같은 굵직한 작품들을 이곳에서 선보였다. 엘리자베스 1세 시대 극장들이 연달아 발견되자 학계는 흥분했다.
한편 유적지에서 불과 2백여 미터 떨어진 곳에서 이 소식을 남달리 기뻐한 한 미국인이 있었다. 글로브 극장 재건 프로젝트를 추진하던 샘 워너메이커였다. 배우이자 감독이던 그는 1950년대 매카시즘의 열풍을 피해 런던으로 이주했다. 셰익스피어를 깊이 사랑한 그는 본고장 런던에 당시 모습을 재현한 극장이 없다는 사실을 참을 수 없었고, 결국 직접 글로브 극장을 재건하기로 결심한다.
1971년, 그는 셰익스피어 글로브 재단을 설립하고 자금을 모으기 시작했다. 지자체와 법적 투쟁도 불사하며 부지를 쟁취한 재단은 극장 설계를 위해 남아 있는 사료와 학자들의 연구를 샅샅이 살폈지만, 많은 부분을 추측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1986년 배우 쥬디 덴치가 첫 삽을 뜨며 공사는 시작되었다. 그런데 실제 글로브의 유적이 발견된 것이다!
유적이 발굴만 된다면 복원에 필수적인 귀한 자료들을 얻을 수도 있을 터였다. 그런데 유적 위에 자리한 19세기 건물이 문제가 되었다. 이미 보존 건물로 등록되어 보호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로즈 극장과 달리 글로브의 발굴은 결국 좌절되고, 현장에는 글로브 극장의 부지였다는 초라한 안내 팻말만이 설치되었다.
글로브 복원 프로젝트는 재개되었다. 워너메이커의 꿈은 원대하고도 치밀했다. 그는 야외극장인 글로브뿐 아니라 실내 소극장 또한 품은 복합 공간을 마련, 그곳을 공연장이자 교육 센터로 활용하고자 했다.
하지만 400여 년 전 건물을 당시 방식으로 짓기란 애초에 불가능에 가까운 목표였을지도 모른다. 시간의 흐름 탓에 더 이상 구할 수 없는 재료, 반드시 준수해야 하는 현대 소방법 등도 문제였다. 그럼에도 가능한 원래 극장에 가깝게 짓기 위한 노력은 계속되었다.
셰익스피어가 “나무로 된 O (Wooden O)”라고 불렀듯 글로브는 원형의 (실제로는 20각형) 목재 건물이었고, 이를 위해 참나무 1,000그루를 공수했다. 목수들은 무엇보다 무대 위 덮개를 지탱할 기둥 2개를 찾아 영국 전역의 숲을 뒤져야 했다. 12별자리가 그려져 ‘천국’이라 불릴 이 덮개는 무대를 장식하는 한편 비를 막고, 배우들의 비밀 출입구까지 갖춰야 하니 기둥은 충분히 두텁고 단단해야 했다.
벽은 염소 털을 섞은 회반죽으로 채워졌다. <한 여름밤의 꿈>의 테세우스가 '석회와 털 (lime and hair)'이라 벽을 묘사했듯, 당시에는 소털을 섞어 벽을 지었다. 당시 사용된 장모종의 소는 그간 멸종되었기에 불가피하게 캐시미어 염소털로 대체되었다.
갈대로 엮은 지붕을 얹기 위해 특별법까지 제정돼야 했다. 1666년 런던 대화재 이후 런던에서 초가지붕이 금지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아이러니하기까지 하다.
1613년, 연극 <헨리 8세>의 시작을 알리려 쏜 대포의 불씨가 당시 글로브 극장의 초가지붕에 옮겨 붙어 극장을 전소시켰고, 셰익스피어는 이후 숨을 거들 때까지 더 이상 새 작품을 쓰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새 초가지붕은 방염 처리를 거쳤고, 스프링클러 역시 눈에 띄지 않게 설치되었다.
마침내 1997년, 복원한 글로브 극장이 완성되었다. 기존 글로브와 같은 크기지만 수용 인원은 이전의 절반가량인 1,570명으로 제한되었고 그중 700명은 당시 관습대로 무대 앞마당에 서서 관람하게 된다. 사람들의 신체가 커졌고, 밀집 공간에서 불편함을 느끼는 정도가 달라졌으며 무엇보다 소방법을 준수해야 했기 때문이다.
(남은 이야기는 스프에서)
심영구 기자 so5what@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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