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낳은 자식 아냐”...매정한 엄마 아닙니다, 미술계 거장입니다 [법조인싸]

전형민 기자(bromin@mk.co.kr) 2023. 8. 6. 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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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천경자 화백 유족, 국가 상대 손배소도 패소

미술 작품의 진위 여부는 어떻게 가려지는걸까요? 공신력 있는 감정 기관들의 감정 결과와 작가 본인의 주장이 서로 갈린다면 어떤 게 맞는다고 판단할까요?

미술계에서는 수십년 경력을 가진 컬렉터도, 오랜 기간 갤러리를 운영하는 화상(畵商)도 속일 수 있는 게 미술품이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이런 분쟁은 어떻게 해결해야할까요?

이번 주 법조인싸는 최근 서울중앙지법에서 선고된 고(故) 천경자 화백과 얽힌 미인도 위작 논란을 톺아봤습니다.

국립현대미술관의 미인도. [사진=연합뉴스]
자식을 못알아보는 부모가 어딨습니까?
미인도를 둘러싼 위작 논란은 1991년 미인도가 세상에 드러나면서부터 지금까지 30여년 간 이어지고 있습니다. 작가로 지목된 천 화백 본인은 위작이라고 주장하고, 미술계 전문가들은 천 화백이 그린 진품이 맞는다고 맞서면서 시작했죠. 당시 천 화백은 지금도 종종 회자되는 유명한 말을 남깁니다. “자식을 못알아보는 부모가 어딨습니까?”

그러나 이러한 천 화백의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고, 그의 부인에도 미인도는 천 화백이 그린 진품으로 결론 지어집니다. 결국 이 논란의 충격으로 천 화백은 붓을 내려놓고, 한국을 떠나 미국으로 도미(渡美)까지 하게 됩니다.

2015년 8월, 천 화백 사후 위작 논란은 다시 한번 수면 위로 떠오릅니다. 같은 해 12월, 천 화백 유족 측의 의뢰를 받은 프랑스 뤼미에르 광학연구소가 다중스펙트럼, 초고해상도 단층 촬영 등 첨단 기법을 통해 미인도가 진품일 확률이 ‘0.0002%’라는 감정보고서를 발표하면서 입니다.

이듬해 12월 서울중앙지검이 미인도와 천 화백의 진품 13점을 감정하고, 대검찰청·국립과학수사연구소·KAIST를 통해 미인도에 대한 X선·적외선·투과광사진·3D촬영, 디지털·컴퓨터 영상분석, DNA분석 등을 통해 진품이라고 매듭 지어버립니다.

당시 검찰은 뤼미에르 팀이 사용한 계산 방식을 천 화백 다른 작품에 사용했더니 진품일 확률이 4.01% 수준으로 나왔던 점 등을 들어 ‘믿을 수 없는 결과’로 판단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판단에 따라 유족 측이 현대미술관 측 인사들을 사자명예훼손·저작권법위반·허위공문서작성 등 혐의로 고소한 사건을 모두 불기소 처분했습니다. 유족은 검찰 수사결과에 반발해 재정신청을 했지만 당시 법원은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미인도’설명하는 형사제6부 배용원 부장검사. [사진=연합뉴스]
법원이 미인도를 천 화백 작품으로 인정?
그림을 그린 당사자이자 가장 강하게 진품이 아니라고 주장해온 천 화백 본인이 이미 세상을 떠난 뒤라 검찰의 감정은 정설로 굳어지는 듯 했습니다. 하지만 이번엔 천 화백의 차녀인 김정희 몽고메리대 교수가 어머니의 주장을 이어 받아 소송을 벌입니다.

김 교수는 우선 2016년 중앙지검의 ‘진품’ 결론에 불복해 2017년 저서 ‘천경자 코드’를 출간합니다. 책에는 ‘천 화백의 다른 작품에 있는 코드가 (미인도에는) 없으므로 명백한 위작’이라는 주장이 담겼죠.

한 발 더 나아가 2019년에는 “검찰이 감정위원을 회유하고 미인도가 진품이라고 허위 사실을 유포해 천 화백과 유족의 명예를 훼손했다”며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소송을 제기합니다. 지난달 21일 서울중앙지법 민사 214단독(최형준 판사)에서 기각된 판결이 바로 김 교수가 국가를 상대로 제기한 1억원의 손해배상 청구소송입니다.

기각은 법원이 소송을 검토해보고 원고의 주장이 타당하지 않다고 판단, 소송을 종료시키는 행위 입니다. 다시 말해 김 교수가 ‘명예를 훼손당했다’고 주장했지만, 법원은 그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입니다. 패소한 것이죠.

중요한 것은 법원이 미인도의 진위 여부를 판명한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김 교수의 패소라는 결과만을 놓고 미인도가 다시 한 번 진품으로 확인된 것으로 이해하기도 하는데요. 9페이지에 이르는 판결문 전문 어디에서도 법원은 미인도의 진위 여부를 판단하지 않습니다. 지난 2016년 검찰의 미인도 진품 결론 과정에서 검찰이 고의 또는 과실로 법령을 위반해 타인에게 손해를 입힌(불법행위) 사실이 있는지를 따졌을 뿐입니다.

김 교수는 판결 직후 낸 입장문에서 “어머니가 그토록 절규했음에도 외면한 검찰과 사법부에 대한 실망은 제 개인 만의 실망이 아니며 예술종사자 그리고 온 국민에 대한 배신”이라고 비판했습니다.

고 천경자 화백의 차녀인 김정희 미국 몽고메리대 교수. [사진=연합뉴스]
작가가 직접 그렸다는데…‘위작’ 판결도
그런가 하면, 몇 년 전에는 작가는 자기가 그렸다고 하는데, 전문가들이 위작이라고 평가하는 정반대의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2016년 6월, 세계적인 거장, 이우환 화백의 위작 논란 입니다.

이 화백은 당시 위작으로 의심을 받는 자신의 작품 13점을 경찰을 찾아 직접 확인하고 기자회견을 열어 전부 진품이네요. 호흡이나 리듬 채색을 쓰는 방법이 다 내 것 입니다”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런데 해당 작품들은 이미 전문가와 국립과학수사연구원 감정을 거쳐 위작으로 판명난 상태였습니다. 심지어 일부는 범인들이 “위작을 만들었다”고 자백까지 한 상황이었죠.

결국 재판 과정에서 총 13점이 위작으로 판명됐고, 검찰의 기소로 재판을 받은 이들은 각각 징역 3~7년형이 선고됐습니다. 이 화백은 이후로 말이 없고요. 당시 미술업계에서는 이 화백의 ‘진품’ 주장을 놓고 설왕설래가 이어졌습니다. ‘이 화백 스스로 위작 유통 사실을 인정하지 못해 진품이라고 주장했다’는 설도, ‘유명 갤러리에서 판매되니까 이 화백도 진짜라고 믿었었다’는 설도 돌았죠.

일본 국립신미술관 개관 15주년 기념 회고전을 직접 구성하고 있는 이우환. 사진 제공 山本倫子.
법조계도 미술품의 진위 논란이 소송의 중심이 될 때는 적잖이 곤란하다고 말합니다. 작가 본인이 진품 혹은 가품을 주장하더라도 이해관계가 얽혀 거짓 진술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절대적으로 신뢰할 수는 없다는 설명입니다.

게다가 아무리 전문가더라도 작가 본인이 아닌 이상 진품 여부에 대한 100%의 확신을 가지고 얘기할 수도 없기 때문에, 실체적 진실을 파악하는 게 불가능하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미술품 관련 진위 분쟁을 맡아봤다는 한 법조인은 “10년 넘는 법조 경력에서 실체적 진실을 파악하기 가장 어려운 사건”이라며 “다시는 맡고 싶지 않다”고 귀띔했습니다.

일각에서는 법원이 작가의 주장에 반해 진위 여부를 판단하는 게 적절하지 않다는 주장도 나옵니다. 작가 자신이 그리거나, 그리지 않았다는 작품을 국가가 강제로 작가의 주장과 반하는 쪽으로 정하는 것은 시시비비만을 가리기 위한 지나친 개입이라는 주장입니다.

한편 천 화백의 유족인 김 교수는 지난 2일 법원에 항소장을 제출한 상태 입니다. 천 화백과 유족을 향한 국가의 명예훼손 여부에 대한 시시비비는 당분간 재판을 통해 계속 이어질 예정입니다.

*천 화백은 작고 전 서울시립미술관에 수십점의 작품을 기증했습니다. 서울시립미술관은 천 화백을 기려 천경자개인전을 상설전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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