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전프로 한 번 빌리기 어렵네”… ‘애플 신비주의’에 혀 내두르는 개발자들

박수현 기자 2023. 8. 6.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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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플, MR 헤드셋 ‘비전프로’ 개발자 대여
소수 선별 후 ‘펠리칸’ 케이스에 담아 배송
“보관 장소 10일 이상 비우면 애플에 연락”
잡스의 신비주의 ‘철학’… 직원·협력사 안 가려
애플의 MR(혼합현실) 헤드셋 '비전프로'./애플

“문을 잠근 방 안에서만 사용할 수 있습니다. 사용 시 항상 몸에 지니고 있거나 시야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권한이 없는 사람은 봐서도, 만져서도, 접근해서도 안 됩니다. 사용하지 않을 시에는 제공된 케이스에 넣고 자물쇠를 채운 뒤, 사물함 등에 넣고 잠근 채 보관해야 합니다. 한 순간도 방치해서는 안 됩니다.”

애플이 지난달 24일(현지시각) 앱 개발자들을 대상으로 자사 MR(혼합현실) 헤드셋 ‘비전프로’를 빌려주며 내건 조건들이다. 앱 개발을 위해 공식 출시 전 미리 제품을 써보길 희망하는 개발자라면 반드시 이들 조건이 담긴 계약서에 서명해야 한다. 업계에서는 ‘신비주의로 유명한 애플이 이번에도 한 건 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미국 경제전문매체 비즈니스인사이더는 비전프로를 “정부의 일급 기밀 프로젝트” “핵무기 발사 코드”에 빗댔고, 영국 IT 전문매체 맥월드는 “개발자들은 대여를 결정하기 전에 조건들을 한 번 읽어봐야 할 것”이라며 “이미 대중에 공개한 제품을 빌려주는 것치고는 굉장히 엄격하다”고 평했다. 애플의 조건들을 자세히 살펴봤다.

◇ 대여 대상도 소수정예로 뽑는 애플… 포장은 미군이 쓴다는 ‘펠리칸’ 케이스

애플은 비전프로 대여를 희망하는 개발자 중 소수를 선정해 비전프로와 액세서리, ‘펠리칸’ 케이스 등으로 구성된 ‘개발자 키트(DK·Developer Kit)’를 제공한다. 펠리칸 케이스는 미국 하드케이스 전문기업 펠리칸프로덕츠의 제품으로, ‘탱크가 밟아도 멀쩡한 극한의 내구성’으로 잘 알려져 있다. 미군이 군수품으로 사용해 현지에서는 하드 케이스의 대명사로도 불린다. 비밀 유지는 물론 파손 우려에 대한 애플의 ‘진심’이 읽히는 대목이다.

애플은 DK 프로그램 참여 및 대여 계약서 중 ‘DK 관리와 보관’ 조항에서 “대여자와 대여자로부터 권한을 부여받은 동료 개발자만이 사적이고 안전한 업무 공간에서 DK를 사용 및 보관할 수 있다”며 “이 공간은 문, 바닥, 벽, 천장 모두 완전히 닫혀 있어야 하고 복수의 자물쇠도 갖춰야 한다”고 설명했다. 애플은 이어 “가족, 친구, 동거인, 주택 관리 직원을 비롯한 권한이 없는 사람은 DK를 접근하거나, 보거나, 만지거나, 사용해서는 안 된다”며 “DK 사용 시에는 항상 몸에 지니거나, 정면 시야에서 벗어나지 않게 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DK를 사용하지 않을 시에는 “전원을 끄고 펠리칸 케이스 안에 넣어 자물쇠를 채운 채 보관해야 한다”며 “DK를 넣은 펠리칸 케이스는 대여자만이 접근할 수 있는 문이 잠기는 방이나, 옷장, 금고, 서랍 등에 넣어야 한다”고 했다. 애플은 또 “대여자는 애플의 사전 서면 승인 없이 DK를 배송 주소 외 다른 장소로 옮길 수 없다”며 “대여자 또는 대여자의 동료 개발자가 이곳을 10일 이상 비우게 될 경우에는 애플에 연락을 취해 이 기간에 DK를 어떻게 안전히 보관할지 상의해야 한다”고 했다.

애플 '비전프로 개발자 키트' 대여 계약서에 대한 개발자들의 반응./엑스·레딧 캡처

개발자들은 재밌어하는 눈치다. 학생용 플래너 앱인 ‘스쿨 어시스턴트’ 등을 개발해 현재 애플 앱스토어에서 판매 중인 딜런 맥도날드는 지난달 25일 엑스(X·옛 트위터)에 계약서의 일부를 캡처해 올리며 “미쳤다(INSANE)”라고 썼다. 미국 최대 온라인 커뮤니티 레딧에는 ‘생화학 무기냐’ ‘다음 제품 때는 정부 허가 받고 쓰라고 하겠다’는 댓글이 올라왔다.

다만 ‘평범하다’는 반응도 적지 않다. 자신을 개발자로 밝힌 한 레딧 이용자는 “합리적인 조건”이라며 “개발자들의 주의를 요하기 위해 애플이 극단적으로 표현한 것 같다”고 썼다. 또 다른 이용자는 “대부분 타사도 흔히 제시하는 조건이지만 펠리칸 케이스는 좀 색다르다”고 했다.

◇ 전통이 된 잡스의 ‘신비주의’… 위반 협력사에 ‘1건당 654억원’ 요구도

애플은 창업주인 고(故) 스티브 잡스의 철학에 따라 신비주의 전략을 고수하고 있다. 잡스는 생전에 직원들에게 ‘회사 기밀을 유출할 경우 해고에 그치지 않고 변호사를 동원해 법적으로 대응하겠다’며 엄포를 놓은 것으로 알려졌다. 애플은 지금도 각각 다른 부서에서 일하는 직원들이 업무 이야기를 나누면 제재하고, 외부에 ‘내부 분위기가 어떻다’는 수준의 발언만 해도 경고하는 것으로 전해진다.

애플의 ‘전통’은 협력사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과거 디스플레이 협력사였던 GT어드밴스드테크놀로지스가 파산 과정에서 애플의 지나친 위약금을 이유로 들며 고소한 일화가 대표적이다. GT어드밴스드테크놀로지스는 2014년 법원에 제출한 고소장에서 애플이 비밀 유지 사안 위반 1건당 5000만달러(약 654억원)를 요구했다고 밝혔다. 애플과 관련된 모든 홍보는 사전에 서면 승인을 받아야 한다는 내용의 별도 계약서도 있었다고 했다. 이에 올해 3월 애플의 간편결제 서비스 ‘애플페이’가 한국에 상륙한 직후 국내 파트너사인 현대카드가 홍보에 소극적인 자세를 보였을 때도 업계는 ‘애플이 또 애플했다’는 반응을 보였다.

업계는 같은 맥락에서 애플이 지난해 6월 메타가 마이크로소프트(MS), 알리바바, 화웨이 등과 발족한 ‘메타버스 표준 포럼’에 참여하지 않은 것으로 보고 있다. 메타버스 표준 포럼은 메타가 XR(확장현실) 시장 선도를 위해 메타버스 표준 정의 및 기술 개발을 목표로 꾸린 협의체다. 당시 미국 IT 전문매체 나인투파이브맥은 “애플은 AR(증강현실), VR(가상현실) 프로젝트를 여전히 극비에 부치고 있다”며 “애플은 이 협의체에 가입함으로써 이 시장에 진출한다는 사실을 알리는 걸 원치 않을 것”이라고 했다. 애플은 해당 포럼 발족 이후 1년 만인 지난 6월 비전프로를 공개하고, 내년 초 출시를 예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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