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견의 ‘허들’ 넘어 국가대표 최전방 공격수로 나서다 [경기장의 안과 밖]
2023년 7월5일은 한국 축구사에 특별한 날로 기억될 것이다. 2023 국제축구연맹(FIFA) 오스트레일리아-뉴질랜드 여자월드컵에 출전하는 대한민국 선수 23인의 명단에 케이시 유진 페어라는 이름이 포함되었기 때문이다. 여자 축구 국가대표팀을 이끌고 있는 콜린 벨 감독은 2007년생인 페어를 월드컵 공격진의 일원으로 선택했다.
한국인 어머니와 미국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페어는 한국과 미국 복수국적자다. 아버지가 과거 한국에서 영어 교사로 일하던 중 어머니를 만났고, 미국 뉴저지로 건너가 정착한 뒤 페어가 태어났다. 여섯 살에 축구를 시작한 페어는 남자아이들과 경쟁할 정도로 기량이 성장했다. 178㎝, 68㎏의 좋은 신체 조건에 빠른 발과 수준급 테크닉을 지닌 것으로 평가받는다.
페어의 소속 팀은 미국 축구 명문 유소년 팀인 플레이어스 디벨롭먼트 아카데미(PDA)다. 페어는 여자축구 세계 최강인 미국에서도 특급 유망주로 눈길을 끌었다. 비슷한 시기 한국 축구도 페어를 주목했다. 지난해 한국계 유망주의 존재를 확인한 대한축구협회(KFA)는 15세 이하 대표팀 소집 훈련에 페어를 참가시켰다.
페어는 어머니의 나라에서 국가대표로 뛰는 길을 택했다. 지난 4월에는 16세 이하 대표팀 소속으로 2024 아시아축구연맹(AFC) 17세 이하 여자 아시안컵 예선에 출전해 두 경기에서 5골을 기록했다. 성인 수준의 힘과 스피드로 동 연령대를 압도하는 모습을 보이자 벨 감독은 월드컵 준비를 위한 최종 소집 훈련 기간에 페어를 불렀다. 한 달 가까이 진행한 강훈련과 연습경기에서 열 살 이상 차이 나는 언니들 틈에서도 제 몫을 했다. 벨 감독은 과감히 월드컵 최종 명단에 페어를 발탁했다.
지난 6월29일 만 16세가 된 페어는 이로써 한국 남녀 축구 통틀어 최연소 월드컵 참가 선수가 됐다. 2003년 16세 9개월의 나이로 월드컵에 참가했던 박은선의 기록을 깼다. 박은선은 이번 대회에 팀 내 두 번째 고참으로 참가하는데, 자신과 스무 살 차이가 나는 페어와 공격을 이끈다. 7월20일 개막한 여자월드컵에서 페어가 조별리그 1·2차전에 출전하면 세계 여자축구 전체에서도 월드컵 최연소 출전 기록을 세운다.
복수국적자인 페어가 태극마크를 달고 월드컵 무대를 누비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다른 나라의 대표팀 소속으로 A매치에 출전하지 않았기 때문에 FIFA 규정상 결격 사유가 없다. 오히려 한국에서의 편견이 대표팀 진입 장벽이었는지도 모른다. 단일민족 국가라는 정체성이 뿌리 깊은 한국 사회 인식이 그동안 다문화가정에서 나고 자란 선수에게 허들이었다.
페어는 한국 축구 사상 최초의 다문화가정 월드컵 국가대표가 아니다. 남자축구에 전례가 있다. 영국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장대일이 1998 FIFA 프랑스 월드컵에 출전한 바 있다. 하지만 장대일이 다문화가정 출신이라는 사실은 그로부터 시간이 꽤 흐른 뒤에 밝혀졌다.미군 아버지를 둔 1970년대 한국 농구의 대표 스타인 김동광도 비슷한 사례다. 외국인과 한국인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를 향한 사회 인식엔 부정적 편견이 깔려 있었고, 성장 과정에서 이를 어떻게든 숨기려고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스포츠에서 ‘태극마크’는 오랜 시간 순혈주의 혹은 단일성을 유지해왔다. 불과 10년 전만 해도 남자축구 국가대표팀은 외국인 선수의 귀화를 추진했다가 강한 반발에 부딪혔다. 2014 FIFA 브라질 월드컵을 위한 최종 예선 과정에서 탈락 위기를 맞자 에닝요, 라돈치치 등 K리그에서 활약하는 외국인 선수의 활용이 논의됐다. 하지만 여론의 반대가 거셌다. 대한체육회 역시 그런 분위기에 편승해 대한축구협회의 요청을 승인하지 않았다.
한국만의 정서는 아니다. 프랑스·독일·이탈리아 등에서도 아랍계 이주민, 아프리카계 선수들의 대표팀 발탁을 두고 정치적 논쟁이 있다. 프랑스의 극우 정치인 장마리 르펜은 이주민·난민 출신 선수들이 주축이 된 축구 국가대표팀을 “프랑스 국가도 제대로 못 부르는 인종 쓰레기장”으로 표현해 큰 파장을 일으킨 적 있다. 알제리 이주민 2세이자 ‘축구 대통령’인 지네딘 지단은 강하게 반발하며 “르펜이 총선에서 승리하면 국가대표 은퇴도 불사하겠다”라며 강하게 반발했다. 르펜은 패배했다. 지단의 드리블과 패스가 어떤 통합 정책보다 효과가 크다는 지지가 사회 각계에서 일어났기 때문이다. 인종차별 의식이 강한 이탈리아조차 최근 입양아, 난민 출신인 흑인 국가대표가 등장하는 분위기다.
한국 스포츠계의 사고를 바꾸는 전환점
대한민국은 21세기 들어 사회구조적으로 큰 변화를 겪고 있다. 통계청의 인구주택총조사에 따르면 한국 다문화 가구원은 2019년 이미 100만명을 돌파했다. 지난 3년 사이 10만명이 더 늘었다. 총인구의 3%에 육박하는 비중이다. 자연스럽게 다문화, 난민 가정 출신 자녀들이 사회 중심 구성원으로 등장하는 시기를 맞았다.
최근 스포츠 영역에서 변화가 감지된다. 한국 사회에서 성장하지 않았지만 한국계로서 부모로부터 문화적 영향을 받은 선수들이 태극마크를 원하고, 각 종목도 그에 화답하고 있다. 지난 3월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에서 태극마크를 달고 뛴 타미 현수 에드먼은 이민을 간 한국인 어머니와 대학 야구 코치인 미국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났다. 메이저리그의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에서 주전 내야수로 활약 중인 그는 현 국적뿐만 아니라 부모 국적 나라를 대표해 뛸 수 있다는 WBC 참가 자격 규정을 통해 한국 야구대표팀의 일원이 됐다.
한국 사회에서 성장한 선수라면, 용모나 피부색이 이질적이어도 그들을 포용하는 분위기가 형성됐다. 콩고민주공화국 출신 부모를 둔 비웨사 다니엘 가시마는 경기도 안산에서 태어나 쭉 성장했다. 2018년 한국 국적을 택한 그는 한국 단거리 육상의 새 기대주로 관심을 모은다. 축구에서도 비슷한 사례가 이어지고 있다. 가나에서 이주해온 부모 아래에서 태어난 데니스 오세이, 앙골라 국적의 난민 부모를 둔 풍기 사무엘, 코트디부아르 출신으로 오산고(FC 서울 유스팀)의 특급 유망주로 인정받는 바또 사무엘 등이다.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 성공을 위해 한국은 취약 종목 중심으로 외국인 선수 19명을 특별귀화 시켰다. 하지만 그 문호 개방이 선수의 기능에만 집중했다는 한계가 있었다. 당시 귀화 선수 대부분이 올림픽 이후 고국으로 돌아갔기 때문이다. 오히려 복수국적이어도 한국에서 태어났거나 장시간 한국에서 성장해 한국 문화와 정서를 가진 선수들에 대한 정책과 관리가 중요하다는 목소리가 높다. 유럽에서 익숙한 '홈그로운(국적은 다르지만 3년 이상 성장한 선수를 자국 선수와 동일하게 취급하는 제도)'과 유사한 제도를 통해 다문화가정 선수들의 대회 참가를 지원할 필요가 있다.
페어 역시 어머니를 통해 한국 문화를 익숙하게 받아들이고 있지만, 한국어 구사는 어려운 상태다. 태극마크를 다는 기준이 용모나 언어, 애국가를 부를 수 있는지 여부에만 머물고 있었다면 한국을 사랑하는 특급 유망주는 미국 대표팀으로 향했을 것이다. 페어의 이번 여자월드컵 참가는 한국 축구, 더 나아가 한국 스포츠계의 사고를 바꾸는 전환점이 될 것이다. 동시에 스포츠를 통해 다문화가정에 대한 편견을 극복하고자 하는 젊은이들의 롤모델이 될 수 있다.
배진경 (<온사이드> 편집장)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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